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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선 도로같이 막힌 인생이 뻥 뚫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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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남매 키우느라 빚 갚을 엄두 못 냈는데 이제는 희망이 보입니다”

국민행복기금 가접수가 시작된 4월 22일, 박경덕(43·가명)씨는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캠코를 찾았다. 채무조정 신청 상담을 받던 그는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그는 상담원에게 이제까지 930여 만원의 채무를 갚지 못한 이유를 천천히 설명했다.

박씨 직업은 택배업이다. 월 150만원을 벌어 부인과 일곱자녀, 본인까지 아홉 가족이 근근이 먹고산다. ‘흥부네’라 불리는 박씨 가족은 보증금 300만원에 월세 11만원짜리 임대주택에 살고 있다. 빚을 연체했다고 박씨가 게을리 살아온 것은 아니다. 휴일도 없이 일을 했다. 하루에도 수십 군데 택배 물건을 짊어지고 날랐다.

그러나 연체된 빚은 줄어들 줄 몰랐다. 오히려 이자에 이자가 붙어 빚은 늘어만 갔다. 은행과 카드, 캐피털에 진 빚을 돌려막고 나면 원금을 갚을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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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가 원래부터 생활이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결혼 후 가정을 꾸리면서 더 잘 살아보겠다고 사업을 시작했다. 육가공품을 마트에 납품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음식 유통업은 안정적인 일이 아니었다. 유통이 잘 안 되는 날에는 유통기한이 1시간이라도 지난 육류를 모두 폐기했다. 먹는 것은 정직하게 팔아야 한다는 신념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때부터 박씨는 빚을 지기 시작했다. 마트에 납품할 물건을 구입하기 위해서 다시 돈을 빌려 물건 값을 치러야 했다. 이런 상황은 계속 반복됐다. 처음에는 신용카드로 돈을 빌려 막았다가 캐피털에서 돈을 빌리기 시작했다. 높은 이자를 견디다 못해 은행 대출까지 받았다. 박씨가 빚과 씨름한 시간은 벌써 10년이 다 돼간다.

박씨는 빚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다. 1천만원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빚 부담은 가정 형편에 따라 다른 법이다. 박씨는 당장 연체된 카드 빚과 은행 빚을 갚는 것보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당장 먹고살 생활비 마련이 더 급했다. 박씨 주변 사람들은 “살림도 넉넉하지 않은데 자식들은 왜 이렇게 많이 낳았냐”고 핀잔을 준다. 하지만 박씨에게 아이들은 희망 그 자체다. “아이를 얻을수록 더 큰 희망이 생기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최근 박씨의 막내딸이 태어났다. 우연히도 박씨는 그날 국민행복기금을 통해 채무조정을 받았다. 그는 다자녀 가구 감면 혜택을 받았다. 3명 이상의 미성년자녀를 부양하는 사람이라면 특수 감면율 60퍼센트가 적용된다. 약 370여 만원을 10년 분할로 나눠 매달 3만9천원 정도만 내면 빚에서 완전히 해방된다. 상담을 받고 돌아가던 박씨는 “막내딸이 복덩이다. 더 열심히 일해서 7남매를 꿋꿋이 잘 키워내겠다”고 다짐했다.

 

 

“연체된 빚이 있다는 것만으로 직장을 구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국민행복기금 신청은 5월 2일 본접수가 시작되면서 더욱 활기를 띠었다. 본접수 첫날, 말끔한 옷차림의 정원석(55·가명)씨가 국민행복기금 채무조정지원센터를 방문했다. 그는 은행권과 카드 빚 1,600여 만원이 연체돼 있었다. 겉모습만 봐선 빚으로 걱정할 것 같지 않은 신사였다. 하지만 그는 수년간 빚 때문에 잠조차 편안하게 들 수 없었다.

정씨는 1981년부터 85년까지 미군부대에서 통역 업무를 맡다 전역했다. 전역하자마자 국내 최고 대기업에 입사한 후 10년간 남부럽지 않은 직장인으로 살았다.

직장에서 능력도 인정받았다. 회사가 중국건설업에 진출하면서 이 업무 총괄 담당자에 뽑혔다. 중국 현지에서 청춘을 보내며 회사일에 열성을 다했다. 하지만 1997년 IMF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중국 진출 건설업이 부도가 났고, 정씨는 구조조정 대상이 돼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됐다.

직장을 잃은 정씨는 1999년 건강식품과 판촉물 유통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직장 생활만 해왔던 그에게 사업은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다. 사업을 하면서 은행권에서 돈을 빌렸지만 사업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사업이 기울면서 빚은 빚대로 고스란히 남았다. 경제상황이 계속 악화되면서 정씨는 깊은 빚의 구렁 속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연체 사실 때문에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서도 번듯한 직장을 얻을 수도 없게 됐다.

소득이 끊어진 정씨는 원금보다 몇 배로 불어난 연체 채무를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빚을 진다는 게 죄도 아니고, 우리 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닌데, 단지 연체된 빚이 있다는 것만으로 직장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지난 일을 회상하던 정씨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빚을 갚기 위해 이일저일 닥치는 대로 했다. 하지만 급속히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하기는 버거웠다. 11년이 넘는 세월 동안 빚은 질기고 긴 꼬리표처럼 정씨를 따라다녔다.

국민행복기금을 찾은 정씨는 채무조정을 통해 이자전액을 감면받고 1,600여 만원의 빚 중 50퍼센트를 감면받았다. 800여 만원을 10년 동안 매월 6만9천원씩 나눠 갚을 수 있게 됐다. 정씨는 채무조정 외에 취업지원 교육도 받고 있다. 국민행복기금 채무조정지원센터 한쪽에 마련된 취업 상담 창구를 통해 본인이 원하는 일자리에 대해 상담했다.

“채무조정을 아무리 해줘도 갚을 수 있는 고정 수입이 없다면 다시 연체하게 될 겁니다. 하지만 일자리까지 함께 알선해 주니까 앞으로 제 삶이 더 기대가 됩니다.

이제 채무조정받은 금액은 절대 연체하지 않고 열심히 갚아나갈 수 있을 겁니다. 이제야 제 인생길이 10차선으로 뻥 뚫린 것 같습니다.” 정씨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채무조정센터에서 소개해준 강남고용센터를 찾고 있다. 취업성공 패키지 1단계 교육을 이수 중이다. 그는 조만간 직장에 다니는 즐거움을 다시 누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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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행복기금 바꿔드림론 전환 후 10년 만에 친정에 다녀왔습니다”

 

국민행복기금 창구에는 여전히 많은 지원자가 서류를 들고 찾아온다. 본접수 개시가 1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변은정(52·가명)씨가 채무조정센터에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상담원과 통화했다.

변씨에게 이 전화통화는 그동안 빚으로 맺힌 한을 푸는 소통의 창구였다.

변씨는 29세 부푼 꿈을 안고 결혼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행복할 것만 같았던 결혼생활은 한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남편이 도박에 빠져 있다는 걸 알면서부터다. 결혼생활 10년 동안 변씨는 버티고 참고 견뎠다. 하지만 무너지는 가계 상황이 이어지면서 41세 되는 날 이혼을 선택했다. 어린 아들과 딸을 데리고 결혼생활을 마무리했지만 그에게는 무거운 짐이 따라다녔다. 바로 남편의 도박 빚 등 1억이라는 채무의 굴레였다.

남편이 변씨 명의로 대출을 받았고, 그 대출금은 모두 도박으로 날아갔다. 남편은 월세 보증금 500만원까지 추가로 빼가버렸다. 변씨는 월세마저 내지 못해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보기도 했지만 그것만으로 빚 부담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래도 죽을 때까지 빚을 갚자는 심정으로 억척스럽게 일했다.

그러나 자식을 공부시키며 뒷바라지할 수 없는 상황은 계속됐다. 특별한 기술도 없이 이혼한 여성이 1억원이라는 빚을 갚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한겨울에는 난방조차 켤 수 없이 가난했다. 혼자 추운 방에서 지내는 것은 어떻게든 참겠지만 두 아이를 냉골에서 지내게 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오로지 빚 갚는 데 전념하겠다고 결심한 그는 10년 동안 친정에 단 한 번도 갈 수 없었다. 택시회사 한쪽에 구내식당을 차렸다. 단 하루의 휴일도 없이 식당을 열었지만 수입은 늘 월 100여 만원 정도에 불과했다. 이래서는 빚을 갚을 수 없었다.

빚을 이리저리 갚아보려고 했고, 서울 서초동 법원 앞을 몇 번이나 오가며 고민했다. 모든 빚을 내려놓기 위해 파산신청을 할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변씨는 법원 앞에서 결국 발길을 돌렸다. 돈을 빌려준 친구 얼굴이 떠올랐다. 파산을 신청하면 고맙게 빌려준 친구의 돈을 떼먹는 꼴이 되기 때문이다.

변씨는 더 열심히 벌고, 더 악착같이 빚을 갚았다.

10년 동안 온몸이 부서져라 고생하며 일하면서 빚을 어느 정도 갚아 나갔다. 하지만 빚은 빚을 낳았다. 매상이 떨어진 달에도 빚을 갚으려다 보니 고금리 대출을 써야 했다. 작은 구내식당은 그럴싸한 사업자등록증을 내고 운영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신고제로 영업을 하는 곳이었는데 변씨의 신용도는 그리 높지 않았다. 제1금융권에서 목돈을 빌리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녀가 빌릴 수 있는 건 고금리 대부업체 대출과 캐피털, 저축은행권 대출 정도였다. 대부업체 빚은 이자만 39퍼센트에 달했다.

열심히 살았지만 삶은 더욱 피폐해졌고 이자는 눈덩이처럼 불어 원금마저 넘어섰다. 빚 독촉도 그를 괴롭혔다. 빚 갚을 날짜가 다가오면 문자 메시지가 연이어 들어왔다. 전화 독촉도 그를 괴롭혔다. 전화벨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벌름거렸다. 이자 스트레스가 이어지면서 건강도 나빠졌다. 몸이 붓기 시작하더니 온몸이 아파왔다. 그러나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빚 걱정에 가게문을 하루도 닫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변씨는 매일 새벽 가게 문을 열면서 거울을 보고 잠시나마 억지로 웃는 표정을 지어본다. ‘오늘도 하는 데 까지 해보자’고 다짐한다. 10년 동안 해온 일이다. 어느날 변씨는 한 택시기사가 놓고 간 신문에서 국민행복기금 바꿔드림론을 발견했다. 그 길로 한달음에 국민행복기금을 찾아 바꿔드림론을 신청했다.

그러나 변씨는 소득이 일정하지 않아 바꿔드림론을 신청할 수 없어 직장에 다니는 자녀 소득을 걸고 바꿔드림론을 신청했다. 국민행복기금의 보증을 받아 농협을 통해 바꿔드림론 803만원을 전환했다. 앞으로 5년 동안 30퍼센트가 넘었던 이자율이 10퍼센트로 줄게 됐다. 이제 월 17만614원만 내면 고금리의 빚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5년간 총 이자금액 580만원을 절감한 셈이다.

국민행복기금 바꿔드림론으로 변씨는 걱정을 한 시름 덜었다. 사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바꿔드림론을 신청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친정 방문이었다.

빚 때문에 10년간 단 한 번도 닫지 못했던 가게 문을 하루 닫고 선물과 맛있는 음식을 들고 어머니를 찾았다.

그리고 병원에도 가볼 생각이다. 새로운 삶을 살아볼 생각이 들었다.

4월 22일부터 접수를 받기 시작한 국민행복기금은 발족 한 달여만에 11만명이 접수해 이중 5천여명이 지원을 받았다. 5월 1일 접수를 시작한 바꿔드림론은 1만 5천여명이 신청해 1,601억원을 지원했다.

정부는 이런 추세라면 국민행복기금 수혜자가 최대 70만명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신청기간은 올해 10월 31일까지로,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서도 접수할 수 있다.

글·박상주 기자

국민행복기금 www.happyfund.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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