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뉴스

30대로 보이는 한 여성이 안락의자에 누워 있다. 옆에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 함근수 범죄분석실장이 조명을 낮추고 최면 유도를 시작했다.
“지금 당신의 손에는 상상의 리모컨이 있습니다. 범인은 당신을 보지 못하고 당신이 범인을 통제합니다. 1,2,3까지 숫자를 세다 범인의 얼굴과 주변의 물건이 가장 잘 보이는 순간에 멈춤 버튼을 누르세요. 이제 그 장면을 기억의 카메라에 저장합니다.”
“날짜를 2007년 4월12일 밤에 맞추고 카메라에 저장된 장면을 끄집어냅니다. 무엇이든 장면이 보이나요?”
함 실장의 유도를 통해 이 여성은 최면상태에서 당시 상황을 그려내고 있었다.
“강변북로 원효대교 부근에 한 남자가 길에 쓰러져 있어요. 차량들이 그 남자를 매단 채 도로를 달리고 있어요. 끔찍해요.”
“남자를 친 차 번호와 색깔이 보이나요?”
“예. RV차량… 번호는… XXXX.”
멀고 희미한 기억 속에서만 맴돌던 사고차량 번호가 목격자의 입 밖으로 새어나왔다. 함 실장은 심리학 전공으로 1992년 국과수에 들어와 지금까지 최면수사를 전담해 온 베테랑. 그는 목격자가 최면수사에서 차량의 종류와 색상, 그리고 번호 네 자리를 똑똑히 기억해낸 내용을 서울 용산경찰서 담당 형사에게 알려주었고 경찰은 곧 수사에 박차를 가했다.
경찰은 이 여성의 진술을 토대로 수도권에 등록된 차량만을 대상으로 확인한 끝에 최면 진술에서 언급된 번호판을 쓰는 차량 3대를 확인했다. 이중 의심이 가는 차량 한대를 국과수에 조사를 의뢰한 결과 문제차량에서 혈흔이 나왔고 혈흔 DNA는 교통사고 사망자와 일치했다.
그런가하면 지난 2003년 경기 평택과 충남 아산에서 일어난 어린이 성폭행 사건도 최면수사를 통해 범인을 붙잡은 경우. 놀랍게도 피해 아동 중 2명이 최면요법을 통해 “차량 번호 앞자리와 끝자리에 둥근 모양의 숫자가 두 개 반복된다”며 트럭의 차량번호를 거의 정확하게 기억해냈다.
또 한 어린이는 차량 안에 바퀴 하나가 빠진 빨간 자동차 모양의 방향제가 있었고, 범인의 목에 점이 있었다는 사실도 떠올렸다. 수사진은 당장 비슷한 번호의 트럭으로 대상을 좁혔고 며칠 지나지 않아 범인을 검거할 수 있었다.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과수 3층에 위치한 범죄분석실 한 쪽에 마련된 최면 수사실. 6평 남짓한 공간에는 안락의자와 조명시설, 대형TV, 그리고 최면수사 장면을 분석실 밖에서 모니터링할 수 있는 적외선 카메라 등이 설치돼 있다. 물론 방 전체는 방음시설이 돼 있어 밖에서는 대화내용을 전혀 들을 수 없다. 최면 대상자가 편안하게 사건의 내용에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배려한 흔적이 엿보였다.
연간 150여건에 달하는 최면수사가 이곳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이다.

최면요법은 수사방향 제공하는 길잡이
이처럼 최면수사는 사건 발생 현장에 단서가 없고 목격자나 피해자만 있을 경우 이들에게 최면을 걸어 희미한 기억을 떠올리게 함으로써 수사에 필요한 단서를 얻는 방법이다. 답보상태의 수사에서 ‘히든 카드’인 셈이다.
함근수 실장은 “뺑소니 순간을 목격하고 자동차 번호를 외웠다가도 1,2분이면 까맣게 잊어버린다”며 “최면수사는 이같은 무의식의 영역에 희미해진 기억을 활성화시켜 수사에 이용하는 과학수사”라고 설명했다.
사건 수사에서 최면 요법은 피해자와 목격자만을 대상으로 실시된다. 범죄의 혐의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일반적으로 활용되지 않는다. 최면은 의식이 고도로 집중화된 상태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거나 상황을 조작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특히 최면수사는 수사에 단서만 제공할 뿐 증거가 돼주지는 않는다.
함 실장은 “최면수사는 모든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아니지만 최소한 수사방향을 잡아 주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현재 강덕진 범죄심리과장의 지휘 하에 4명의 검사관들이 최면수사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심리학 또는 사회학을 전공한 석사 이상의 사람들로, 최면수사에 가장 정통하다.
현재는 일선 경찰서가 의뢰하면 국과수 검사관들이 최면수사를 실시하고 있지만 서울, 인천 등 전국 14개 지역의 지방경찰청에는 44명의 최면수사 경찰관이 배치돼 활동 중이다.
아직 전문가 타이틀을 붙이기엔 이르지만 이들은 일선 경찰서에서 발생한 사건에 최면수사가 필요한지 여부를 판단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함 실장은 “최면은 누구나 걸 수 있지만 최면수사는 그렇지 않다”며 “정보를 끌어내는 기법 자체가 다르므로 최면수사는 수사에 정통한 사람이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최면수사를 의뢰한다’라는 말을 가장 싫어한다는 그는 “수사가 진척이 없을 때 마지막에 최면수사를 의뢰한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수사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최면 대상자의 기억이 왜곡되거나 오염되지 말아야 하고 사건 발생 초기에 최면수사를 통해 수사방향을 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글 권태욱 기자 사진 한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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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