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생활
영화 ‘오디세이’의 아날로그 결벽증

어두컴컴한 상영관, 스크린 위로 기괴하고도 매혹적인 광경이 펼쳐진다. 마녀 키르케의 섬에 발을 들인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이 피부가 거칠어지고 관절이 비틀어지며 끝내 돼지의 형상으로 변해가는 장면이다. 화면을 지켜보던 관객들은 중얼거린다. “저건 당연히 100% 최첨단 컴퓨터그래픽(CG)이나 인공지능(AI) 합성 기술이겠지.”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 장면마저도 CG가 아니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아날로그 결벽증이다.
놀런은 이번 신작 ‘오디세이’에서도 CG나 생성형 AI 도움 없이 변신 에피소드를 카메라에 실사로 담아냈다. 정교하게 설계된 미세 아날로그 메카트로닉스 수트, 특수분장 거장들과의 협업, 그리고 실제 돼지들의 신체 구조와 움직임을 밀착 촬영해 편집한 연출이었다. 놀런의 이 ‘미친 고집’은 오늘날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진 영화계에 그 자체로 하나의 거대한 화두를 던진다.
놀런은 AI는 고사하고 3D 그래픽조차 가급적 스크린에 들이지 않는 엄격한 아날로그 신봉자다. 그의 영화적 커리어는 실제 물리법칙과 아날로그 질감을 프레임 안에 온전히 가두기 위한 도전의 역사였다. ‘다크나이트’(2008)에서는 고담시의 밤거리를 연출하기 위해 미국 시카고 도심 한복판을 통제한 뒤 실제로 18륜 대형 트럭에 특수장치를 달아 공중으로 뒤집어버렸다.
‘인터스텔라’(2014)에서는 주인공의 집을 둘러싼 거대한 옥수수밭을 촬영하기 위해 캐나다 캘거리 인근 약 200만㎡(60만 평)의 땅에 진짜 옥수수 씨앗을 뿌려 농사를 지었다. 촬영이 끝난 후 수확한 옥수수를 팔아 제작비를 충당한 일화는 유명하다.
“진짜를 보고 진짜 반응을 하라”
‘테넷’(2020)은 공항 폭파신을 위해 퇴역한 실제 보잉747 여객기를 매입해 건물에 직접 부딪혀 폭파시켰다. 그리고 ‘오디세이’에서는 시칠리아 인근 섬의 거친 바다 로케이션을 고집하며 배우들을 진짜 거친 파도 속으로 밀어넣었다. 또 2m가 넘는 거구의 배우와 130㎝대의 스턴트우먼을 한 프레임에 배치하고 원근법 착시만을 이용한 ‘강제 원근법(Forced Perspective)’으로 실사 거인을 만들어냈다. “그린스크린 앞에서 허공을 보며 상상해 연기하지 마라. 당신의 눈앞에 있는 진짜를 보고 진짜 반응을 하라.” 놀런이 현장 배우들에게 늘 던지는 일갈이다.
한 세대 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1990년대 초 ‘쥬라기공원’을 촬영할 때만 해도 상황은 반대였다. 당시 기계장치 모형(아니마트로닉스)만으로는 거대한 공룡의 역동적인 움직임을 표현하는 데는 한계가 명확했다. 스필버그는 배수진을 치고 CG라는 신기술을 전격 도입했고 스크린 위를 거침없이 누비는 티라노사우루스를 본 관객들은 경악했다. 그때만 해도 디지털 그래픽은 필름 시네마가 마법과 신화의 영역으로 진입했음을 알리는 거대한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마법도 일상이 되면 더 이상 귀하지 않은 법. 30년이 지난 지금, 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인간의 뇌는 생각보다 가짜를 훨씬 빠르게 감지해낸다. 아무리 정교한 그래픽이라 한들 광원의 미세한 꺾임이나 물리법칙을 미세하게 위배하는 비현실적 질감을 본능적으로 구별한다. 이른바 ‘불쾌한 골짜기(Uncanny Valley)’다.
오늘날 손가락 하나만 딸깍거리면 AI가 수초 만에 우주를 만들고 공룡을 연출하는 세상이 되면서 역설적으로 디지털과 AI 생성물의 희소 가치는 폭락했다. 놀런 감독이 AI 생성 콘텐츠를 주저없이 “AI 쓰레기(AI Slop)”라 부르며 “AI가 인간의 독창적인 창의성을 대체할 수 있다는 건 완벽한 착각이자 오만”이라고 일축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명품의 보증서가 된 ‘No-AI’ 표식
3000년 전 희랍 영웅의 고독하고 숭고한 여정을 그린 ‘오디세이’가 한국에서도 열풍이다. 아이맥스(IMAX) 상영관은 24시간 풀가동 체제임에도 표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고 했다. 집에서 클릭 한 번이면 온갖 공짜 콘텐츠와 OTT가 쏟아지는 시대에 굳이 비싼 티켓값을 지불하며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만드는 가장 강력한 동력은 바로 ‘진짜의 중력’이 아닐까. 놀런의 영화는 배경 전체를 그린스크린과 디지털 합성으로 채워 넣는 마블류 블록버스터의 정반대편에 서 있다.
아날로그의 반격은 비단 영화관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다. AI 작곡 프로그램이 3초 만에 완벽한 악보를 만들어내자 사람들은 잡음이 찰칵거리며 스치는 LP 음반의 턴테이블 바늘 소리를 찾아 수집하기 시작했다. AI 그림이 픽셀 단위로 완벽한 일러스트를 도출해내자 미술 시장에서는 유화 물감이 캔버스 위에서 울퉁불퉁하게 굳어진 실재적 질감과 거친 붓터치에 열광한다. 이제는 거꾸로 100% 인간의 고민과 노동, 손길로만 만들어졌음을 보증하는 ‘No-AI’ 표식이 새로운 시대의 진정성이자 명품의 가늠자가 됐다. 정교하지만 영혼이 부재한 0과 1의 코드 조합 속에서 대중은 다시 인간의 고민이 깊게 투영된 손맛을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디세이’ 흥행 신화는 단순한 상업적 성공을 넘어 AI에 맞서는 ‘아날로그의 반격’인 셈이다.
어수웅
조선일보에서 문학, 영화, books 등 문화부 기자를 오래했다. 지은 책으로 ‘탐독’ ‘파워 클래식’ 등이 있다. 주말뉴스부장, 문화부장, 여론독자부장을 거쳐 현재 논설위원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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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