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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책 싫다’는 가족과 1박 2일 북스테이… 종이숲에서 사랑을 발견했다

- 경기 김포시 월곶면 ‘봄길책방 북스테이’

봄길책방 북스테이

봄길책방 북스테이
주소 경기 김포시 월곶면 포내로 123번길 51
운영시간 매일 12~18시
북스테이 문의 (0507)1390-1473

부부 책방지기가 마을 언덕 위에 지은 ‘봄길책방 북스테이’. 1층은 저녁 6시까지 방문객과 공유하는 책방으로, 2층은 숙박객이 머무는 침실 겸 서재로 구성돼 있다. 사진 이규대

결혼 8년 차, 남편과 다툴 때마다 책 속에 얼굴을 묻었다. 토하듯 불만을 쏟아내고 거실로 나가 책장을 펼쳐드는 아내를 보며 훗날 남편은 “나를 골탕 먹이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고 했다. 부부싸움을 하다 말고 책을 읽는 모습이 상대방에겐 이해불가였겠지만 나에겐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나름의 방책이었다. 책 속엔 나도 모르는 내 마음을 섬세한 문장으로 정돈해놓은 작가들의 말이 있었다. 흰 종이 위에 까맣게 인쇄된 글자들을 하나씩 좇다 보면 격앙됐던 감정들이 조금씩 가라앉았다. 예민한 사람에겐 책을 읽는 행위가 일종의 ‘급속충전’이라던데 내가 딱 그랬다.
‘하루 종일 누워서 책이나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 남편의 가족여행 제안에 30분 만에 북스테이를 예약했다. 책으로 가득 찬 숙소에서 ‘놀멍쉬멍’ 하는 건 상상만으로도 벅찼다. 다만 복병은 여행 파트너. 결혼 전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같은 벽돌책을 서점 계산대에 턱 하니 올리던 남편은 결혼 후 책은커녕 어떠한 활자도 읽지 않는 민낯을 드러냈다. 여기에 “난 책 싫어!”를 당당하게 외치는 미운 일곱 살 아이까지. 책만 가득한 숙소에서 하루 종일 뭘 하겠나. 이참에 애서가 가족이 돼보자는 부푼 희망을 안고 길을 나섰다.

사진 이규대

여행 좋아하는 부부가 지은 길 위의 책방
‘봄길책방 북스테이’는 인천시 강화를 품은 경기 김포의 끝자락 월곶면에 자리하고 있다. 평화누리길 1코스에 인접한 한적한 마을 언덕 위 책방에 다다르면 앞으로는 염하강이 뒤로는 문수산이 시야 한가득 펼쳐진다. 책과 여행을 좋아하는 부부 책방지기는 길 위에 잠시 쉬다 갈 수 있는 숙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4년 전 아버지의 고향에 집을 지었단다. 책방 이름은 정호승 시인의 ‘봄길’에서 따왔다. 마을 끄트머리에 자리한 책방은 ‘길이 끝나는 곳에도 길이 있다’는 시구와도 맞춤이었다. 이규대 대표는 “책방에 앉아 있으면 일년 내내 통창으로 하루 해가 지고 저무는 것을 볼 수 있다”고 귀띔했다.
2층짜리 복층 주택 구조의 책방은 ‘내 삶에서 길을 찾는다’를 주제로 장르를 가리지 않고 양서를 구비해 놓았다. 족히 5000권은 돼보이는 ‘종이숲’에서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 여행책 서가였다. 여행 와서 왜 또 여행책을 읽느냐고 묻는다면 집 떠나 들뜬 감정을 더욱 고취하기 위해서랄까. 이런 마음을 알아주는 듯한 구절을 장 그르니에의 ‘섬’에서 발견했다. ‘여행이란 아마도 일상적 생활 속에서 졸고 있는 감정을 일깨우는 데 필요한 활력소일 것이다. (중략) 그 감각이 없이는 우리가 느끼는 그 어느 것도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문장을 더듬으며 오늘 하루만큼은 모든 것을 천천히, 그리고 깊게 감각해보리라 마음먹었다.

글이 어려운 이들에겐 ‘그림 시’를
오후 6시까지 책방 1층은 모두에게 개방되고 그 이후부터는 침실이 있는 2층까지 숙박객이 전체를 단독으로 사용한다. 책방이 열린 동안 과거 출판사 북디자이너였던 이 대표에게 드로잉을 배우러 오는 동네 주민, 근교에 나들이 나왔다 들른 손님, 터줏대감 길고양이 ‘노랭이’까지, 책방을 여럿이 함께 누리는 동안 불편하기는커녕 일일 책방지기가 된 듯 즐거웠다.
책방에 와서도 뛰어놀기 바쁜 아이에게 “우리 책 좀 볼까?” 하며 팔을 끌어당겼다. 그림책 서가로 갈 줄 알았던 아이의 발걸음은 가우디 건축물의 사진이 담긴 두꺼운 건축서 앞에 멈춰 섰다. 지난여름 개최된 월드컵을 보며 전 세계 나라의 이름을 줄줄 읊던 아이는 “엄마, 스페인이야!”라며 눈을 반짝였다. 정작 그림책에 빠진 건 나였다. 수준 높은 그림책은 동화책이라기보단 ‘그림으로 쓴 시’에 가까웠다. 글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거대한 판형에 알록달록 색으로 가득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기분은 화가가 쓴 시를 읽는 듯했다.
글자가 도통 눈에 안 들어온다는 남편에겐 유키코 노리다케의 ‘형제의 숲’을 권했다. 남녀가 만나 집을 짓고 살아가는 과정을 몇 장의 그림으로 덤덤히 풀어낸 책을 보며 “우리도 60대쯤엔 책방을 하고 살면 좋겠다”는 말을 건넸다. 듣고 있던 책방지기는 “쉽지 않다”며 작은 한숨을 뱉었다. ‘동네책방 지속탐구’라는 책의 갈피마다 그가 수없이 붙여 놓은 포스트잇이 떠올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창밖 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낭만도 쉽게 포기가 되진 않았다.

하루 해가 뜨고 지는 풍광이 펼쳐지는 창가에서 온종일 책 속에 파묻히는 경험은 특별하다.

평소 책을 안 읽는 아이도 잠자리에서 읽을 책을 스스로 골라 왔다.

책방지기 손때 묻은 책엔 무슨 사연이
저녁식사를 한 뒤엔 마당에서 숯불에 고구마를 구워 먹고 해먹도 타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고작 1박 2일 숙소를 예약한 것뿐인데 가을밤을 전세 낸 듯 평화로웠다. 잠옷으로 갈아입은 아이는 잠자리에서 읽을 책으로 ‘내가 라면을 먹을 때’를 골랐다. 귀여운 제목과 달리 책은 내가 라면을 먹을 때 지구 반대편에서 어떤 아이는 물을 긷고, 빵을 팔고, 전쟁으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는 내용이었다. 다소 무거운 분위기에 당황한 것도 잠시, 불편한 이야기를 통해 자기 세계를 확장하는 것이 책의 의미가 아니겠나 싶어 “세상은 모두 연결돼 있고 우리는 서로가 가진 마음과 힘을 나누며 살아야 한다”고 조용히 말해주었다.
2층 서가엔 책방지기의 손때 묻은 책들로 가득했다. ‘책방지기가 밑줄 긋고 눈물 한 방울 떨구며 읽은 책’이라는 메모 아래는 김훈, 김연수, 에쿠니 가오리, 아멜리 노통브 등의 소설책이 서로에게 기댄 채 서 있었다. 침대 머리맡엔 색이 누렇게 바랜 책들로 가득했는데 순간 가장 나이 많은 책을 찾아보자는 호기심이 일었다. 육안으로 가장 낡은 책을 끄집어보니 1974년 초판 발행이 찍힌 ‘강은교 시선 풀잎’이었다. 이 밖에도 1970~1980년대 시집이 유독 많았는데 시인을 꿈꾸던 문학청년이 수십 년이 지나 책방지기가 됐다는 상상에 미소가 지어졌다.

책장에서 눈을 떼고 마당으로 나가면 앞으로는 염하강이, 뒤로는 문수산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사진 이규대

봄길책방 북스테이 이규대 대표

네 줄 문장 두고 밤새 나눈 대화
책등을 손가락으로 주르륵 더듬으며 책의 제목만 훑어봐도 재미있는 놀이였다. 그러다 손끝이 멈춘 자리는 1992년 초판 정채봉의 ‘내 마음의 고삐’였다.
‘사제 올빼미가 먼 산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혼은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사랑 못지않게 화해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지. 함께 사는 데는 사랑해라는 말보다도 미안해라는 말이 더 중요하다.’
문장을 본 순간 남편에게 달려갔다. “이것 좀 봐. 우리 얘기 아냐?” 며칠 전 크게 다퉜다 화해한 일을 두고 한 말이었다. 우리는 테이블 위에 책을 두고 밤새 대화를 나눴다. 전에 없던 ‘고마워’, ‘미안해’, ‘더 사랑할게’ 같은 말들이 책장 위로 포개졌다. 학창 시절 정호승 시인을 좋아했다던, 지금은 ‘사피엔스’를 책장 장식 정도로 아는 남편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조금 예뻐 보였다.
다음 날 아침 손님이 많지 않으니 편히 쉬다 가라는 책방지기의 배려에 여유롭게 티타임을 즐겼다. 그러다 24절기에 따라 일상의 행복을 찾는 법을 써놓은 책 ‘제철행복’에서 ‘백로’ 부분을 펼쳤다. 백로란 밤 기온이 내려가 풀잎에 흰 이슬이 맺히는 시기라는데 마침 창밖엔 가을비가 떨어지고 있었다. 김신지 작가는 백로엔 ‘내가 누구게!’ 외치듯 툭툭 떨어지는 도토리 소리를 들으며 숲으로 향하라고 했다. 톡톡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책 숲에 와 있으니 제대로 계절을 즐기고 있구나!
애서가 가족 되기 미션은 엄마 혼자 책을 더 사랑하게 된 결말을 맞이했지만 모두가 나름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으니 그걸로 만족이다. 마지막으로 온가족이 함께 읽으면 좋을 책을 사 책방을 나섰다. 마리야 이바시키나의 ‘당신의 마음에 이름을 붙인다면’엔 우리말엔 없는 세계 각국의 아름다운 단어가 서정적인 수채화와 함께 실려 있었다. ‘돌체 파르 니엔테(dolce far niente)’, 이탈리아어로 ‘모든 순간이 즐거움으로 가득한 달콤한 게으름’을 뜻한다. 순간을 즐기는 일에 시간을 허비한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이국의 위로를 받으며 가족은 책 숲에 가을의 추억을 새겼다.

글·사진 조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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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6시 내 고향’ 리포터 등 15년간 방송인으로 일해온 저자는 어느 날 도시의 삶을 과감히 내려놓고 시골로 향했다. 집을 짓고, 텃밭을 가꾸고, 흙을 만지며 도예가로 살며 자연이 건네는 작은 행복을 응시하는 순간들을 포착했다. 동시에 매일 잡초와 씨름하고 배달도 되지 않는 불편함을 감수하며 자신만의 리듬을 되찾아가는 치열한 정착 여정도 가감 없이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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