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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생활

변방의 음악에서 세계를 잇는 ‘패노메논’이 되다

추석 특집

1996년 그룹 H.O.T.의 데뷔를 기점으로 한국 아이돌 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한 지 올해로 30년이 됐다. 지난 30년 동안 K-팝 기획사 지형도는 SM엔터테인먼트와 대성기획(현 DSP미디어)의 양강 구도에서 SM·JYP·YG엔터테인먼트의 이른바 ‘3대 기획사’ 체제로, 다시 하이브까지 합류한 ‘4대 기획사’ 체제로 재편됐다.
산업의 성장 방식도 달라졌다. 과거에는 방송과 히트곡, 유명 작곡가에 대한 의존도가 컸다면 이제는 누리소통망(SNS)과 유튜브, 숏폼 콘텐츠, 글로벌 유통망, 현지 공연과 팬덤 구축이 아티스트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가 됐다. K-팝의 해외 진출 역시 단순히 한국에서 만든 음악을 수출하는 단계에서 벗어나 현지 인재를 발굴하고 K-팝의 제작 시스템을 이식하는 ‘현지화’ 단계로 진화하고 있다.
30년 전 변방의 댄스음악에서 출발한 K-팝은 이제 미국 빌보드 메인 차트 정상에 반복적으로 이름을 올리고 세계 각지에서 대규모 공연을 여는 글로벌 대중문화로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기획사의 경쟁 방식과 중소 기획사의 생존전략, 팬덤의 역할도 함께 달라졌다. K-팝 30년의 산업 지형 변화와 새로운 성장 공식을 짚어봤다.

1세대 아이돌 그룹 ‘H.O.T.’. 사진 뉴시스

‘젝스키스’. 사진 뉴시스

기획사 지형도의 변천사, 양강에서 ‘빅4’로
K-팝 30년의 역사는 시대를 대표한 기획사들의 주도권 변화와 맞물려 있다.
1990년대 후반 한국 아이돌 시장은 SM과 대성기획이 양강 구도를 형성했다. SM은 H.O.T.와 S.E.S. 등을 통해 체계적인 연습생 육성과 음반·방송·공연을 결합한 아이돌 제작 시스템을 구축했고, 대성기획은 젝스키스와 핑클 등을 앞세워 경쟁했다. 이 시기를 거치면서 아이돌을 중심으로 한 조직적인 팬덤문화도 빠르게 성장했다.
2000년대 후반에는 YG와 JYP가 두각을 나타내면서 SM과 함께 이른바 ‘3대 기획사’ 구도가 자리 잡았다. YG는 빅뱅과 2NE1 등을 통해 힙합과 개성 강한 음악·퍼포먼스를 선보였고, JYP는 원더걸스와 2PM 이후 트와이스 등을 앞세워 대중적인 음악과 퍼포먼스로 시장을 확대했다. SM 역시 동방신기와 소녀시대, 샤이니, EXO 등으로 세대교체를 이어갔다.
이들이 국내를 넘어 아시아 시장으로 활동 반경을 넓히면서 K-팝의 해외 진출 기반도 마련됐다. 유튜브와 누리소통망(SNS)의 확산은 이러한 흐름에 새로운 동력을 더했다.
3대 기획사의 구도에 균열을 낸 것은 방탄소년단(BTS)이었다. BTS의 소속사 빅히트엔터테인먼트는 당시 대형 기획사에 비해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지만 SNS를 적극 활용하고 해외 팬들과 직접 소통하면서 기존과 다른 성장 경로를 만들어냈다.
BTS의 글로벌 성공은 빅히트의 사업 확장으로 이어졌다. 빅히트는 여러 엔터테인먼트 회사를 인수·편입하고 사업 영역을 넓혔으며 2021년 사명을 하이브로 변경했다. 현재 하이브·SM·JYP·YG는 국내 K-팝 산업을 대표하는 ‘빅4’ 기획사로 불린다.

‘거제 야호’ 밈으로 화제를 모으면서 음원 차트 역주행까지 이뤄낸 ‘리센느’. 사진 더뮤즈엔터테인먼트

중소 기획사의 생존 공식
중소 기획사의 생존 방식도 크게 달라졌다. 과거에는 방송 출연 기회를 확보하고 유명 작곡가의 곡을 받아 히트시키는 것이 중요한 전략이었다. 그러나 유튜브와 SNS, 숏폼 플랫폼이 성장하면서 기획사의 규모가 작더라도 콘텐츠를 통해 팬과 직접 만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대표적 사례가 KQ엔터테인먼트 소속 에이티즈(ATEEZ)다. 에이티즈는 중소 기획사 소속이라는 한계를 넘어 미국 메인 앨범 차트 ‘빌보드 200’ 1위를 세 차례나 차지하며 주목을 받았다. 이들은 데뷔 초기부터 미국 현지 K-팝 전문 플랫폼인 헬로82 등과 손잡고 해외 소규모 투어를 돌며 무대의 에너지만으로 글로벌 마니아를 결집시켰다. 현장에서 관계를 먼저 맺은 뒤 글로벌 팬덤 동력을 국내로 역수입하는 새로운 활로를 개척한 것이다.
최근에는 숏폼과 밈을 활용한 화제성도 새로운 변수로 떠올랐다. 더뮤즈엔터테인먼트 소속 걸그룹 리센느(RESCENE)는 멤버 원이의 유튜브 콘텐츠에서 비롯된 ‘거제 야호’ 등이 SNS에서 화제를 모으며 그룹과 기존 음악에 대한 관심을 끌어올렸다.
그 결과 2년 전 발매된 곡 ‘러브 어택(LOVE ATTACK)’이 뒤늦게 멜론 TOP 100 1위에 올랐다. 신곡이 아닌 과거 발표곡이 SNS에서 다시 주목받으면서 음원 차트 정상까지 올라간 사례다.
이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하다. 이제 음악을 알리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결국 차트 역주행을 완성한 것은 다시 음악이었다. 팬과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는 콘텐츠와 오래 소비될 수 있는 음악이 결합할 때 새로운 성공 공식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데뷔 초부터 북미·유럽 등 해외 투어와 현지 팬덤 구축에 집중하며 미국 ‘빌보드 200’ 1위 등을 달성한 그룹 에이티즈. 사진 KQ엔터테인먼트

K-팝의 개념이 달라졌다
글로벌 시장에서 몸집을 키운 하이브는 단일 아티스트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고 사업을 다각화하기 위해 멀티 레이블 체제를 구축했다. 여러 레이블이 독자적인 아티스트 제작과 A&R 기능을 유지하면서 하이브 차원의 글로벌 네트워크와 인프라를 활용하는 방식이다.
하이브의 또 다른 전략은 K-팝 제작 시스템 자체의 글로벌화다. 한국에서 만든 아티스트를 해외에 진출시키는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지 인재를 발굴하고 K-팝의 연습생 육성 및 제작 시스템을 결합하는 방식이다.
대표적 사례가 하이브와 미국 유니버설뮤직그룹(UMG) 산하 게펜레코드가 함께 만든 걸그룹 캣츠아이(KATSEYE)다. 미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캣츠아이는 최근 미니 3집 ‘와일드’로 빌보드 200 정상에 올랐다. 이는 K-팝식 제작 시스템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글로벌 그룹이 미국 현지 시장에서도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이 같은 흐름은 K-팝의 개념 자체가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과거의 K-팝이 ‘한국에서 만들어 해외로 수출하는 음악’이었다면, 지금은 한국의 제작 시스템과 팬덤 운영 방식, 콘텐츠 기획력을 세계 각 지역의 인재와 결합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다.

한국의 하이브와 미국의 게펜레코드가 손을 잡고 탄생시킨 한미 합작 글로벌 걸그룹 캣츠아이. 사진 하이브-게펜레코드

그래미 논란, 세계 무대에서 높아진 K-팝의 목소리
K-팝의 높아진 위상은 그래미어워즈를 둘러싼 논란에서도 드러났다. BTS는 지난 7월, 2027년 그래미어워즈에 음악을 출품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새롭게 신설된 ‘베스트 아시안 팝 뮤직 퍼포먼스’ 부문 등이 발표된 직후 나온 결정으로 BTS는 음악이 지역이나 언어에 따라 구분되기보다 그 자체로 사랑받기를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그래미어워즈를 주관하는 레코딩아카데미는 해당 부문을 둘러싼 음악계의 의견을 청취했고 8월 14일 하비 메이슨 주니어 최고경영자는 부문 운영 방식을 재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K-팝이 미국 주류 음악시장에서 단순한 ‘아시아 음악’이 아닌 하나의 주요 장르로 자리 잡으면서 세계 무대에서 그 위상에 걸맞은 평가 기준을 둘러싼 논의도 본격화되고 있다.

경쟁에서 생태계로, ‘패노메논’이 여는 다음 30년
K-팝 산업의 다음 과제는 개별 기획사의 경쟁을 넘어 산업 전체의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 가능성을 보여주는 움직임 가운데 하나가 2027년 12월 열리는 대규모 K-컬처 축제 ‘패노메논(FANOMENON)’이다. 팬(Fan)과 현상(Phenomenon)을 결합한 이름의 이 행사는 2027년 12월 2일부터 12일까지 서울 창동 서울아레나와 경기 고양 킨텍스에서 열릴 예정이다. 최휘영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박진영 대중문화교류위원회 공동위원장이 추진 계획을 발표했다.
정부는 이 행사에 외국인 관광객 20만 명을 포함해 모두 52만 명이 방문하고 1조 원 이상의 경제효과가 발생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국내 행사를 넘어 세계를 순회하는 페스티벌로 확대한다는 구상도 제시됐다.
패노메논이 주목하는 것은 단순히 유명 아티스트의 공연을 한곳에 모으는 데 그치지 않는다. K-팝을 중심으로 공연과 시상식, 체험 프로그램 등을 결합해 팬들이 문화의 수동적인 소비자를 넘어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는 장을 만들겠다는 데 의미가 있다.
K-팝의 30년은 산업의 규모만 커진 역사가 아니다. 기획사의 제작 방식이 바뀌었고, 음악을 유통하는 플랫폼이 바뀌었으며, 해외 팬을 만나는 방식도 달라졌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만들어진 음악이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넘어 이제는 한국의 제작 시스템 자체가 글로벌 콘텐츠 산업의 한 모델로 자리 잡고 있다.
H.O.T.에서 BTS로, 그리고 캣츠아이와 새로운 중소 기획사 아티스트들로 이어지는 30년의 여정은 K-팝이 더 이상 ‘한국에서 만들어진 음악’이라는 지리적 의미에 머물지 않음을 보여준다. 앞으로의 K-팝은 한국이라는 출발점을 넘어 세계 각지의 창작자와 팬이 함께 만드는 문화산업으로 확장될 가능성이 크다. 지난 30년이 세계를 향한 도전의 시간이었다면, 앞으로의 30년은 그 영향력을 어떻게 지속 가능한 문화 생태계로 발전시킬 것인지가 관건이다.

이재훈 기자
뉴시스에서 사회부와 문화부를 거쳐 대중음악을 담당하고 있다. 네이버 문화재단 온스테이지 기획위원을 거쳐 현재 한국대중음악상(KMA) 선정위원을 맡고 있다. 저서로 ‘K컬처 트렌드 2026’, ‘K컬처 트렌드 2025’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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