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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T_IMAGE]1,original,center[/SET_IMAGE] “한국이니 가능했다.” 한국형 고속전철이 시속 350km 주행 도전에 나선 것을 두고 유럽의 여러 연구기관이 보인 반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가 고속철 개발사업에 뛰어든 것은 불과 6년여. 1996년 12월 개발 프로젝트가 태동한 이래 말 그대로 ‘쾌속질주’해 왔기 때문이다. 12월 중순 있을 350km 시험주행에 성공하면 한국은 프랑스·독일·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네번째로 시속 350km 고속전철 기술 보유국으로 뛰어오르게 된다. 한국형 고속철의 믿음직한 기술력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을까? 개발사업을 진두지휘해온 고속철도연구원 김기환 고속철도기술개발연구단장의 설명. “한국형 고속전철 개발 프로젝트는 KTX를 디딤돌로 태어났습니다. 프랑스 알스톰사와의 계약조건에는 테제베(TGV)의 모든 기술을 이전받는다는 것이 포함돼 있었거든요.” 1996년 정부가 선정한 18개 선도기술개발사업(G7) 가운데서도 마지막으로 채택된 고속전철 개발 프로젝트는 처음부터 고전의 연속이었다. “부처간 주도권 경쟁 때문에 한동안 사업이 표류하기도 했습니다. 1997년에야 주관부처가 건설교통부로 정해지면서 정책의 일관성을 찾았는데, 불행하게도 곧 외환위기가 닥쳤어요.” [B]6년여 만에 이룬 ‘쾌속 350km’의 꿈[/B] 고속전철 개발사업을 시작할 무렵 국내 철도기술은 시속 150km(새마을호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 기술력을 시속 350km 수준으로 급속히 끌어올리려다 보니 웃지 못할 일들도 벌어졌다. “철도기술은 시속 150km에서 200km로 넘어갈 때 획기적으로 변한다고 합니다. 시속 200km 미만에서는 수동으로 조작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200km가 넘으면 사람의 인지능력으로는 제어가 불가능하거든요. 그래서 제동·제어·신호 등 모든 분야를 자동 시스템으로 바꿔야 합니다. 우리는 이 같은 기술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곧바로 시속 350km 기술로 넘어가는 시도를 했던 것입니다.” 처음에는 기술이전 조건에 따라 TGV측에서 넘겨받은 자료를 해석할 인력조차 없었다. “설계도를 들여다봐도 무슨 말인지 모를 정도였어요. ‘노 하우(know how)’가 아니라 ‘노 와이(know why)’를 알아야 하는데 기초기술이 없는 상태에서 도면만 봐서는 알 수 없었던 거죠. 프로젝트 초창기만 해도 고속전철의 모든 시스템을 이해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었죠. 결국 초창기 2년 동안은 기초기술 개발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어요.” 1999년 11월1일 2단계 사업이 시작되면서 한국형 고속철 개발은 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 “사업 초기부터 KTX를 그대로 복제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지적이 많았어요. KTX보다 오히려 한 단계 앞선 고속철을 개발하자는 것이었죠. 한국형 고속철은 KTX를 모태로 태어났지만 전혀 다른 고속철입니다. 그만큼 업그레이드된 것이 많거든요.” 인체로 비유하자면 머리와 손발이 있고 눈·코·입의 위치가 같다는 점만 빼놓고는 두뇌와 심장의 성능, 이를 연결하는 신경회로가 전혀 다르다. 한국형은 후자 부문에서 분명 한 단계 진전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다. 우선 KTX의 차체는 철로 이뤄진 데 반해 한국형 고속철은 알루미늄을 이용해 객차 1량의 무게를 1.5t이나 줄였고, 공기저항을 최대한 줄이기 위해 전동 부문의 설계도 바꾸었다. 핵심 장치에서도 업그레이드가 이루어졌다. 심장에 해당하는 주전력장치를 유도전기 방식으로 바꾸었고, 주전력장치 내 반도체 소자도 세계 최초로 IGCT를 채택했다. 또 각 장치를 구동하는 네트워크도 프랑스 방식을 채택한 KTX와 달리 TCN이라는 국제표준을 도입했다. 이런 각고의 노력 끝에 2002년 2월 마침내 7량짜리 G7(한국형 고속전철의 애칭. 고유 명칭은 HSR 350-X: High Speed Railway 350 Experimental)이라는 시험차량이 완성되었다. 약 3개월간 창원 로템 공장에서 시운전하며 문제점을 해결해온 G7은 2002년 5월5일 처음으로 세상 밖으로 존재를 알렸다. “G7을 진짜 레일 위에서 처음 시운전할 때는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습니다. 그런데 스위치를 올리자마자 열차가 ‘쿵’하는 소리와 함께 멈추는데, 제 심장도 함께 멈추는 줄 알았다니까요. 정비팀이 나서서 알아보니 바퀴 조립이 잘못돼 서로 다른 방향으로 굴렀던 것이 발견돼 문제를 곧바로 해결했습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시작에 불과했다. 정비를 끝낸 7량짜리 G7의 시운전 거리는 10m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단장을 비롯한 연구진은 시운전을 통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일단 열차가 레일 위에서 움직인 것이 중요했습니다. 나머지는 속도를 끌어올리는 것인데, 그것만큼은 자신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랬다. 시운전이 있은 지 불과 3개월 뒤인 2002년 8월19일, G7은 마침내 천안∼대전 57km 구간 시험운행을 시작했다. “당시는 KTX가 개통 전 시험운행을 하던 때여서 G7은 KTX의 시험운행이 끝난 밤시간에만 레일을 이용할 수 있었어요. 1년3개월 동안 밤낮이 바뀐 생활을 해야 했죠.” 시험운행중 어느 한 가지 부품에 문제가 생기면 그 상태로 몇 개월을 흘려 보내기도 했다. 기성품이 아닌 시제품을 쓰는 탓에 부품이 조달될 때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B]2005년에는 12만km 시험주행으로 내구성 점검[/B] 지난해 8월1일 G7의 시속 300km 시험주행 때도 또 한 번의 촌극이 벌어졌다. 뜨거운 날씨 때문에 G7의 배터리가 나가버려 초청객을 모두 돌려보내는 불상사를 맞은 것. “자존심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어요. 그렇다고 디젤 기관차로 G7을 견인해 기지로 끌고 가고 싶지는 않았어요. 그 자리에서 문제를 해결한 뒤 당일 밤 11시쯤 시험주행을 강행했는데, 결국 시속 300km를 돌파한 것입니다. 다음날 아침 이미 돌아간 고속철 관계자들에게 성공 소식을 전했는데,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더군요.” 지난 6년간 2,100억 원의 연구비와 총 5,600여 명의 연구진이 투입된 G7은 지난 10월28일 시속 330km 시험주행에 성공한 데 이어 12월15일 350km 시험주행에 도전한다. “세계적으로도 이처럼 단기간에 150km 기술에서 350km 기술로 점프한 사례는 없습니다. 선진국처럼 안정된 조직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다이내믹 코리아’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G7의 남은 과제는 2006년 말까지 12만km 이상의 시험주행을 통해 부품의 내구성을 점검하는 것이다. 그러나 G7 연구진의 궁극적인 꿈은 그 이후로 내달리고 있다. 2007년 한국형 고속전철의 상용화라는 목표를 향해. [RIGHT]취재·오효림 기자[/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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