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뉴스

1월 25일 새벽 4시 30분. 김태준(74) 할아버지는 어김없이 눈을 떴다. 수도권 지하철을 누비는 실버택배업계의 ‘프로’로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것이다. 부인 김금자(62)씨의 전송을 받으며 서울 강북구 수유동 집을 떠나 중구 오장동 사무실로 가장 먼저 출근한다. 오늘은 일거리가 많지 않은 목요일이지만 택배일을 시작한 이래 신정, 설, 추석 단 사흘만 빼고 1년 넘게 지켜온 일과다.
회사 전화가 울리고 배기근 사장이 마이크로 대기실의 김태준 할아버지를 부른다. 첫 일거리다. 오전 10시쯤 동대문운동장 옆 제일상가로 나간다. 의뢰인이 여러 점포에 주문해놓은 옷가지를 모두 모아서 송파구 올림픽공원 주변의 옷가게 ‘까끼’ 에 물건을 전달한 시간은 11시 30분. 혼자 옷가게를 운영하는 주인은 장보러 나올 수 없어 실버택배를 이용한다.
다시 지하철을 타고 사무실로 돌아와 동료들과 점심을 함께하고 이번에는 강남 고속버스터미널로 출동이다. 오후 1시 40분 도착하는 버스에서 전남 무안에서 보내온 산낙지 박스 2개를 찾아 지하철을 갈아타고 2시 30분 신촌의 산낙지요리 전문점에 배달한다.
산낙지 박스는 물량에 따라 15~20kg에 이르는 만만찮은 무게. 안고 다니기 무거워 스스로 고안한 멜빵을 이용해 등에 지고 운반한다. 송천낙지 송영술 사장은 “신선도가 중요한 물건이기 때문에 가장 정확하고 빠른 김 할아버지에게 일을 맡긴다”고 말한다. 언젠가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4시간 이상 걸리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사무실로 돌아온 김 할아버지에게 꽃배달 의뢰가 들어왔다. 성동구 금호동 단골 가게에서 서초구 사무실에 꽃바구니를 전해달라는 것이다. 오후 3시 30분 김 할아버지를 만난 토탈플라워 최미숙 사장은 “내일 아침 9시까지 가게로 와주세요”라고 말한다.
여러 곳에 꽃과 함께 케이크를 배달하려고 일처리가 빠른 김 할아버지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꽃배달을 4시 20분에 완료한 김 할아버지는 취재기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조금 일찍 퇴근했다.

김 할아버지는 2005년 12월 13일 지하철 실버택배를 시작했다. 30여년 영화배급사를 운영했고 1990년 복덕방을 하다가 IMF로 문을 닫은 후 일거리가 없었다. 쪼들리는 살림은 아니어도 그냥 노는 게 너무 답답했다.
여러 곳에 이력서를 들이밀었지만 허사였다. 말로는 노인 일자리를 만든다면서 나이만 보고 탈락시키니 억울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라디오에서 실버택배를 알게 됐다.
“처음엔 망설였어요. 집사람은 민망하다고 하고 아이들도 말렸지요. 그러나 일단 시작하니 생각보다 괜찮더라고요. 건강도 좋아지고 친구 사귀는 게 즐거워서 이왕 하려면 열심히 하자고 결심했지요.”
지리를 몰라 헤매기도 했으나 방문한 곳의 정보를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하다보니 수도권 지하철노선과 역세권, 마을버스 번호까지 모두 머리에 입력됐다. 가방에 끈, 가위 등 비상용품을 준비하고 꽃을 상하지 않게 다루는 법도 배웠다.
평택, 안성, 용인 등 경기도 전역을 누비고 전방부대에 생일축하 케이크까지 날랐다. 축의금, 헌금 등 유별난 배달도 많았다.
본래 힘이 좋고 걸음도 빨라 회사에서도 어려운 물건을 전담해서 맡겼다. 이제는 아침 조회시간에 동료들에게 지리정보와 노하우를 강의하는 위치가 됐다.
“나이 많다고 행세하면 서로 불편하기만 해요. 스스럼없이 대하면 손님들도 마음을 열고 단골이 됩니다. 자기 돈 내고 언짢게 하면 좋아할 사람 없어요. 케이크와 꽃다발이면 보나마나 생일선물입니다.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말하고 개업축화 화분을 들고 가면 ‘부자되시라’는 말을 빼놓지 않지요.”
일거리가 많은 금요일은 하루 6~7건도 처리하고 2~4월 졸업, 입학, 승진 시즌에 하루 11건도 해낸 적이 있다. 꼼꼼히 기록하니 치매도 안생기고 열심히 한 만큼 수입도 생겨 만족이다. 월 평균 70만~80만 원 정도를 벌어 아내에게 ‘효도’한다. 롯데백화점에 배달 갔다가 눈에 띈 순금 목걸이, 귀걸이, 팔찌, 반지 세트를 선물했더니 ‘무척 즐거워하더라’며 웃는다.
부인 김씨도 “가끔 걸리던 감기도 안걸리고 친구가 생겨서 좋아하니 이젠 말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시집간 딸도 ‘활기차게 일하는 친정아버지’를 스스럼없이 자랑한다.
‘노인 일자리’ 문제를 질문했다. 김 할아버지는 ‘정말 큰 문제’라고 말한다. ‘젊고 멀쩡한’ 노인들이 종묘공원의 무료급식을 먹기 위해 모여드는 것을 보면 걱정스럽다.
“정부 혼자 할 수 없어요. 기업과 국민 모두 바뀌어야 합니다. 젊고 똑똑한 노인들에게 일거리를 줘야지요. 기업들이 젊은이보다 더 잘 할 수 있는 사람도 무조건 외면하니 해결이 어렵지요. 노인들도 그래요. 나보다 젊고 튼튼한 사람이 편안한 일거리만 찾으며 놀고 있으면 안되지요.”
김병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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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