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외교 슈퍼위크가 끝났다. APEC 회원 및 초청국 정상, 국제기구 대표, 글로벌 최고경영자(CEO)들은 경북 경주에 집결해 글로벌 외교 무대를 펼쳤다. 2025년 APEC 정상회의 참석자이기에 앞서 손님인 이들은 한국을 맛보고 듣고 느끼고 즐겼다. 이들에게 축적된 한국적 경험과 한류에 대한 호감은 측량하기 힘든 또 다른 외교 성과다. 슈퍼위크를 빈틈없이 채운 문화·푸드·콘텐츠·뷰티 외교의 장면들을 되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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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문화외교
‘천마총 금관 모형’의 왕관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마음을 빼앗았다. 문화재 복제 장인이 특별 제작한 이 선물은 국빈으로 한국을 찾은 트럼프 대통령의 ‘황금 선호’ 취향을 저격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최고 훈장인 무궁화대훈장을 서훈한 것도 화제였다. 어깨에 거는 정장, 가슴에 다는 부장, 목에 거는 경식장, 옷깃에 다는 금장 등으로 구성된 무궁화대훈장을 수훈한 것은 미국 대통령 중 처음이다. 한국조폐공사가 만든 이 훈장에는 금 190돈(712.5g), 은 110돈(412.5g), 루비와 자수정, 칠보 등이 재료로 쓰였다.
두 선물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은 “너무나 아름다운 선물이다. 당장 착용하고 싶을 정도”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수행원에게는 “백악관 박물관 제일 앞줄에 전시하라”고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관계자에 따르면 10월 31일 트럼프 대통령은 미중 정상회담을 위해 경주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 수지 와일스 비서실장에게 전날 받은 훈장과 금관을 대통령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 실으라고 지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정상 간 주고받은 선물은 관례적으로 외교 행낭으로 전달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요구로 한바탕 긴급 공수작전이 벌어졌다.
11년 만에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선물한 바둑판도 화제가 됐다. 60년 이상 바둑판을 제작해온 장인 기업 6형제바둑에서 특별 제작한 ‘본비자 바둑판’이다. 한국과 중국에서 최고급 재료로 꼽히는 비자나무를 10년 이상 자연 건조해 만드는데 100년이 지나도 변함없는 품질을 자랑한다고 한다. 중국 바둑계의 대부로 꼽히는 녜웨이핑 9단에게 별도 과외를 받을 정도로 바둑광인 시 주석의 취향을 고려한 선물이었다. 이 대통령 역시 ‘인터넷 바둑 아마추어 5단 실력의 애기가(愛棋家)’를 자처할 만큼 바둑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과거 ‘바둑TV’와의 인터뷰에서 어린 시절 어려운 형편에도 고무신을 잘라 바둑돌 대신 썼다는 비화를 밝힌 적이 있다. 시 주석에게 바둑판을 선물하면서 손으로 바둑판을 두드려 소리를 들려준 것도 바둑 애호가끼리 통하는 ‘무언의 자랑’이었다.
이 대통령이 11월 1일 경주 소노캄호텔에서 열린 한중 정상 국빈 만찬에 이창호 9단을 초대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앞서 2014년 청와대 영빈관 만찬에서 당시 시 주석은 “오늘 오신 손님 중 모두 잘 모르겠지만 딱 한 사람 내가 잘 아는 분이 있다”며 이창호 9단을 지목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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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푸드 외교
시 주석의 마음을 녹인 선물은 바둑판뿐만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바로 경주 특산품이자 APEC 2025 KOREA 공식 협찬사 ‘황남빵’의 황남빵이다. 10월 31일 시 주석은 이 대통령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황남빵 맛있게 먹었다”고 언급했다. 전날 ‘경주의 맛을 즐기시길 바란다’라는 메시지와 함께 받은 황남빵을 맛보고 만족감을 표한 것이다. 시 주석의 호평에 이 대통령은 모든 APEC 회원 대표단에게도 경주 황남빵 선물을 지시했고 예상하지 못한 대량 주문에 경주 황남빵 본점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1939년 경주 황남동에서 처음 만들어진 황남빵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팥빵 브랜드이자 3대째 가업을 이어가고 있는 장수기업이다. 시 주석 효과는 벌써부터 뜨겁다. 시 주석이 호평한 간식을 맛보기 위해 황남빵 본점을 찾은 관광객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K-주전부리의 인기는 이뿐만이 아니다. 파리바게뜨의 ‘안녕샌드’도 APEC 정상회의를 찾은 기자단과 국빈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버터쿠키 사이에 조청 캐러멜, 통들깨, 마카다미아를 넣은 이 제품은 ‘안녕’이라는 한글 인사말과 전통 문양을 새겨 동서양의 감성을 담았다. 파리바게뜨는 APEC 공식 협찬사로 카페테리아를 운영했는데 행사 기간 ‘안녕샌드’를 찾는 발길이 줄을 이었다.
푸드 외교의 꽃이자 정상 외교의 하이라이트는 정상 만찬이었다. 이번 정상회의 만찬은 넷플릭스 예능 ‘흑백요리사’를 통해 이름을 알린 에드워드 리가 총괄 셰프를 맡아 롯데호텔서울과 함께 상을 차렸다. 에드워드 리 총괄 셰프는 “전통적인 한국 음식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또 혁신적으로 보여주겠다”고 포부를 밝힌 바 있다. 롯데호텔서울 측은 대한민국 조리명장 김송기 총괄 셰프를 비롯해 다수의 조리기능장을 투입, 만찬 준비에 심혈을 기울였다.
공식 환영 만찬 메뉴는 한국과 경주의 정체성을 담아내면서도 재료 본연의 색감과 식감을 조화롭게 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APEC 행사 취지에 걸맞게 ‘화합과 조화’를 내세운 음식의 구성이 호평의 주된 이유였다. 감과 연두부, 잣, 게살 등이 어우러진 샐러드로 시작한 만찬은 완도산 전복을 곁들인 경주 천년한우 갈비찜, 곤달비나물 비빔밥, 순두부탕으로 이어졌다. 디저트는 구운 잣 파이와 함께 된장소스를 활용한 독창적인 된장 캐러멜 인절미가 올랐다. 디저트를 담은 자개함은 기념품으로 증정됐다.
한미·한중 정상회담 식사 메뉴에도 역시 화합을 담아냈다. 한미 정상의 식탁에는 경주 햅쌀과 미국산 갈비, 국산 해산물에 사우전드아일랜드 드레싱 등 한미 양국 동맹의 의미를 담았다. 시 주석과의 국빈 만찬에선 닭강정과 마라소스 전복 등 한식·중식을 아우르는 메뉴를 선보였다. 후식으로는 삼색 매작과 등 한중 문화교류와 수교 33주년을 상징하는 음식을 내놨다.
특별 초청국으로 참가한 아랍에미리트(UAE) 대표단의 ‘볶음김치’ 사랑도 화제가 됐다. UAE 왕실과 대표단이 머문 부산 기장군 아난티 코브 관계자는 “대표단 측이 ‘볶음김치에 어떤 비밀 재료가 들어가나’라고 물어서 담당 직원이 ‘정성(a lot of heart)’이라고 답했다”고 전했다. UAE 대표단은 볶음김치를 본국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고 호텔 측은 대량으로 진공 포장해 선물로 줬다는 후일담이 전해졌다.

K-콘텐츠 외교
K-팝이 완성한 ‘황금 혼문(애니메이션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등장하는 악귀를 막는 힘)’의 기운은 경주로 이어졌다. APEC 정상회의 만찬장 사회자인 가수 겸 배우 차은우 일병의 소개로 무대에 오른 건 가수 지드래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의 진우처럼 갓을 쓰고 나온 지드래곤이 자신의 히트곡 ‘파워’, ‘홈 스위트 홈’, ‘드라마’를 연달아 부르자 각국 정상과 영부인들은 너도나도 휴대전화를 들어 촬영하기 시작했다. 안와르 이브라힘 말레이시아 총리는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직접 찍은 영상을 올리며 ‘말레이시아의 K-팝 팬들이 요청해서 공연 장면을 공유합니다 #kpopforever’라는 멘트를 남겼다. 로런스 웡 싱가포르 총리도 직캠 영상을 올렸다. 마르셀로 에브라르드 멕시코 경제부 장관도 지드래곤을 두고 “K-팝의 왕”이라며 “콘서트 맨 앞줄에 앉았습니다”라는 자랑 글을 인스타그램 계정에 남겼다.
이날 축하 공연에는 지드래곤 외에도 ‘케데헌’에 안무가로 참여한 리정, ‘스트릿 우먼 파이터’ 우승자인 댄서 허니제이, 11세 바이올리니스트 김연아 등이 참여했다.
K-콘텐츠 외교는 만찬장 밖에서도 이어졌다. 10월 29일 열린 APEC CEO 서밋에선 방탄소년단(BTS)의 리더 RM이 기조연설을 했다. “올해 처음으로 ‘문화산업’이 APEC의 핵심 의제로 격상된 것에 대해 창작자의 한 사람으로서 깊은 자부심과 기대감을 느낀다”고 운을 뗀 RM은 K-팝의 정체성을 비빔밥에 비유하며 “서로 다른 요소들이 각자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함께 어우러져 새로운 결과물이 된다”고 말했다. 11월 1일에는 시 주석이 박진영 대중문화교류위원회 위원장과 만나 대화를 나눈 사실이 알려지며 한한령(限韓令·한류 제한령) 해제 기대감이 조심스럽게 나오기도 했다.


K-뷰티 외교
수출의 새 역사를 쓰고 있는 K-뷰티도 경주에서 제 몫을 했다. 방한한 다카이치 사나에 일본 총리에게 전달한 선물은 한국 화장품이었다. 평소에도 다카이치 총리는 “한국 김을 좋아하고 한국 화장품을 쓰며 한국 드라마도 본다”면서 K-푸드·K-콘텐츠에 대한 우호적 태도를 드러내기도 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동행한 ‘트럼프의 입’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은 자신의 누리소통망에 “한국 화장품 발견템(South Korea skincare finds)”이라는 글과 함께 다양한 한국 화장품을 구매한 인증샷을 올렸다. 레빗 대변인이 직접 경주 황리단길 올리브영 황남점을 방문해 구매한 화장품 13종은 모두 한국 제품이었다. 팔로워 수가 258만 명에 달하는 레빗 대변인의 인증샷 덕에 미국 내 K-뷰티 인지도가 더 올라갔다는 분석이다. 대변인 방문 이후 올리브영 황남점은 APEC 기간 핫플레이스로 떠올랐다. 다이애나 폭스 카니 캐나다 총리 부인은 10월 30일 김혜경 여사를 만나 “딸이 K-화장품을 갖고 싶어해서 올리브영에서 사올 리스트를 받아왔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K-뷰티를 체험할 수 있는 경주 황룡원 K-뷰티 파빌리온에도 참석자의 발길이 이어졌다.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도 이곳을 방문해 직접 한국 화장품을 체험했다. 아모레퍼시픽은 인공지능(AI)을 기반으로 방문객의 피부색과 맞는 화장품을 현장에서 제조했고 LG생활건강은 글로벌 정상들의 배우자를 위한 선물로 최고급 제품인 ‘더후 환유고’를 제공했다.

APEC은 끝났지만 K-웨이브는 계속된다
경주 밖에서도 민간 외교가 파란을 일으켰다. 세계 최초로 시가총액 5조 달러를 돌파한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가 10월 30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을 만났다. 화제가 된 것은 만남의 장소인 강남 한복판의 ‘깐부치킨 삼성점’이었다. 이들의 ‘치맥’ 회동은 파격의 연속이었다. 글로벌 거물 CEO들이 야무지게 치킨을 뜯고 폭탄주 러브샷을 즐겼다. 가게 안팎 손님과 스스럼없이 소통하고 치킨을 나눠주고 사인을 부탁하는 한 어린이에게 ‘효자 되세요’라는 문구를 남기기도 했다. 재계를 대표하는 이들의 인간적인 면모는 실시간으로 인터넷을 달궜다. 흥이 오른 황 CEO가 “오늘 이 자리는 모두 공짜(Everybody, dinner is free)”라며 골든벨을 울렸고 이 회장과 정 회장이 가게 손님들의 음식값을 결제해주는 훈훈한 모습으로 이어졌다.
치맥 회동 2차는 무대 위였다. 총수 삼인방은 인근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엔비디아 지포스 게이머 페스티벌’ 무대에 나란히 올랐다. 이 회장은 자신을 촬영하는 관객들을 보며 “감사합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아이폰이 많아요?”라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제가 이래 보여도 여기서 막내”라고 운을 뗀 정 회장은 “아들이 롤(LoL·리그 오브 레전드)을 너무 좋아해서 옆에서 같이 했다”며 게임 이력을 밝히기도 했다. 황 CEO는 이 자리에서 1996년 고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으로부터 받은 편지 사연을 공개하며 “그 편지 때문에 내가 한국에 오게 됐다. 그분이 말한 모든 비전이 지금 한국에서 현실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황 CEO가 한국에 바치는 애정과 헌사는 이날 ‘깐부 회동’ 이후에도 계속됐다. 한국 정부와 국내 4개 기업에 총 26만 장의 최신 그래픽처리장치(GPU) 블랙웰을 공급한다는 소식을 알린 10월 31일 유튜브 공식 계정을 통해 ‘한국의 차세대 산업혁명’이라는 제목의 3분 16초짜리 영상을 공개했다. 이 영상에서 황 CEO는 “여러분과 함께할 수 있게 돼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기적이 계속되는 바로 이곳, 한국에서”라는 메시지를 공개했다. 영상은 공개 3일 만에 조회수 55만 회를 기록할 정도로 화제가 됐다.
APEC 슈퍼위크는 대한민국과 한류의 위상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전 세계를 향한 홍보의 장이자 국민을 위한 자부심의 장이었다. K-팝의 영향력은 K-뷰티와 K-푸드를 넘어 라이프 스타일의 영역으로 확산됐다. 혁신과 역동성을 갖춘 기술·경제 강국은 이제 흥과 매력을 발산하는 콘텐츠 강국으로 진화하고 있다. APEC은 끝났지만 K-웨이브는 계속된다.
홍성윤
대중문화에 관심이 많은 일간지 기자. ‘걸어다니는 잡학사전’으로 불리며 책 ‘그거 사전’을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