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월 14일 오전 충북 청주시 흥덕구청 스포츠센터에 때아닌 오픈런이 벌어졌다. 어르신 50여 명이 고개를 쑥 빼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112번 어르신.”
입구에 설치된 접수대에서 번호가 불리자 한 어르신이 손을 번쩍 들고 나섰다. 오픈런 사태는 ‘농촌 왕진버스’ 때문이다. 흥덕구 강내면과 강서1동 어르신들의 건강관리를 위해 이날 출동한 농촌 왕진버스는 스포츠센터 내에 치과·안과부터 한방까지 작은 종합병원을 차렸다.
농촌 왕진버스는 의료 서비스에 취약한 농촌 어르신과 농업인의 질병 예방 및 건강관리를 위해 농림축산식품부가 2024년 처음 도입한 사업이다. 사업 지역이 확정되면 지역 농협과 연계해 해당 마을의 강당이나 체육관 등에 임시진료소를 마련한다. 고령자·취약계층 등 움직임이 쉽지 않은 어르신들도 편리하게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이동순회버스로 마을을 돌며 실어나른다. 이날 농촌 왕진버스는 농협중앙회 충북본부와 연계해 진행됐다.
농촌 왕진버스 도입 첫해였던 2024년에만 양·한방 27개 의료 기관이 참여해 전국 9만여 명의 주민이 건강검진, 구강치료, 검안 등의 진료를 받았다. 2025년에는 농촌 주민이 주로 앓는 근골격계 질환 등을 진료할 수 있도록 침술, 물리치료와 함께 열적외선·체외충격파·초음파·골밀도 검사 등도 추가했다. 농촌 주민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진료 분야도 계속 확대하고 있다. 특히 하반기부터 ‘비대면 정신건강 상담 서비스’가 시범 도입됐다. 정부가 추진하는 ‘모두의 행복 농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농촌 주민 삶의 질 향상을 위해 마음건강까지 챙기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비대면 정신건강 상담 서비스’ 시범 운영
앞서 9월 26일 경기 양평군에서 ‘비대면 정신건강 상담 서비스’가 첫 시범 운영된 데 이어 이날도 행사장 한편에 정신건강 상담 부스가 마련됐다.
“어르신! 잠시 이야기 좀 나누고 가세요.”
정신건강 상담 서비스 부스의 한 상담사가 검사를 기다리는 한 어르신을 잡아끌었다. 이날 마련된 정신건강 상담 부스에는 전문심리상담사 2명을 포함해 심리상담전공생 등 10명이 어르신들을 상담했다. 우선 간단한 사전 문진을 시작으로 인지 검사, 우울·불안감 등 정서 검사까지 선별 검사가 이뤄졌다. 현장에서 증상이 나타나거나 중증이라고 판단된 어르신들은 부스 안쪽으로 이동해 전문심리상담사들의 심층 상담을 받았다. 심층 상담까지 진행한 후 검사 결과가 위험군으로 판단되면 스마트 기기를 활용해 이후에도 비대면 상담 서비스를 지원하는 방식이다.
스마트 기기 사용이 어려운 주민은 전화 상담도 가능하고 지속 관리가 필요한 주민은 지역 의료기관 진료나 보건소를 통한 정신건강 지원 사업과 연계할 계획이다. 이날 정신건강 상담 서비스는 필수 진료 항목에 포함되지 않았음에도 많은 어르신이 관심을 보였다.
‘비대면 정신건강 상담 서비스’ 시범 도입은 최근 농촌 지역의 변화와 맞닿아 있다. 고령자 1인가구 비율이 증가하면서 정신건강 관리의 중요성이 커진 데 비해 관련 인프라가 부족한 농촌 상황을 고려해 농촌 왕진버스를 결합한 비대면 방식의 상담 서비스를 도입한 것이다.
이날 현장에서 심층 상담한 결과는 7일 이내에 개별 통보된다. 지속 관리 대상자는 이후 주민이 원하는 일정에 맞춰 스마트 기기나 전화로 비대면 심리 상담을 받을 수 있다. 상담 부스 운영 관계자는 “어르신들이 초기에 어떠한 증상이 있는지 검증하는 게 우선”이라며 “인지, 우울, 불안 등 세 가지를 중심으로 검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단순 검사뿐만 아니라 심층 상담을 진행하며 필요한 경우 후속 상담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교두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심리 검사를 중심으로 인공지능 기기를 통해 망막 촬영 등 추가적인 의료 서비스도 농촌 어르신들에게 제공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비스는 수요에 맞게, 검사 종류는 다양하게
현장에는 농협에서 마련한 부스 외에도 안경원, 구강검사 업체, 상지대부속한방병원 등이 참여해 총 네 개의 협업 진료 부스가 마련됐다. 검안·돋보기 부스에서는 안경사 두 명이 어르신의 시력을 측정해 검안을 진행하고 개인 시력에 맞는 돋보기를 제공했다.
구강관리 검사 부스에서는 치위생사 5명이 구강 검사와 구내 사진 촬영, 구강 보건 교육 등을 진행했다. 치면 세균막과 치석 제거도 실시했다. 한 치위생사는 “구강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어르신이 많다”며 “검사 후 치약이랑 칫솔을 드리면서 올바른 칫솔질을 알려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어르신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한방 의료진료 부스였다. 왕진버스 일정이 잡히면 실시 지역마다 미리 수요를 파악한 후 진료진을 꾸린다. 이날은 한의사 5명을 포함해 14명이 한방 진료에 참여해 침 시술, 침전기 자극술, 원적외선치료, 부항술 등 다양한 치료가 제공됐다. 침대에 누워 부항을 뜨거나 침을 맞는 어르신도 많았다. 치료 후엔 간이 약국에서 한방파스, 탕전한약, 한방제제 등 한방 관련 물품들도 무료로 처방받았다.
상지대부속한방병원 관계자는 “근골격계 질환에 도움이 되는 독활기생탕이나 한약이 인기가 많다”면서 “농촌 지역에서 접할 기회가 많지 않은 것들을 제공하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한 번에 모든 검사를… 너무 고맙지”
농협에서 별도로 마련한 부스도 있었다. 농협중앙회 충북본부는 이날 디지털 배움교실을 설치해 어르신을 대상으로 ‘경찰청 보이스피싱예방 앱’ 설치 방법을 안내하고 범죄 피해를 막는 예방법 등을 소개했다.
행사장에는 자원봉사자들이 행사장 곳곳에서 어르신의 이동을 돕거나 검사를 안내하며 힘을 보탰다. 어르신과 안면이 있는 봉사자들은 말동무가 돼주기도 했다. 한 봉사자가 낯이 익은 어르신에게 인사를 건네자 “어머, 마스크 쓰고 있어서 몰랐네”라며 반색했다.
행사를 담당한 농협 관계자는 “자발적으로 지역 어르신들을 위해 봉사하는 분과 농협 조합원들이 많다”면서 “다들 힘들 텐데도 보람 있어 한다”고 전했다.
이날 진료와 검사를 받은 어르신들은 다양한 의료 서비스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모든 검사를 다 마친 어르신은 “한 번에 이런저런 검사를 다 받을 수 있어서 정말 고맙지”라며 “우리같이 시골에 사는 사람들한테는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돋보기, 치약, 칫솔까지 뭘 이렇게 많이 주느냐”고 말하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또 다른 어르신은 “움직이는 게 불편해서 많이 아파야만 병원에 가는데 버스로 데리고 와서 검사하고 또 데려다주니까 너무 편하다”며 만족해했다.
오기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