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뉴스

며칠 전, 봄 기운이 완연한 날이었다. 시골집 마당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머리를 깎았다. 전기 이발기로 한두 달에 한 번씩 혼자 머리를 손질한 지 5년쯤 됐다. 오후 2시쯤이었을까? 등으로 쏟아지는 햇볕이 더없이 따사로웠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문득 40여 년 전 생각이 났다. 농촌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다. 이맘때면 볏짚을 수북하게 쌓아놓은 볏가리에 등을 대고 앉아 햇볕을 쬐고는 했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 시간들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시골에서 3월의 햇볕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몽환적이다. 손에 잡힐 듯 말 듯한, 논리적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아련한 행복을 안겨준다.
대한민국의 최신 도시로 꼽히는 세종과 인근 공주의 시골집을 매일 오가는 생활을 한 지 3개월이 넘었다. 본격적인 농사철이 시작되기 직전인 이 시기의 농촌은 연중 풍광이 가장 황량하다. 반면 굴삭기와 대형 트럭이 분주히 오가는 세종은 도시가 하나의 거대한 공사장과 같았다.
하지만 지난 3개월은 지금까지의 인생에서 눈과 마음이 가장 풍요로운 시기였다. 아침 저녁으로는 최첨단 도시가 만들어지는 현장을 목격하고, 낮 동안에는 겨울에서 봄으로 서서히 변하는 계절을 몸으로 느꼈다. 매일 다채로운 반찬이 올라오는 밥상을 맞이하는 것 같은 일상이었다.

시골집 10킬로미터 거리에 정부청사 있어 든든
세종과 공주를 오가는 생활에는 과거 서울 한복판의 빌딩에서 일할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한 즐거움과 만족감이 있다. 특히 정부 세종청사가 가동되면서 공주의 시골집 텃밭에서 혼자 일해도 외롭다거나 소외된 듯한 느낌이 없다. 일터만 다를 뿐, 많은 이가 같은 시간 직선거리로 10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정부청사에서 일한다는 생각을 하면 왠지 든든한 기분까지 든다. 우리나라 행정의 중심지와 인접해 있다는 사실이 안겨주는 일상의 안정감은 실제로 체험해보면 상당하다.
세종은 서울에 비해 도시 규모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작다.
하지만 서울보다 훨씬 다양한 형태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잠재력이 풍부한 곳이다. 미국의 로스앤젤레스와 보스턴 등지에서 10년 남짓 살아본 경험을 바탕으로 보면, 서울은 수직 일변도의 도시라는 점에서 미국의 대도시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인다. 미국의 대도시들은 이른바 다운타운에만 고층빌딩이 밀집해 있다. 흔히 ‘서버브(Suburb)’라고 불리는 교외지역은 거의 예외 없이 수평 혹은 평면적으로 일과 생활 터전이 닦여 있다.
지역사회가 제공하는 주거공간의 다양성은 사회가 지닌 삶의 질과 직결된다. 주거 형태 하나만 따져봐도 세종에서는 고층의 아파트 생활과 농가주택 생활이 모두 가능하다. 그 중간쯤이라고 할 수 있는 전원생활의 여지도 풍부하다. 자녀교육이라든지 노후생활에 대한 계획과 철학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세종은 이런 점에서 주민의 다양한 요구를 여느 도시보다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녔다.
읍·면지역은 대도시에 없는 멋과 맛 갖춰
향후 우리나라의 많은 도시는 자생력을 갖추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할지도 모른다. 이른바 선진국으로 분류되는 나라의 도시가 파산하는 예도 심심찮게 목도하는 세상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장차 다가올 우리 사회의 가장 특징적 면모는 인구노령화다.
수직 일변도의 도시는 성장을 이끄는 20~50대 연령층에 적합한 형태일 수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평균수명 80세를 훌쩍 넘긴 우리 사회는 이미 수직적 삶과 주거 양태만 고집할 수 없는 단계에 접어들었다.
보통사람들의 경우 대체로 60세를 전후해 사고구조가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청년시절이나 중·장년시절과 달리 서열·직위·계급 중심의 문화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때가 되면 연어가 강을 거슬러 올라 치어 때 살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사람도 나이가 들면 초·중·고교 때와 비슷하게 수평적 의식구조로 서서히 환원된다. 흥미롭게도 물리적 주거환경과 개개인의 의식구조, 문화는 서로 비슷하게 발을 맞춰가는 특성이 있다. 세종의 제일가는 매력은 산과 들, 강이 지척이라는 점이다. 세종은 녹지가 풍부하고, 제법 큰 강인 금강을 끼고 있다. 주변에 들녘도 꽤 있고, 강원도와 비견할 만한 산촌 분위기가 나는 시골마을도 적지 않다.
조치원처럼 근·현대사의 교차점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한 읍소재지도 포함한다. 정부 세종청사와 상당히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면소재지 역시 한둘이 아니다. 읍·면소재지는 대도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저마다의 멋과 맛을 갖추고 있다.
한마디로 세종은 삶의 양식을 다양하게 하고,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는 사회적·문화적·지리적·자연적 조건을 두루 갖췄다.
개개인이 저마다 그려보는 삶의 청사진을 실현하기에 세종만큼 훌륭한 여건을 갖춘 지역은 대한민국에서 찾기가 쉽지 않을 듯하다.
글과 사진·김창엽(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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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