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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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3일 오후 1시 강원도 횡성군 둔방리 야산. 육군 6·25 전사자유해발굴단(이하 유해발굴단)의 이날 ‘작전 현장’. 그 시각 이날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리던 비가 갑자기 폭우로 변했다. 유해발굴단 감식반 노행호 팀장이 사병들을 급하게 불러 모아 발굴 현장 주위를 비닐로 둘러싼다. 발굴대원들은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닐 천막 아래서 작은 호미와 붓으로 조심스럽게 흙을 걷어내는 작업을 계속한다.
이내 구덩이 속에서 유골 한 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곁에서 함께 발굴된 채 썩지 않은 군화 한 켤레가 유골의 주인공이 군인이었음을 증언해 주고 있었다. 이날 작업 현장에서 발굴된 유해는 모두 6구. 노 팀장은 “좀 더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국군은 아닌 것으로 추측된다”고 설명했다.
차츰 거세지는 빗발 속에서도 발굴대원들의 손은 더 바삐 움직인다. 이날을 마지막으로 유해발굴단이 횡성군에서 철수할 계획이어서 해가 지기 전에 일단 노출된 유해를 모두 수습해야 했기 때문이다.
횡성 지역은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11일부터 사흘간 아군 4개 사단과 적군 12개 사단이 맞붙어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곳. 전투가 끝난 뒤 전사자들의 시신을 참호 속에 임시로 매장했다는 현지 주민들의 증언에 따라 발굴 대상으로 선정된 곳이다. 지난 5월9일부터 횡성군 일대에서 ‘작전’을 벌여온 유해발굴단은 6월3일을 끝으로 횡성군에서 철수해 인제군에서 발굴을 재개할 예정이다.
육군이 6·25 전사자 유해 발굴사업에 나선 것은 2000년. 6·25 5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육군이 6·25 당시 54개 주요 격전지 중 29개 지역의 유해 발굴을 결정하면서 시작됐다. 창군 이래 정부 차원에서 주도한 6·25 전사자 유해 발굴사업으로는 최초였다.
유해발굴단은 처음에는 육군본부 6·25 50주년 기념사업과에 한시적으로 설치한 기구였다. 2000년 4월3일 6·25 당시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낙동강 방어선 다부동 328고지에서 첫 삽을 떴다. 이후 2003년 말까지 933구의 유해를 발굴한 뒤 6·25 50주년 기념 행사가 완료됨에 따라 해체 위기에 처했다.
[B]5년간 1,200여 구의 유해 발굴[/B]
그러나 6·25 전사자 유해발굴사업을 계속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호국보훈정책추진기획단 추진 과제로 유해 발굴사업의 지속이 결정됨에 따라 유해발굴 작업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됐다. 육군은 2004년 4월 전사자 유해 발굴사업을 전담할 전사자유해발굴과를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산하에 공식 기구로 신설했다. 장교 2명과 사병 16명으로 구성된 유해발굴단은 지난 5년 동안 45개 주요 전투 지역에서 1,218구의 유해를 발굴하는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초기에는 6·25 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 위주로 무작정 발굴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며칠 동안 작업해도 한 구의 유해도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요즘에는 발굴 지역이 정해지면 사전 탐문조사를 하고 마을 사람들의 증언도 듣습니다. 이를 토대로 발굴작업을 하죠.”
유해발굴단은 현장에 도착하면 지뢰 탐지기로 불발 수류탄이나 금속제 유류품이 있는지 탐색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안전’을 확인한 후에야 유해발굴단은 본격적으로 땅을 파기 시작한다. 그러나 땅을 팔 때 포클레인 같은 중장비는 쓰지 않는다. 유해의 손상을 염려해서다. 때문에 장비라야 공병삽이나 야전삽이 고작이고, 앞서 말한 대로 호미와 붓까지 동원되는 그야말로 완전한 수작업이다. 이 작업을 할 때는 유해 발굴 지역 주둔 부대 병력도 거든다. 땅을 파내려가다 유해의 일부분이나 유류품이 발견되면 관련 전문교육을 받은 유해발굴단 대원들이 본격적으로 나선다.
[B]발굴단 규모 대폭 늘리기로[/B]
유해발굴단원들은 전문가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 입대 전 대학에서 고고미술사학과·고고학과 등 발굴 관련 전공을 했거나 치대·의대 출신 장병들이 단원의 다수를 차지한다. 초기에는 단원들을 각 부대에서 임의로 차출했으나, 지난해 유해발굴단이 육군의 정식 편제로 바뀌면서 발굴 특기병을 따로 뽑기 때문이다. 이들은 발굴작업을 하지 않는 여름철과 겨울철에는 유해발굴단 책임조사원으로 참여한 충북대 박선주(고고미술사학과) 교수 등의 지도로 유해발굴 이론, 뼈대학, 치아학, 지뢰탐지기 조작, 폭발물 처리와 같은 직무 향상 교육을 받는다.
유해 발굴이 이뤄지는 지역 부대에는 박 교수가 이끄는 충북대 유해발굴센터 유해감식소 조교들이 파견돼 옮긴 유해와 유품을 정밀하게 감식해 기록으로 남기고, DNA 감식을 위한 샘플 채취작업을 벌인다. 채취한 DNA 샘플은 서울대 법의학과 연구팀으로 보내 등록된 유족의 DNA와 비교해 신원을 확인한다. 그러나 5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땅속에 묻혀 있던 유해는 훼손 정도가 심해 DNA 정밀 감식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 1,218구 중 DNA 시료 채취가 가능한 유해는 불과 573구로 절반에도 못 미쳤다. 전사자유해발굴과 통제장교 이문승 중령은 “지금까지 신원이 밝혀진 것은 단 51구뿐입니다. 이 중 유가족을 찾은 유해는 20구뿐”이라면서 “보관 시설만 있으면 나중에라도 신원을 밝힐 수 있을 텐데…”라고 말끝을 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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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중령은 “수습한 유해는 하얀 한지에 곱게 싸 관에 안치한 뒤 그 위에 태극기를 덮고 현장에서 간단한 위령제를 지낸다”고 설명한다. 관에 안치한 유해는 지역 부대에 설치한 임시 봉안소로 옮긴다. 이후 유해는 화장한 후 영결식을 거쳐 각 지역 봉안소에 안치됐다가 국군으로 확인된 유해는 1년에 두 번으로 나눠 국군묘지에 안장한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국립대전현충원에, 미확인 유해는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된다. 발굴 도중 발견된 북한군과 중국군의 유해는 경기도 파주시 적군 묘지에 묻어 준다.
발굴을 현장에서 지휘하는 유해발굴단 노행호 팀장은 “제보자와 유가족이 고령화된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말한다.
“발굴은 언제라도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6·25 당시를 기억하는 목격자들이 고령화하면서 제보해 주실 수 있는 분들이 얼마 안 남아 계시다는 점이죠. 이 분들이 돌아가시기 전에 국가적 차원에서 증언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인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는 “아직도 찾지 못한 국군 유해가 10만 구가 넘는다”며 “국가적으로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한편 정부는 지난 6월4일 현행 제도로는 유해 발굴에 50년 이상 소요될 것이라는 판단에 따라 유해 발굴 부서를 장교 10명, 사병 78명이 참여하는 부서로 확대하기로 했다.
[RIGHT]오효림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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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