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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산화하면 세계시장이 다 우리 겁니다”


ㅣ▶충북 음성에 있는 엘베스트GAT 기술연구소와 공장 전경│엘베스트GAT

7월 18일 제주 신라호텔에서 ‘제44회 대한상의 제주포럼’이 열렸다. 강연자로 나선 박영선 중소벤처기업부 장관은 “중소기업을 만나 물어보니 불화수소 생산이 가능하다고 했다”면서 “그런데 (문제는) 대기업이 사주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강연이 끝난 뒤 박 장관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들 질문에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물론 만들 수 있겠지만, 품질의 문제”라고 답해 논란이 됐다. 최 회장은 “순도가 얼마인지, 또 공정마다 불화수소의 분자 크기도 다른데 그게 어떤지가 문제”라며 “공정에 맞는 불화수소가 나와야 하지만 우리 내부(국내)에선 그 정도까지 디테일은 못 들어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최 회장의 발언에 대해 엘베스트GAT(지에이티) 김중식 사장은 “최 회장이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직원들한테 속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사건 터지기 전에 최 회장이 불화수소를 알았겠습니까? 불화수소가 반도체에서 차지하는 원가는 먼지 수준에 불과할 텐데, 그 정도면 부장급에서 관리하는 항목일 겁니다. 근데 부장이나 연구원들은 중소기업이 국산화했다고 찾아가도 절대 안 해줍니다. 원가 개선 효과는 미미한데, 잘못하면 제품 자체를 망쳐버리거든요.”

ㅣ▶8월 23일 서울 테헤란로 사무실에서 엘베스트GAT 김중식 사장이 소재 국산화의 중요성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원낙연 기자

‘원가도 작은데 수입해 쓰지’ 풍토가 장벽
그가 장담하는 이유는 2017년 자동차 회사에 납품하려다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자동차에 들어가는 볼트, 너트 등 철 소재 부품의 부식을 막는 표면처리(코팅) 화학제인 ‘아연-알루미늄말 복합피막’ 시장은 일본유지(NOF)가 70% 이상 독점해왔다. 나머지 30%도 미국 마그니(Magni), 독일 도루켄(Dorken)·아토텍(Atotech) 등 수입산 제품이 장악하고 있다. 엘베스트 GAT는 2012년부터 수입산을 능가하는 제품을 내놓기 위해 연구에 매달린 끝에 5년 만에 국산화에 성공했다. 그러나 자동차 회사를 상대로 본격적인 마케팅에 들어가자 불화수소와 똑같은 벽에 부딪혔다.
“자동차 회사에서 우리 제품을 시험해서 성능을 인정해야 채택이 되든지 할 텐데, 그 문이 아예 닫혀 있는 겁니다. 우리 회사가 만드는 건 산업용 화학첨가제예요. 음식으로 얘기하면 조미료입니다. 안 들어가면 맛이 안 나오고, 잘못 선택하면 음식을 망치잖아요. 그런데 대기업 풍토는 ‘차지하는 원가도 작은데 수입해서 쓰면 되지, 뭐 하러 위험하게 그걸 국산화해?’ 하거든요. 우리 국민이 주목해야 할 게 바로 이겁니다. 이번에 문제가 된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등 3가지 품목 모두 (단가와 시장 규모가) 작은 소재입니다. 큰 소재들은 원가 개선 효과가 크니까 다 국산화했는데, 이런 작은 소재들은 아직도 수입산에 의존해요. 자동차 회사는 99% 국산화했다고 주장하는데, 마무리하는 작은 소재는 수입산이에요. 볼트, 너트, 브래킷 다 국산화했어도 그 표면에 올리는 코팅제는 일본산인데요?”
자동차 회사에 설움을 당하고 다른 판로를 모색하던 엘베스트GAT에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회가 찾아왔다. 삼성중공업이 선박 부품의 표면처리 기술을 아연-알루미늄말 복합피막으로 바꾸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조선업체는 부식 방지 성능은 떨어지지만 저렴한 ‘핫딥갈바나이징(용융)’이라는 코팅 기술을 쓰고 있었다. “바닷가에서 2~3년 동안 배를 만드니 녹슬기 좋은 환경이잖아요. 건조가 끝나기 전에 부품이 녹슬면 한 번 갈아 끼우는 데 8000만 원씩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비용 절감을 고민하던 삼성중공업에서 자동차에 쓰는 코팅 기술이 훨씬 좋다는 걸 알고 기술 변경을 검토하고 있었던 거죠. 우리가 접촉했을 때는 일본과 독일 제품으로 막 테스트하려던 참이었습니다. 국산이 있다는 걸 모르고 말이죠.”

ㅣ▶엘베스트GAT 기술연구소 직원들이 화학 첨가제의 국산화를 연구하고 있다.│엘베스트GAT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기회 찾아와
2017년 2월 다행히 비교 시험에 뒤늦게 참여할 수 있었다. 1년 가까이 걸린 테스트가 끝나고 2018년 1월 삼성중공업으로부터 깜짝 놀랄 만한 결과를 받았다. 수입산은 모두 문제가 생겼는데, 엘베스트GAT 제품만 아무런 문제 없이 삼성중공업 기준을 통과한 것이다. “삼성중공업은 일반적인 표면처리 테스트와 달리 표면처리된 부품에 일부러 손상을 가한 뒤 얼마나 녹스는지 지켜봤더라고요. 그런데 우리 제품은 한번 손상을 받아도 복원력이 뛰어나더라면서 좋게 평가했습니다. 수입산을 능가하는 제품을 만들겠다고 충북 음성에 있는 연구소 직원들이 5년이나 고생한 보람이 있었던 거죠.”
엘베스트GAT라는 중소기업이 해외 기업들과 경쟁해 삼성중공업의 선박 부품 코팅 사업을 따냈다는 소식을 듣고 현대중공업이 찾아왔다. 2018년 8월 나사·볼트·너트 등에 대한 선박용 코팅 기술 공동개발에 들어갔다. 올해 6월 기술 개발을 완료한 뒤에는 다른 부품까지 넓혀 2차 공동개발에 들어갔다. 기존 스테인리스 재질로 된 부품을 철 소재로 바꿀 수 있다면 원가 절감이 엄청나기 때문이다. “자동차는 우리 제품이 후발 주자지만, 선박 쪽에서는 거꾸로 우리가 선발 주자입니다. 한국 조선업체 말고는 표면처리에 아연-알루미늄말 복합피막을 쓰는 곳이 없어요. 세계 조선업계의 선도기업인 삼성중공업과 현대중공업이 우리 제품을 쓰고 있고 품질이 훨씬 뛰어나다는 소문이 나면 중국과 일본 등 세계시장까지 기대할 수 있습니다. 선박 말고도 농기계, 풍력발전, 방위산업 등 시장이 굉장히 넓어요. 최근에는 장갑차에도 시험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엘베스트GAT와 한국산노프코 등 엘베스트그룹(회장 손진익)이 국산화에 도전해 성공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공교롭게도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등 굵직한 경제위기가 기회가 됐다. 1997년 초만 해도 김중식 사장이 재직하던 한국산노프코는 연 매출이 65억 원에 불과했다. 1993년 부설 연구소를 설치해 제지, 펄프, 도료 등 산업용 특수화학 첨가제를 독자 개발했지만 판로 개척에 애를 먹었다. “대기업 연구소에서 저희 제품을 시험해보면 기존 수입산과 대동소이하게 나와요. 하지만 ‘첨가제 잘못 건드렸다가 제품 망치면 어떻게 하냐’는 분위기여서 쉽게 바꾸질 않습니다. 그러다 외환위기로 환율이 급등하고 외화가 부족하니까 대기업 상부에서 ‘기존에 수입하던 것 가운데 국산화할 수 있는 거 다 뒤져봐’라고 지시가 떨어진 거죠. 부랴부랴 우리 제품을 채택했는데, 써보니까 괜찮거든요. 그렇게 자리 잡았어요.”

ㅣ▶엘베스트GAT 기술연구소 직원들이 화학 첨가제의 국산화를 연구하고 있다.│엘베스트GAT

국산화 뒤 3년 만에 일본제품 철수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창사 이래 최고 실적을 달성하며 연 매출 255억 원 회사로 성장한 한국산노프코는 다음 국산화 대상으로 LNG 저장탱크나 고속철도 등 주요 시설을 지을 때 사용하는 콘크리트 혼화제용 감수제에 주목했다. 국내시장은 일본과 독일 제품이 독점하다시피 하면서 적정 가격의 6~7배 비싸게 공급하고 있었다. 2003년 국산화한 뒤 적정 가격에 판매하자 불과 3년 만에 일본 제품들은 국내시장에서 철수했다. 국내시장에 만족하지 않고 외국시장을 개척하기 시작한 게 2008년 4월. 그로부터 반년 뒤 미국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을 선언하면서 세계 금융위기가 시작됐다. “원·달러 환율이 1000원일 때 거의 원가에 가깝게 수출 계약을 맺었는데 환율이 1500원대까지 급등하면서 이익이 많이 남게 됐어요. 2009년 창사 이래 최고 이익을 얻으면서 연 매출 2000억 원 가까운 회사로 성장했습니다. 수출 지역도 영국, 스페인 등으로 넓히면서 지금은 50개 나라에 수출하고 있어요.”
이렇게 해서 엘베스트그룹의 성공 공식이 완성됐다. 국내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수입산을 국산화한 뒤 세계시장에 팔아 성장한다는 것이다. 사실 엘베스트GAT의 전신은 1987년 일본 NOF와 함께 설립한 합작사(한국샴로크)다. 아연-알루미늄말 복합피막 제품을 20년 넘게 수입해오다 2009년 NOF와 결별하면서 지분을 모두 넘겼다. ‘3년 동안 같은 업종에 진출하지 않는다’는 약정에 묶여 2012년이 되어서야 국산화를 시작했고 5년 만에 성공한 것이다. “당장은 우리가 기술력이 없어서 수입하는 소재가 있어도 ‘우리가 꼭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항상 해요. 수입하는 데 만족하면 국내시장밖에 못 팔아요. 그러면 시장이 얼마 안 되잖아요. 그런데 저걸 완전히 국산화하면 세계시장이 다 우리 겁니다. 콘크리트 혼화제용 감수제도 국내시장은 150억 원에 불과하지만, 세계시장에 나가서 10배인 1500억 원의 매출을 매년 올리잖아요. 만약 그때 우리가 국산화하지 않았다면 이번에 일본에서 규제하는 수출품 가운데 하나가 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ㅣ▶엘베스트GAT 기술연구소 직원들이 화학 첨가제의 국산화를 연구하고 있다.│엘베스트GAT

“대기업이 중소기업과 협업해야 기술독립”
1997년 IMF 외환위기로 국산화한 제품이 국내시장 진입에 성공했고, 2008년 세계 금융위기 덕에 세계시장으로 나갈 수 있었다는 김중식 사장은 “이번에 세 번째 기회가 온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 한국 사회에 부는 바람이 실질적인 기술 독립으로 이어지려면 기업 현장이 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산업재에서 발단이 되어 반일 감정이 생기고 소비재로 바람이 불고 있잖아요. 국민은 산업재의 기술 독립을 기대하는데, 정작 기업 현장에 부는 바람은 무풍 내지 미풍입니다.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에서 빠져 통관하는 데 한 달이 더 걸리니 주문 시기를 한 달 앞당기고 재고를 미리 확보해두자, 이게 대응책이에요. 기업들이 지금처럼 대응하면 ‘말짱 황’이 되는 겁니다. 작은 소재 때문에 기술 종속에서 벗어날 수 없구나, 이번 기회에 작은 소재를 국산화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차지하는 원가는 얼마 안 되지만 필수 불가결한 소재들을 찾아내 국산화해야만 이 어려움이 의미를 갖는 겁니다. 일본에서 ‘저 바람 금세 꺼질 거야’라고 말해 국민의 울분을 샀는데, 근본이 안 바뀌면 계속 우습게 볼걸요.”
국산화는 그냥 되는 게 아니다. 중소기업이 국산화한 소재를 현장에 적용하면 반드시 보완할 점이 나온다. 대기업이 인내를 갖고 기회를 주지 않으면 국산화는 불가능하다. 적용 과정에서 작은 실수가 나와도 용인하고 고칠 시간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기업이니까 자기들 기술이 있잖아요. 중소기업과 함께 보완해나가는 협업 문화를 형성해야 합니다. 이게 진짜 잘되는 데가 일본이에요. 일본이 그렇기 때문에 작은 소재들이 센 겁니다. 이번 바람이 의미 있는 태풍이 되려면 중소기업들이 국산화의 길을 갈 수 있도록 기회를 열어주고, 상생과 협업 문화 속에서 결과물이 나오고 결실이 이뤄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시간이 지나 유야무야되면 또 기술 종속 관계가 될 겁니다.”

원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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