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1945년 8월 15일 '그날'은 어떻게 왔는가

독립, 광복, 해방으로 불리는 '그날'이 오기까지 우리 민족은 쉬지 않고 일제와 싸웠다. 그날은 우연히 주어진 게 아니라 한민족의 피땀 어린 저항과 연합국의 승리에 따른 결실이었다.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마디를 이루는 사건들 모두가 그러하듯이, 1945년 8월 15일 '그날'을 둘러싸고도 논쟁이 일어났고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날'을 가리켜 '독립, 해방, 광복'이라고 달리 지칭하는 용어의 차이에는, 이 시기를 바라보는 역사관이 반영되어 있다. 논쟁의 초점은 1945년 8월 15일 '그날'은 누구의 힘으로 왔는가 하는 문제이다.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연합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덕택에 주어진 산물인가, 아니면 한국민의 힘으로 싸워 얻어낸, 한자로 표현하면 戰取(전취) 또는 爭取(쟁취)한 산물인가. 흔히 전자를 '타력(他力) 해방론', 후자를 '자력(自力) 해방론'이라고 부른다.

이미 1945년 8월 15일 직후부터 두 가지 관점이 등장했지만, 이 무렵에는 '그날'을 한국민 자력의 산물로 보는 인식보다는 타력의 산물로 규정하는 시각이 훨씬 우세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우선 미군과 소련군이 한국을 분할 점령하여 군정을 실시하는 국내외 정세에서 한국민의 주도력과 결정권은 제약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렇게 무력한 상황에서 '자력 해방론'이 우세할 수는 없었다.

비록 군정의 형태이지만 치안을 유지하면서 독립을 지원하는 미군과 소련군의 원조에 대한 감사의 표현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한국의 해방에 크게 기여했다는 외교상의 수식어도 요청됐다. 일제에 타협했거나 투쟁을 회피했던 세력들은 이러한 상황을 자신들의 과거 행동을 합리화하는 수단과 논리로 활용했다.

이들은 '그날'이 연합국의 승리가 가져온 선물임을 강조하면서, 항일 민족운동가들이 일제에 적극 투쟁한 노력들을 상쇄시켜버리려 했고, 그럼으로써 항일 민족운동가들을 일제에 저항하지 않았던 자신들과 동일 선상에 놓으려 했다.

1

▷일본 패망 소식을 들은 서울 시민들의 행진 모습.

 

'타력 해방론'이 우세했던 이면에는 일제에 항쟁했던 일부 인사들이 자기반성과 비판의 의미로 표현한 해방관도 크게 작용했다. 일제의 지배 아래 네 번씩이나 감옥에 다녀왔고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던 민족주의자 함석헌은 '그날'이 '갑자기', '도둑같이 뜻밖에' 왔다고 표현했다. 일제강점기부터 광복과 건국에 이르는 시기에 걸쳐 조선공산당의 최고 지도자로 떠오른 박헌영조차 "아닌 밤중에 찰시루떡 받는 격으로 해방이 왔다"고 말했다.

정말 '그날'은 타력의 선물이었을까. 이러한 시각에 반기를 들고 한때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이끈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을 강조하면서 '조국자주해방론'을 주장한 적도 있었다. 이의 사실 여부 자체도 논쟁거리이겠지만, 그렇다면 과연 '그날'은 자력의 산물이었는가. 이렇듯 논쟁이 치열할수록 있었던 사실 그대로에 충실해야 한다.

1

▷1945년 8월 16일 조국의 광복을 환호하며 서울역 광장과 남대문로 일대에 몰려든 서울 시민들.


한민족의 피땀 어린 저항
연합국 승리에 동반해 얻은 결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식민지, 약소국 가운데 자력만으로 독립한 신생국은 없다. 과학·기계 문명에서 낙오된 약소민족이 1 대 1이라는 자력의 단독 투쟁으로 강대한 침략 국가를 격파하기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상식에서 벗어난 생각이다. 2차 세계대전 기간에 프랑스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인정받았지만, 1944년 8월 해방된 파리에는 프랑스군과 함께 미군도 진주했다.

또 한편 세계 도처에서 일어난 식민지, 피점령국 민족들의 끊임없는 저항은 연합국이 승리의 동력을 확보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이처럼 연합국의 전승도 식민지, 피점령국 민족의 고단한 투쟁에 힘입은 산물이었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살펴보아도 규모는 작았지만 미국과 영국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연대했다. 1943년 '카이로 선언'이 한국의 독립을 최초로 보장한 사실도 한국민의 꾸준한 외교전이 거둔 성과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인들은 중국의 장제스 정부를 향하여 한국민이 독립할 능력과 자격을 갖추었음을 주지시키며 끊임없이 설득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이 카이로 선언에 반영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자력'과 '타력'은 서로를 상생시키는 상관관계에 있었다.

'그날'을 위해 싸운 민족 지도자들에게 '그날'은 '우연히', '뜻밖에' 주어진 연합국의 선물이 결코 아니었다. '그날'이 오기까지 해외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광복군과 조선독립동맹의 조선의용군을 비롯해, 연해주 지역에도 소련군에 편제된 한국인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 국내에서는 비밀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이 '건국'을 준비하고 있었으며, 또 한편의 민족 지도자들은 패망해가는 조선총독부를 상대로 권력을 인수하려는 민족대회 소집도 계획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당일 이 두 계열은 곧바로 합류하여 조선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신속하게 건국사업에 착수했다. 이렇게 한민족은 쉬지 않고 광복과 독립을 '준비'했던 것이다.

이 모든 갈래의 민족운동이 1945년 8월 15일 이후 한국 역사의 진로에 녹아들었다. '그날'은 한민족의 피땀 어린 저항이 다른 식민지, 약소국가들의 투쟁과 병행하고 연합국의 승리에 동반하여 얻어낸 결실이었다.


출처 ·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이야기> 제8호 2015.7.27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