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PEC 2025 KOREA 예술감독 양정웅
천년의 고도 경주가 분주하다. 10월 31일 시작되는 202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이하 APEC 2025)를 앞두고 세계 21개국 정상과 대표단을 맞이할 막바지 준비가 한창이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지속가능한 내일’을 주제로 이어질 이번 회의는 외교적 담론이 중심이지만 그 무대 뒤편에는 또 다른 소통이 기다리고 있다. 예술로 전하는 환대의 언어다.
정상회의의 만찬 자리는 전통적으로 문화예술 공연이 함께한다. 국가 간 이해와 공감을 돕고 긴장된 외교의 순간에 여유를 더하는 역할이다. 때로는 짧은 공연 한 장면이 수많은 말보다 강렬한 인상을 남기기도 한다. APEC 2025에서는 한국문화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전할 깊이 있는 예술 무대가 준비돼 있다. 그 중심에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과 2023년 네덜란드 국빈방문 답례 문화행사, 2024년 한·아프리카 정상회의 만찬 공연을 연출한 양정웅 예술감독이 있다.
평창올림픽 개회식 당시 드론 1218대가 대관령 하늘에 오륜기를 수놓은 장면은 양 감독의 손에서 탄생했다. 사람의 얼굴을 한 ‘인면조’가 고구려 복장의 무용수들과 춤추며 한국의 미를 현대적으로 풀어낸 장면도 그의 작품이다. 양 감독은 전통의 미학에 첨단기술을 접목해 새로운 예술언어를 만들어내는 연출가로 평가받는다.
그런 그가 APEC 2025 예술감독으로 나섰다. 세계 각국 정상에게 선보일 갈라 만찬 공연을 비롯해 회의 전반의 문화프로그램을 총지휘한다. APEC 2025 개막을 2주 앞두고 그를 만났다.
APEC 2025가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문화공연 준비는 지금 어떤 단계에 와 있나요?
디테일에 가장 집중하고 있는 단계입니다. 완성되지 않은 부분이나 각 장면의 연결을 세밀하게 점검하고 있어요. 공연의 완성도는 결국 작은 요소 하나에서 결정되기 때문에 놓친 점이나 부족한 부분이 없는지 계속 살피고 있습니다.
APEC은 외교의 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문화나 예술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APEC은 국가 간 협력과 경제적 비전을 논의하는 아주 중요한 자리죠. 이런 국제무대에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대화를 유연하게 이어가려면 문화와 예술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통적으로 각국 정상들이 함께하는 만찬에는 문화공연이 빠지지 않습니다. 올림픽에서 개회식이 큰 의미를 지니듯 정상 만찬의 문화공연도 하나의 프로토콜이자 중요한 축이에요. 초청국으로서 자국의 문화를 보여주고 예술을 통해 환대의 마음을 전하는 무대입니다.
공연 주제는 ‘나비의 여정’이라고요.
APEC 2025 공식 엠블럼 속 나비의 상징성을 확장해 주제를 ‘나비의 여정’으로 정했어요.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는 ‘나비효과’처럼, APEC 정상들이 나눈 대화와 움직임이 미래의 가치와 비전으로 발전하길 바라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1막 ‘날갯짓 시작’, 2막 ‘바람을 넘어’, 3막 ‘작은 날갯짓의 큰 변화’ 등 이번 정상회의가 나비효과가 돼 K-컬처를 전 세계에 보여줄 수 있도록 했습니다.
APEC 2025의 중점 과제인 ‘연결·혁신·번영’은 공연 안에서 어떻게 표현되나요?
‘연결’은 앞서 말씀드린 나비의 여정과 맞닿아 있습니다. 작은 움직임이 큰 변화를 만든다는 메시지죠. ‘혁신’은 AI이니셔티브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AI를 모티브로 한 미디어 콘텐츠를 통해 예술과 기술이 만들어내는 감각을 시도했습니다. ‘번영’은 신라의 정신에서 찾았어요. 경주는 로마나 콘스탄티노폴리스(이스탄불)처럼 세계적으로 드문 천년 수도입니다. 동아시아 교류의 허브이자 황금의 나라로 불렸던 신라의 기운을 품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이번 APEC이 경주에서 열린다는 사실 자체로 큰 상징성을 갖습니다. 황금의 도시에서 펼쳐지는 이번 무대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새로운 협력의 장이 되길 기대합니다.
본적지인 경주에서 APEC이 열린다는 점도 남다르겠습니다.
아버지와 할머니의 고향이 경주라 방학 때마다 내려가 지냈습니다. 태종무열왕릉이나 김유신장군묘, 수중왕릉은 어릴 적 제 놀이터였죠. 불국사와 첨성대도 익숙한 공간이에요. 돌아보면 그때의 기억들이 제 감수성을 만들어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신라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끌렸고 제 연극에서도 신라를 자주 다뤘습니다. 한 달 동안 배우들과 경주에 머물며 ‘신라의 기를 받자’고 연습한 적도 있고 2012년 국립극단의 ‘삼국유사 프로젝트’에도 참여했습니다. 제가 자라며 영감을 받아온 도시에서 예술무대를 맡게 됐다는 건 연출가로서 인생의 또 다른 의미 있는 장면입니다.
평창올림픽에서 정보기술(IT)을 예술적으로 접목한 연출로 주목받았습니다. 이번 공연에서도 기대해도 될까요?
한국은 IT 강국이자 미래 혁신을 실행하고 꿈꾸는 나라입니다. 이번 공연에서도 그 정체성을 반영해 영상의 대부분을 AI 기술로 구현했습니다. 동시에 출연자들이 직접 몸으로 감정과 에너지를 표현하는 아날로그 장면도 담았습니다. AI는 하루가 다르게 진화하고 있어 공연에 적용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한국이 AI 이니셔티브를 주도하는 만큼 그 비전을 문화예술 안에서도 실험해보고 싶었습니다. 평창에서는 드론과 미디어 파사드, 컴퓨터그래픽(CG) 등 미디어 아트적 기술이 중심이었습니다. 이번 APEC 무대는 그 기술적 유산 위에 AI라는 예술언어를 더한 시도입니다.
공연을 준비하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요?
외교 행사인 만큼 결례가 없어야 합니다. 종교와 문화, 취향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우리 전통의 미를 보여주면서도 첨단 요소를 자연스럽게 녹여내야 하죠. 지나치게 과시해도 과도하게 겸손해도 안되는 미세한 균형 사이 줄타기가 가장 어려웠습니다. 장면과 장면을 잇는 과정에서도 누가 보더라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톤을 찾는 일이 쉽지 않았어요. 제게는 이번 작업이 ‘나비의 여정’처럼 배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무대를 완성해가는 매 순간 스스로를 더 엄격하게 검증했고 그 과정에서 작품이 점점 단단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국제행사 연출을 여러 차례 맡았습니다. 이번 무대는 이전과 어떤 점이 다른가요?
무엇보다 한국문화의 폭과 깊이가 눈에 띄게 넓어졌다는 점이 다릅니다. 2018년 평창올림픽 때만 해도 해외에서 바로 떠올릴 수 있는 한국 콘텐츠는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정도였어요. 한국문화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데 시간이 많이 필요했죠. 하지만 지금은 K-팝, K-드라마, K-영화 등 세계가 이미 한국의 문화를 알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어떻게 보여줄까’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무엇을 빼야 할까’를 고민할 정도로 선택지가 많습니다. 한국이 가진 콘텐츠의 스펙트럼이 넓어졌고 이번 무대에서 그 다양성과 생동감을 잘 담아내고 싶습니다.
매번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과정이 쉽지 않겠습니다.
트렌드만 조금 따라가도 새로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너무 앞서간 탓에 이해받지 못한 적도 있었지만요(웃음). 요즘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만들어내는 흐름이 놀라울 만큼 빠르고 흥미롭습니다. 그들의 감각과 속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영감을 받고 동시대성과 호흡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의도한 메시지와 관객의 해석이 맞닿는 순간을 체감할 때가 있나요?
그 힘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 같습니다. 비평가들이 몰라줘도 관객이 알아주면 그게 가장 큰 힘이에요. 공연예술은 결국 관객과 함께 완성하는 예술이니까요. 무대 위에서 관객의 반응과 사랑을 느낄 때 다시 창작할 힘이 생깁니다. 의도한 메시지가 정확히 읽히지 않아도 관객이 위로받거나 즐거웠다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한국을 알리는 무대가 아니라 세계가 주목하는 한국 무대가 됐습니다. 현장에서 그 변화를 실감하나요?
이게 꿈이냐 생시냐 할 정도로 꿈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는 25년 전부터 전 세계를 돌며 K-연극을 알리려 노력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한여름 밤의 꿈’을 한국의 도깨비로 재해석해 무대에 올렸죠. 2006년 한국 연극 최초로 영국 바비칸센터와 글로브 극장에 초청받았고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 등 세계 각국의 무대에 섰습니다. 그 시절엔 한국 작품을 소개하기가 쉽지 않았는데 지금은 세계가 먼저 한국을 주목하니 정말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한국문화는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다고 보나요?
심장의 위치에 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 세계와 가장 활발하게 교류하며 그 열기를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지점이죠. 이 박동을 즐기면서도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기초예술과 순수예술이 단단히 버티고 그 위에 대중예술과 창작예술이 함께 자라는 모습일 겁니다.
이번 무대를 통해 어떤 반응을 기대하나요?
APEC 문화공연은 예술의 자율성과 외교 행사가 가진 형식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게 중요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관객이에요. 이번 공연의 관객은 21개 회원 정상들이죠. 종교도 문화도 언어도 모두 다르지만 잠시나마 공연을 즐기고 “흥미로웠다”, “따뜻했다”는 인상을 받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성공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술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역할은 결국 공감이니까요.
이근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