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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090926호

마음까지 위로하는 따뜻한 정책 “감사합니다”




 


 

10년 전 자궁암 말기도 잘 이겨내고 별 탈 없이 지내오던 어머니가 3년 전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어머니가 2년 반 동안 병원에 계실 때 주말과 휴일마다 식구들이 병원에 들러 번갈아가며 보살펴드렸다. 그러나 후유증으로 몸의 왼쪽이 마비돼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이 났다. 어머니는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아픈 몸을 이끌고 재활치료를 받으면서 “이 에미가 병마를 이겨낼 테니 걱정하지 말라”며 환하게 웃으셨다.
 

그러나 2년 반에 걸친 어머니의 오랜 병원 생활로 치료비 부담과 함께 가족들의 생활에도 어려움이 많았다. 그러던 중 2008년 7월 1일부터 시범 실시하고 있는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올해 초 어머니를 집으로 모셨다.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의 혜택을 받기 위해 국민건강보험공단 내 노인장기요양보험지원센터를 방문해 장기요양인정신청 절차에 따라 신청서와 의사소견서를 첨부해 접수시켰다.
 

일주일이 지날 무렵 국민건강보험공단 노인장기요양보험 제도 등급판정위원회 직원이 집으로 찾아와 방문 조사를 한 후 2등급으로 판정해주었다. 이후 가족회의를 통해 시설급여보다는 집에서 돌볼 수 있는 재가급여가 낫겠다는 생각에 재가급여를 신청했다.
 

집으로 돌아오신 어머니는 훈련된 장기요양요원의 도움으로 안심하고 재활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한 걸음씩 발을 떼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빠른 시일 내에 건강한 모습을 되찾으실 수 있을 거라고 희망한다.


 

 


 

“직장 경험도 없는 네가 어떻게 애를 먹여살릴래?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쥐 죽은 듯이 애나 키우고 살아.”
 

이혼을 요구하는 내게 도박에, 바람까지 피우고 다니던 전 남편이 비웃으며 했던 말이다. 고졸 학력에 직장 경험도 없는 나로서는 그 말을 불문율처럼 믿었다. 결국 힘겨운 소송 끝에 이혼을 했지만 전 남편의 말이 현실이 된 것인지 어렵게 들어간 직장을 그만두게 됐고 먹고사는 게 막막해졌다.
 

어렵게 사시는 친정 부모님은 물론 바쁘게 사는 형제들에게 손 벌릴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럴 때 어떻게 할까. 죽을 생각은 하지 않을까. 이런 극단적인 생각들로 눈물범벅이 돼 웹서핑을 하던 중 우연히 기초생활수급자에게 대학등록금을 지원해준다는 정보를 알게 됐다. 주간에는 근로학생 혜택도 주어진다고 했다. 직장도 구하고 사회복지사가 되는 꿈도 이룰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았다. 아이를 어디다 맡길까 걱정을 했는데 그것도 정부보조금으로 어린이집에 보낼 수 있었다.
 

나는 현재 전주비전대 사회복지경영과 야간 2학년에 재학 중이다. 내년 2월이면 사회복지사로서 당당히 전문직업인의 대열에 서게 된다. 벼랑 끝에 선 모자가정의 가장인 나를, 여섯 살짜리 딸아이를 살려낸 것은 다름 아닌 기초생활수급자에 대한 대학등록금 지원 사업이었다. 앞으로 내가 받은 이 혜택을 세상의 소외된 이들을 위해 나누고 싶다.


 

 


 

2007년 어느 날, 출근을 준비하던 남편이 갑자기 쓰러졌다. 어린 아들이 119에 전화를 빨리 한 덕에 남편은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CT 촬영 결과 남편은 뇌종양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남편이 수원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겨진 뒤 길고 긴 병원 생활이 시작됐다.
 

갑자기 생긴 일이라 아이들 맡길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생각난 것이 시청에서 만든 ‘무엇이든 도와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스티커였다. 시청에 전화해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위기가정에 보육교사를 파견해주는 제도가 있다고 했다. 두 달가량 보육선생님이 아이들을 돌봐주었는데 공부를 가르쳐줄 뿐만 아니라 식사까지 챙겨주고,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등 성심성의껏 보살펴줘 감동을 받았다.
 

이제 남편은 몸 상태가 온전하지는 않지만 복직을 했고 아이들도 안정을 찾았다. 완전히 고립돼버렸던 아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보내준 선생님에게 평생 감사하며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또한 우리 가정처럼 위기에 처한 가정들이 이런 도움의 손길을 받을 수 있길 바란다.


 

 


 

부모님은 결혼했을 때부터 남의 집 셋방살이를 전전하며 사셨다. 언니와 내가 태어난 후에도 살림살이는 나아지지 않았다. 낮에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지하 셋방, 돼지 농장, 세간도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은 시골집 등 가족들은 일 년에도 몇 번씩 이사를 하며 힘겹게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다급하게 어머니를 찾으며 영구임대 아파트 입주자 공고문이 떴다고 말씀하셨다. 부모님께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은행에 가 신청서류를 접수시켰다. 발표가 있던 날 부모님은 행복의 눈물을 흘렸다. 영구임대 아파트 입주 자격이 되어 1994년 12월 4일 경기 분당구 정자동 한솔마을에 입주하게 된 것이다. 46제곱미터의 아파트지만 4백60제곱미터만큼의 감사함으로 15년째 살고 있다.
 

부모님 기억에는 이제 이사란 추억으로 남아 있다. 나라에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좋은 조건으로 만든 영구임대 아파트는 좁아서 불편할 때도 있고 옆 동네 부촌 아파트에 비해 초라해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이제 75세가 되신 아버지와 62세가 되신 어머니께서 이 아파트에서 당당하고 떳떳하게 노후를 보내실 수 있게 돼 행복하기만 하다.
 

정리·김민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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