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뉴스

기업이든 국가든 규모가 커지고 수준이 높아질수록 이미지제고와 정체성 확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마련이다. 거대 다국적기업들이 이미지 개선을 위해 쏟아붓는 천문학적 규모의 커뮤니케이션 비용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가 차원에서도 선진국일수록 국가 이미지 제고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국가홍보의 모범사례로 꼽는 일본의 경우 1972년 재팬파운데이션을 설립하여 ‘경제동물(economic animal)’이라는 일본의 부정적 이미지를 완화하고 일본 문화를 세계에 보급하는 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에 들어가는 예산만 한 해 2천2백억원 규모다.
재팬파운데이션을 모방해 만든 한국국제교류재단의 1년 예산이 8백억원 내외인 것을 감안하면 큰 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사례도 한 해 1조원 넘게 쓰는 영국의 ‘브리티시 카운슬’이나 3천억원이 훌쩍 넘는 독일의 ‘괴테 인스티튜트’의 경우에 비하면 초라하기만 하다.


우리나라도 이들 선진국처럼 국가홍보 예산을 대폭 늘려야 마땅하겠지만 최근의 경제상황을 보면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대안은 무엇인가. 바로 문화예술 지원을 통해 세계인들이 자연스레 한국의 우수한 예술을 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성공적인 예를 우리는 최근의 예술한류에서 목격할 수 있다.
현재 독일 슈투트가르트발레단이나 아메리칸발레시어터, 네덜란드국립발레단 등 세계 유수의 발레단에서는 한국 출신 프리마돈나가 주연급으로 활약하고 있다. 또 지난해 차이콥스키국제콩쿠르를 휩쓸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클래식 분야에서 한국의 젊은 연주가들의 약진은 더 이상 새로운 소식이 아니다.
그러나 이 대목에서 여전히 우리의 가슴이 허전한 이유는 이러한 예술한류의 파고가 국가나 사회의 전폭적인 지원과 전략에 기반하지 못한 지극히 개인적인 노력에 국한되어 있다는 점이다.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의 융성과 르네상스의 발전을 통해 국가의 경제적 발전과 문화적 발전이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역설한 바 있다. 르네상스를 이끈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은 경제발전과 문화발전을 양대 축으로 당시 피렌체를 유럽 최고의 강국으로 이끌었던 최고의 최고경영자(CEO)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메디치 가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도 알고 보면 시대를 읽는 CEO의 통찰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또 문화예술이 국가의 명성을 높이고 경제활력의 근간을 이루는 21세기형 발전전략임을 깨닫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와 같은 메디치 가문들이 다수 배출되어야 한다. 이제는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대한민국에 경제와 문화의 꽃이 활짝 피어 세계의 인재가 모이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그런 멋진 나라를 만들고자 하는 야심 큰 기업들이 다수 배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기업만의 힘으로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기업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나설 수 있는 멍석을 정부와 국회가 먼저 깔아주고, 기업들이 신명나게 나설 수 있는 법과 제도를 정비해 주어야 한다. 사회적 기부 활성화를 위한 격려와 배려가 필요한 것이다.
지난 2009년 11월 기업들의 문화예술 지원과 참여를 획기적으로 늘리기 위한 법률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발의되었다. ‘메세나활동 지원에 관한 법률(메세나법)’이 그것이다. 그러나 국회 상임위 상정 후 여야 간의 이슈에 밀려 결국 18대 국회 임기만료와 함께 자동폐기되고 말았다.
문화예술 지원 기업에 대한 세액감면을 골자로 한 이 법안이 기업의 문화기부 확대를 위한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기업의 의욕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는 충분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법안이 담고 있는 세액감면이 자칫 ‘세수감소’로 이어질까 일각에선 우려한다. 과연 그러한 우려가 현실적으로 타당한 것일까. 한국메세나협의회가 관계 전문가들에게 의뢰하여 법안도입 효과를 연구한 결과를 보면 세액감면에 따라 연간 약 3백억원의 세수 감소가 예상되지만, 우리 기업들은 법안이 도입될 경우 예술지원액을 1천억원 정도 늘리겠다고 응답하고 있다.
2003년 메세나법을 제정한 프랑스의 경우도 3배 이상 문화예술에 관한 기부금이 급증한 사례가 있다. 세수감소액보다 기업의 지원이 더 늘어나고, 이를 통해 예술계의 창작활동이 활발해지며, 실업자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다수 예술가들에게 일자리가 창출되는 등 예술창작의 활기가 높아지면 차이콥스키콩쿠르에서 거둔 것 이상의 성과를 기대할 수 있다.
메세나법은 기업의 돈이 예술계로 흘러들어 갈 수 있도록 물길을 내는 일이다. 예술인재들의 양성을 위해 국가의 직접적인 재정투입보다 민간의 지원과 후원을 유도하는 것이 국가경제에도 더 효과적인 것이다.
기업인과 예술인, 문화를 사랑하는 국민들은 국회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 주시하고 있다.
문화의 세기인 21세기, 세계에서 가장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문화산업을 위해서라도 메세나법의 도입은 반드시 필요한 시대적 요구과제라 하겠다.
글·이병권 (한국메세나협의회 사무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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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