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뉴스

강변북로와 제2자유로는 일정 구간에서 나란히 간다. 내 차는 제2자유로를 신나게 달리는데, 옆으로 보이는 강변북로는 교통정체가 심각하다. 일산에서 상암동으로 가는 길은 여러 가지다. 대중교통에서부터 자가용, 자전거까지 서로 다른 교통수단으로 그 ‘길’을 간다.
이때 길은 중의적이다. 이를 인정할 때 우리는 서로를 배려하는 사람이 된다. 무슨 뜻인가? 잘 포장된 도로가 있다. 당신이 벤츠를 타고 신나게 달린다. 여기 또 길이 있다. 비포장 언덕길이다.
당신이 손수레를 끌면서 힘겹게 올라가고 있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극단의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다. 얼마 전, 나는 믿어지지 않는 광경을 봤다. 대통령선거 결과를 놓고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선후배가 말다툼을 하다가 얼굴을 붉히는 광경이었다. 내가 적당히 농담을 해서 그 자리를 잘 마무리 했지만, 지금도 그 아슬아슬한 감정싸움이 신경 쓰인다. 왜? 우리는 타인의 의지와 가는 길을 인정하지 않는가. 일산에서 상암동을 가는데 강변북로를 타든, 제 2자유로를 타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결국 목적지가 상암동이라는 건 자명한 일이 아닌가.

이것은 ‘싸이’에게 푸치니 오페라 <나비부인>의 아리아를 안부른다고 떼를 쓰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오페라 하우스에서 연미복을 입고 아리아를 부르는 벨칸토 가수와, 길거리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대중가수는 서로 적당한 거리를 두고 존재하고, 그래서 우리 사회는 다양하고 아름답고 살 만한 거다.
어떤 일을 하든 서로 갈 길을 가고, 그 길을 조심해서 잘 가기 위해서는 거리가 필요하다. 소통과 공감의 거리다. 우리는 이 거리가 유지될 때 안도감을 느낀다.
그 거리를 무자비하게 좁히려고 할 때 감정이 상하고 주먹이 나간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이런 거리가 없는 이상한 나라를 우리는 바로 머리 위에 두고 산다. 생각만 해도 답답하다.
길은 희망이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희망이라고 부르고 싶다. 나의 이러한 생각을 잘 표현하는 명문장이 있다. 뤼신의 단편소설 ‘고향’의 마지막 부분을 장식하는 문장. 그것을 소리 내어 읽어 본다.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거다.”
이 글을 소리 내서 읽으면 몸과 마음에 어떤 길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이 서로 어울려 걸어가는 넓은 길이다. 하지만, 그 길 옆에 좁고 어두운 길이 있을 수 있다. 그 길에서 울고, 머무르고, 한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넓은 길과 좁은 길의 거리가 멀어서는 안 된다. 좁은 길을 가던 사람이 넓은 길로 건너 올 수 있고, 넓은 길로 달리던 사람이 언제라도 좁은 길로 건너갈 수 있는 그런 길. 다른 길을 가면서 서로의 이름을 호명하면 그 목소리가 가까이 들리는 그런 길. 이 두 갈래의 길 말고도 샛길로 빠지는 제 3의 길까지 있는 동네.
그런 동네에서 살고 싶다.
글·원재훈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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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