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법정스님 빠삐용 의자, 이한열 티셔츠…
1988년 9월 17일. 서울 잠실 주경기장에서 제24회 서울올림픽경기대회 개회식이 열렸다. 수만 관중과 전 세계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화려한 율동과 매스게임, 태권도 시범에 이어 긴 정적이 찾아왔다. 잠시 후 먼 곳에서 “삐이”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한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넓은 잔디밭을 가로질렀다. ‘정적(靜寂)’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굴렁쇠 퍼포먼스는 단순한 시각적 연출을 넘어 냉전 체제가 남긴 긴장과 갈등을 종식하고 인류의 평화와 화합을 향한 강력한 메시지를 담아 세계인의 큰 주목을 받았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상징하는 ‘굴렁쇠’와 굴렁쇠 소년이 착용한 의상 디자인 초안인 ‘의상 스케치’가 대한민국 첫 ‘예비문화유산’에 선정됐다.
예비문화유산이란 제작되거나 형성된 지 50년이 지나지 않은 근현대문화유산 중 장래 등록문화유산으로서 보존 가치가 높은 것을 선정해 훼손과 멸실을 막고 지역사회 미래 문화자원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제도다. 2024년 9월 ‘근현대문화유산의 보존 및 활용에 관한 법률’이 시행되면서 도입됐다. 국가유산청은 그동안 공모와 추천 등을 통해 검토한 후보 가운데 최초의 예비문화유산 10건을 선정했다고 11월 12일 밝혔다.

노벨평화상 메달부터 성냥 제조 설비까지
예비문화유산에는 ‘88 서울올림픽 굴렁쇠와 의상 스케치’를 비롯해 대한민국 현대사의 주요 순간과 인물, 사건, 이야기가 담긴 중요 유물들이 포함됐다.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메달 및 증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한국과 동아시아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특히 남북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인정받아 2000년 한국인 최초로 수상한 노벨평화상 메달과 증서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법정스님 빠삐용 의자’는 ‘무소유’의 저자 법정스님이 1975년 송광사에 불일암을 지은 후 이듬해 땔나무를 이용해 직접 만들어 수행할 때 사용한 의자다. ‘빠삐용’이라는 이름은 영화 ‘빠삐용’에서 주인공이 외딴섬에 갇혀 인생을 낭비한 것에 비춰 이 의자에 앉아 스스로 삶을 되돌아본다는 의미로 법정스님이 직접 지은 것이다. 이는 그의 삶과 가치관, 철학을 상징한다.
‘이한열 최루탄 피격 유품’은 1987년 연세대학교 총궐기 시위 중 최루탄에 피격된 열사의 옷과 신발 등이다. 이 사건은 명동성당 농성 투쟁, 최루탄 추방대회, 국민평화대행진 등 민주항쟁의 기폭제가 됐으며 이 유품은 오늘날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사의 중요한 상징물로 인식되고 있다.
국내에 하나밖에 없는 성냥 제조 설비도 예비문화유산에 이름을 올렸다. ‘의성 자동 성냥 제조기’는 성냥개비에 초와 두약(화약)을 찍어 자동 제작하는 기계로 1982년 국내 정식 모델이 없던 당시에 경북 의성군 주민들과 국내 회사가 다년간의 연구 끝에 현지 공간에 맞게 합작한 것이다. 국내 유일하게 남아 있는 완전품으로 1980~90년대 의성 및 경북 일대 산업·생활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77년 한국 첫 에베레스트 정복 기록도
전남 고흥군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를 돌본 마리안느 스퇴거·마가렛 피사렉 간호사가 쓴 물건, 남극관측탐험대와 남극세종과학기지 관련 자료, 1977년 산악인 고상돈 씨가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 등반에 성공했을 당시 자료도 목록에 올랐다.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치료 및 간병도구’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두 간호사가 소록도에서 한센병 환자와 가족들의 치료와 간병을 위해 사용했던 도구들(1976~2005)로 열악한 의료 환경과 편견 속에서도 환자의 존엄을 지키며 한센병 퇴치와 인식 개선을 위해 한평생을 헌신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국남극관측탐험대 및 남극세종과학기지 관련 자료’는 1985년 한국인 최초로 추진한 남극대륙 탐사와 1988년 세종과학기지 준공에 이르기까지 과정을 알 수 있는 일지와 조사기록, 장비 등이다. 1986년 남극조약 가입, 1989년 조약협의당사국(ATCP)으로의 선임 등 대한민국이 남극 진출국으로 지위를 확보하기까지 극지에서 한국인이 남긴 도전의 노력이 반영된 유물로 평가받는다.
‘77 에베레스트 등반 자료’는 1977년 9월 15일 한국인 최초로 에베레스트 최정상 등반에 성공한 산악인 고상돈 씨가 당시 사용한 등반 장비, 의복, 기록 등이다. 이 자료는 1977년 9월 15일을 ‘산악인의 날’로 지정하는 계기가 됐고 이후 14좌 완등 등 한국 산악의 발전에 중요한 기초를 제공했다.
이밖에 ‘제21회 캐나다 몬트리올 올림픽 양정모 레슬링 선수 금메달’과 ‘제41회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 기념물’도 예비문화유산에 선정됐다. 양정모 선수의 금메달은 정부 수립 후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국가유산청은 이 메달이 “태릉 선수촌과 한국체육대학교의 건립, 병역특례 제도 등 한국 스포츠 세계화를 위한 다각적 노력과 한국인 특유의 투지가 이뤄낸 성과물”이라고 평가했다.
지바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남북단일팀 기념물은 1991년 사상 최초로 구성된 남북단일팀 탁구선수단이 사용한 서명 탁구채와 삼각기(페넌트)를 말한다. 탁구채에는 당시 참여했던 남북선수단 전원의 서명이 담겨 있다. 삼각기에는 ‘KOREA’와 한반도기가 새겨져 남북 화합과 협력의 의미를 상징한다.
강정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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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