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뉴스
지금은 종자 주권 시대… 정부, 종자 국산화 노력 다각화.
1984년 미국 식물학자들이 한국을 찾았다. 추위에 강한 종자를 찾기 위해서였다. 베리 잉거 박사가 이끄는 이들은 해군 함정까지 동원해 흑산도, 홍도 등 섬 지역을 돌며 수천 종의 우리나라 자생식물 종자(씨앗)를 채집해갔다. 그중엔 ‘홍도비비추(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도 있었다. 이 식물은 잉거 박사 일행이 홍도에서 식물조사를 하던 중 태풍을 만나 섬에 갇혔을 때 발견했다.
시간이 흘러 1993년 잉거 박사는 홍도비비추를 신품종으로 등록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잉거 비비추’로. 홍도비비추는 그렇게 영문도 모른 채 미국으로 귀화했다. 이처럼 우리가 모르는 사이 수많은 우리 토종식물이 외국으로 빠져나가 새 품종으로 개발되거나 다른 용도로 쓰인다.
과거 동서 냉전시대에 미국과 소련은 핵 군비 경쟁 못지않게 물 밑에선 치열한 종자 경쟁을 벌였다. 미국은 100여 년 전부터 세계 작물의 씨앗을 모으기 시작해 야생종을 포함한 40만여 종의 종자를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남 함양군의 파프리카 농가. 파프리카 종자는 1g에 12만 원을 호가해 금값보다 더 비싸다.
핵무기 경쟁만큼 치열했던 미소의 종자 전쟁
종자의 중요성을 한층 더 실감나게 하는 사례가 있다. 비타민을 다량 함유한 파프리카. 1개 가격은 100g당 1000원 안팎이다.
그런데 파프리카 작은 씨앗은 1g에 12만 원을 호가한다. 금 한 돈의 무게(3.75g)로 환산하면 45만 원이다. 이달 초 금 한 돈 시세(소매가)인 18만7000원의 2배가 훨씬 넘는다. 국내 파프리카 농가는 대부분의 종자를 네덜란드에서 수입한다.
이 파프리카 종자값엔 로열티가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물론 파프리카 로열티는 소비자가 고스란히 떠안는다. 그래서 파프리카 가격을 내리려면 종자의 국산화가 절실하다. 사람들은 으레 국산이니까 그 수익은 당연히 우리 몫이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화훼 농가에서 카네이션을 출하하려면 화분 하나하나에 씨앗을 심어 6개월 이상 재배해야 한다. 대다수 국내 화훼 농가는 상품성이 좋다는 스페인산 카네이션 종자를 쓴다. 그렇다 보니 화분 하나당 80원 정도의 품종값, 즉 로열티를 지불해야 한다.
카네이션과 버섯, 장미 등 대표적인 원예작물 12개 품목에 대해 지난해 우리가 해외에 지불한 로열티만 136억 원이다. 반면 토종 품종을 수출해 번 로열티는 3억 원에 불과하다. 해외 지불 로열티가 많은 이유는 국산 품종 개발이 덜 돼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채소와 원예 종자 시장의 50% 정도는 외국계 기업이 점유한 것으로 추 정된다.
알싸한 매운맛의 청양고추, 높은 당도와 아삭한 식감의 금싸라기 참외. 모두 국내업체가 개발한 품종이지만 소유권은 세계 최대의 농업기업 ‘몬산토’가 갖고 있다.
1997년 외환위기를 즈음해 내로라하는 국내 종자기업이 대거 외국으로 넘어갔다. 남은 기업도 실적 부진으로 매각이 결정돼 돈 많은 해외 기업의 표적이 된 상태다.
국내 종자산업 시장 규모는 약 5800억 원으로 추산된다. 세계종자연맹(International Seed Federation)의 공식 통계로는 4억 달러(세계 종자시장의 1% 미만) 수준이다.
식량 자원이 곧 무기 다국적 기업이 종자시장 장악
세계 종자시장은 최근 10년간 두 배가량 성장했으며 종자 교역량 또한 급증했다. 세계 농작물 종자시장 규모는 2013년 기준 450억 달러, 종자 무역량은 96억 달러 수준이다.
문제는 종자시장의 65%가량이 주요 상위 5개국에 국한돼 있다는 점이다. 가장 큰 시장은 미국. 세계종자연맹에 따르면 120억 달러 가량의 시장이 세계 1위 종자기업 몬산토를 중심으로 미국에 형성돼 있다. 그다음으로 99억 달러 시장을 갖고 있는 중국, 프랑스(28억 달러), 일본(13억 달러), 네덜란드(6억 달러) 등이 뒤를 잇고 있다.

또한 세계 농산물 종자시장은 자본력과 기술력을 집중화한 10대 다국적 기업이 70%를 점유하고 있다. 몬산토, 듀폰, 신젠타 등이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이다.
‘한 알의 씨앗이 세계를 바꾼다.’ 이 말처럼 세계는 지금 소리 없는 종자 전쟁을 벌이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 외국의 식량을 수입해 자국의 식량 부족을 해결할 수도 있으나 범지구적 식량난에 봉착하면 식량은 곧 자원이 되고 무기가 된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반출이 금지된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돌아왔다는 문익점의 전설 같은 얘기가 냉엄한 현실이 된 세상이다.
종자산업의 중요성을 인식하면서 최근 들어 정부는 물론 지방자치단체들 사이에 너도 나도 ‘골든 시드(Golden Seed) 프로젝트’ 라는 말이 유행처럼 회자되고 있다. ‘씨앗’이 ‘금’으로 변해버린 세상이다.
민간육종연구단지 첫 삽
김제 육종연구단지 내년 8월 완공
농림축산식품부는 3월 30일 전북 김제시 백산면에 민간육종연구단지를 착공했다. 2011년 김제가 육종연구단지 입지로 선정된 뒤 3년 만에 첫 삽을 뜬 것이다. 종자 국산화의 길을 열어 과일과 채소류의 농산물 가격을 확 낮출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된 셈이다. 육종연구단지는 연면적 54.2ha 규모로 국내 유일하다. 1차로 사업비 733억 원을 들여 내년 8월 완공할 계획이다.
정부는 김제를 육종연구단지의 최적지로 판단했다. 김제 주변에는 전주혁신도시의 농촌진흥청을 비롯해 새만금농생물연구단, 정읍 방사선육종연구센터 등이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김제의 연구단지에는 민간육종기업들이 품종을 개발할 때 필요한 인프라가 구축된다. 우선 종자산업진흥센터가 설치돼 첨단 육종기술, 외국 신품 개발 동향, 외국시장 진출 등을 지원하게 된다. 또한 입주기업 개별연구동, 종자품질검사온실, 자동표현형분석온실, 육종연구포장 등 60여 동의 최첨단 육종시설과 장비가 들어선다. 따라서 단지 입주기업들은 육종 포장과 연구시설을 제공받게 돼 기반 투자의 부담을 덜 수 있게 됐다.
단지에는 20개 국내 육종기업이 입주한다. 규모가 큰 아시아종묘 등 9개 기업은 자체적인 연구를 하면서 세계 시장 수출에 주력하게 된다. 나머지 기업들은 싼 임차료만 내고 육종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됐다. 이들 기업은 또한 몬산토와 신젠타 등 세계 굴지의 다국적 종자기업과 경쟁할 수 있는 세계 수준의 육종 연구를 하게 된다. 특히 외국 종자가 장악한 양파와 시금치 등의 육종에 주력하게 된다.
농림축산식품부 골든 시드 프로젝트 3년
품종 개발 · 시장 개척 올 403억 원 투입 육성
국내 처음으로 빨간색 배추를 개발한 권농종묘 권오하 대표는 종자 주문에 바쁘다. 배추는 초록색이란 고정관념을 깨고 개발한 샐러드용 빨간색 배추가 해외에서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 이 품종은 유럽에서 최고가인 kg당 300달러에 팔리는 일반배추 종자보다 가격이 10배(3000달러) 이상 비싸다. 네덜란드, 호주 등 5개 기업 과 종자 독점 공급계약을 체결했고, 미국의 3개 기업과 협의 중이다. 지난해 7만 달러의 종자를 수출한 데 이어 올해는 20만 달러 이상을 수출할 계획이다.
농림축산식품부와 해양수산부 등은 미래 성장산업으로 주목받는 종자산업에서 권 대표 같은 기업인을 더 많이 배출하겠다며 이달 3년 차를 맞는 범국가적 종자산업 육성정책(골든 시드 프로젝트) 성과와 방향을 5월 12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정부는 품종 개발 본격화, 시장 개척 등 산업화 촉진을 위해 올해 403억 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지난해 384억 원보다 5.1% 증가한 것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2012년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떠오른 종자산업의 강국 도약 등을 위해 해양수산부, 농촌진흥청, 산림청 등과 함께 전략적 종자 연구개발(R&D) 사업인 골든 시드 프로젝트를 수립한 바 있다. 정부는 2021년까지 10년간 진행되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수출시장형 10품목, 수입대체형 10품목 등 20품목을 개발한다.
또한 현재 4000만 달러 규모인 수출액을 2억 달러까지 끌어올릴 방침이다. 수출시장 개척형 10품목은 고추, 배추, 무, 수박, 벼, 감자, 옥수수, 넙치, 전복, 바리과 등이며 수입대체 전략형 10품목은 양배추, 양파, 토마토, 버섯, 파프리카, 백합, 감귤, 돼지, 닭, 김 등이다.
농림축산식품부는 올해 품종 개발을 가속화해 69개 상품성이 높은 신품종을 개발하고 수출액을 지난해 491만 달러에서 1150만 달러로 두 배 이상 늘릴 계획이다. 특히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취약한 파프리카, 토마토 종자에 대해서도 각각 5개 신품종을 개발키로 했다.
개발 품종에 대한 신시장 개척도 서둘러 중국, 베트남 등 10개 국에서 해외 현지 적응성 시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아울러 수입대체 전략품종의 국내 재배 확대를 위해 40여 개소의 전시포를 운영키로 했다.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연구 1단계(2012~2016년)에서는 시장 분석, 육종 목표 설정, 육종 소재 확보 및 기반 기술 개발 등 기초를 다진다. 이후 연구 2단계(2017~2021년)에선 목적한 품종 개발, 수출 및 수입 대체 성과 도출 등 목표 달성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골든 시드 1년 차(2013년 7월~2014년 4월)에는 품종 개발 42건, 수출 303만 달러, 국내 매출 17억 원을 올렸다. 또한 2년 차(2014년 5월~2015년 4월)에는 품종 개발 63건, 수출 491만 달러, 국내 매출 39억 원의 실적을 낸 바 있다.
한편 해양수산부는 수산 종자 R&D와 민간 기업 육성을 위한 법적, 제도적 기반 마련에 박차를 가하겠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해 ‘수산 종자산업 육성법안’이 5월 6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를 통과한 상태다.
이 법안은 기본계획 수립, 기술 개발 촉진, 전문인력 양성은 물론 생산시설 현대화 등 업계 체질 개선을 도모할 수 있는 근거를 담고 있다는 게 해양수산부의 설명이다.

글 · 박길명 (위클리 공감 기자) 2015.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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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