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단군 할아버지는 부동산 투자에 실패했다.”
국토의 7할이 산인 데다 자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척박한 한반도에 살면서 단군의 후손들이 자조적으로 하는 말이다. 그만큼 한반도의 자연환경이 살기에 부적합하다는 뜻이다. 한국인들이 유난히 부동산 투자에 열을 올리는 것도 그만큼 쓸모 있는 땅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기후도 한몫한다. 한반도의 여름은 아프리카처럼 더워 ‘대프리카’로, 겨울은 시베리아처럼 추워 ‘서베리아’로 비유된다. 외국인들은 한국에서 한 철만 살아봐도 이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님을 실감한다. 1년에 사계절을 겪어야 하니 1년 내내 한 계절만 계속되는 나라에 비해 옷값이 네 배로 든다. 한국이 모자의 나라로 알려지게 된 것도 드라마틱한 계절의 변화를 견뎌야 하는 지혜의 결과 혹은 고육지책의 산물이다. 서양인들에게 한국 모자의 상징으로 알려진 갓 역시 멋을 부리기보다는 쨍쨍한 햇빛을 가리기 위한 목적으로 탄생했다.
머리에 쓰는 모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방한모다. 방한모는 난모(暖帽)라고 부른 데서 알 수 있듯 겨울에 추위로부터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쓴 쓰개다. 갓이 햇빛 차단용이라면 방한모는 추위 방지용이다. 방한모의 제작 목적은 열손실을 막기 위한 실용성이 먼저였고 장식성과 예모(禮帽)로서의 기능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방한모의 명칭은 이암, 휘항, 풍차, 삼산건, 호항, 호이암, 피견, 만선두리, 말액아암 등 다양하다. 조선 후기에는 남바위, 조바위, 아얌, 풍차, 굴레 등이 유행했다. 조선 초기에는 주로 상류층에서 착용했지만 후기로 갈수록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나 착용할 만큼 보편화됐다.
‘정월 초하루 나들이’는 1919년에 방한한 스코틀랜드 화가 엘리자베스 키스의 작품이다. 한겨울에 방한모를 쓴 엄마와 아이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작품이다. 세 사람 모두 남바위를 썼는데 사내아이를 제외한 엄마와 딸은 남바위에 볼끼를 덧붙였다. 남바위는 조선 후기에 남녀노소 누구나 쓴 방한모로 머리와 이마는 물론 목뒤까지 내리덮어 추위를 완전 차단하는 모자였다. 그래도 혹시 찬바람이 파고들까봐 귀와 뺨을 보호하는 볼끼를 달고 끈으로 묶었다. 남바위의 겉감은 검은색, 자주색 등의 비단으로 만들고 안감은 붉은색, 녹색 등의 비단이나 면을 사용했으며 모피나 솜을 넣는 경우도 있었다. 남바위와 비슷한 풍차는 볼끼를 처음부터 붙여서 만든 것이다.
조선시대 방한모는 정수리 부분이 뚫려 있는 것이 특징인데 여자용에는 ‘부귀다남’ 같은 길상적인 문자를 수놓았고 앞면과 옆면에 술을 내려뜨렸으며 보석과 매듭으로 장식했다. 방한모는 극성스러운 추위에도 사람들이 움츠러들지 않고 바깥 활동을 할 수 있게 만든 일등공신이다. 단군 할아버지가 굳이 사계절을 겪을 수 있는 한반도에 부동산 투자를 한 이유는 보는 눈이 없어서가 아니라 후손들의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굴하기 위한 큰 그림이 아니었을까?
엘리자베스 키스의 작품을 볼 때마다 감탄스러운 것은 그녀만큼 조선시대 인물들의 의상을 세밀하고 정확하게 그려낸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마치 고려불화를 보는 듯하다. 이방인의 눈에 비친 조선 풍경은 신기함 그 자체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외국인이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당연하게 여겨서 그다지 눈여겨보지 않았던 디테일까지 잘 살펴서 표현했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반응은 마치 현재의 한류를 예견한 듯하다.
조정육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