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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1일 오전 10시 강원도 양구소재 21사단 화학지원대 연병장. 천막으로 만든 분양소와 임시봉안소 앞에서 군악대의 진혼곡이 울려 퍼졌다. 21사단은 이날 6·25 전사자 유해 발굴 개토식을 갖고 대암산, 학영골, 수리봉 등 3곳에서 오는 29일까지 3주간 일정으로 유골 발굴작업에 들어갔다. 양구지역은 동족상잔의 비극인 한국동란 중 가장 치열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이날 행사에도 어김없이 참석한 박신한 단장을 비롯해 이용석 중령, 김용균 소령 등은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의 핵심 멤버들이다. 이들은 현장을 일일이 다니며 상황을 점검한다. 모두 검게 탄 얼굴이다. 그럼에도 사명감에 불탄 듯 눈빛만은 초롱초롱하다.

한시적으로 시작된 이 사업이 지속사업으로 결정된 것은 2003년 7월. 2005년 6월 호국보훈 관계장관회의에서는 국가영구사업으로 추진하기로 결정됐다. 2007년 1월, 마침내 85명을 단원으로 하는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이 창설됐다. 감식단은 올해 모두 19개 지역을 조사하고 12개 지역에서 발굴 작업을 벌일 계획이다.

21사단 개토식이 끝난 후 박신한 단장의 승용차에 동승했다. 그는 “신기할 만큼 유해발굴사업에 신이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수많은 개토식을 하는 동안 비를 한 번도 맞은 적이 없고, 조사·발굴하는 동안 지금까지 단 한 건의 사고도 없었단다. 우연한 기회에 우연한 사람을 만나 유골이 묻혀 있는 장소를 발견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등산객과 잠시 얘기하다 결정적 단서를 찾은 적도 있다.

다음 개토식 장소인 인제 현리로 이동하는 도중 막국수로 점심 끼니를 때우는 동안에도 박 단장의 이야기는 쉴 새 없이 이어졌다. 지난해 9월 강원도 홍천에서 발굴해 11월 안장한 고(故) 장복동 일병의 유해를 55년 만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게 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단다. 1951년 1월 당시 스물여섯 살이던 고 장 일병은 전남 여수에서 81km 떨어진 외딴섬 선죽도에서 살다 1950년 입대한 이름없는 어촌 총각이었다. 박 단장의 뇌리에는 ‘아! 이런 민초들이 나라를 지켰구나’하는 생각이  스쳤다.

오후 2시 내린천이 말없이 흐르는 강원도 인제군 사평리 인근 야산에서 3군단 개토식이 개최됐다. 이 일대는 국군과 중공군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중공군의 공격에 아군 전사자의 시신들이 수없이 깔려있었지요. 1개 분대가 모두 전사한 것도 목격했고요. 도로가의 시신들은 대부분 수습을 했는데 산속의 것은 그대로 버려졌지요.”
김청운(74·강원도 인제군 남면 어론리) 옹의 증언이다. 제보자 자격으로 이날 개토식에 참석한 그는 한국동란 당시 16세의 소년으로서 피란을 가지 못하고 전쟁 현장을 목격했다.





유해발굴사업은 2000년 4월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시작됐다. 한국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47년 만이다. 육군본부는 경북 칠곡 다부동 328고지(낙동강 전투)에서 전사자 유해발굴을 위해 첫 삽을 떴다.
지난 7년간 발굴된 유해는 모두 1500여 구. 이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53구, 유가족이 확인된 유해는 25구다. 10여 구는 DNA감식으로 밝혀냈다.

그렇지만 발굴 작업은 쉽지 않다. 우선 데이터베이스(DB)화한 자료가 적기 때문이다. 매장 기록의 제한으로 대부분을 산자의 증언에 의존해야 하는 한계성이 있다. 개토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이용석 중령은 유해발굴은 ‘시간과의 전쟁’이라고 했다. 유해발굴은 6·25 세대의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살아 있을 때 한 구라도 더 많이 발굴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발굴을 하더라도 유해는 대부분 완전한 상태가 아니다. 온전한 상태의 시신은 20~30%에 불과하다. 이들의 대퇴부에서 5cm가량을 잘라 DNA시료를 채취, 민간전문기관에 보내 전사자를 찾고자 하는 유가족의 혈액과 비교한다. 그런데 유가족의 DNA 자료가 아직은 적다. 유전자 감식이 효과를 가지려면 적어도 1만 명 이상의 자료를 갖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유족들의 채혈이 급선무라고 박 단장은 강조했다. 신원이 확인된 유해는 화장 후 대전 국립현충원 묘역에 안장되고, 신원을 찾지 못한 유해는 납골당에 임시 봉안된다.

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 요원 가운데는 고고학, 역사학 등을 전공한 사병들이 많다. 유해발굴은 문화재 발굴과 비슷하다. 실제 도구들도 문화재 발굴현장에서 쓰는 것 그대로다.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지뢰탐지기 정도. 그렇지만 발굴감식은 충남대에, DNA검사는 연세대에 위탁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국방과학수사 연구소와 연계해 본격적인 검사체계를 갖출 방침이다. 전문요원들도 정식으로 채용할 예정이다.

두 곳의 개토식을 마치자 유해발굴감식단은 곧바로 매봉산 현장으로 달려갔다. 국가의 부름을 받고 간 이들을 찾는 일에 한시도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것이 사명감일까.

노무현 대통령은 6월 5일 군 통수권자로서는 처음으로 6·25전사자 유해발굴 현장을 방문했다. 이는 13만 호국용사들의 유해 찾기가 국가의 무한책임이라는 인식을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고 박 단장은 평가했다. 그 당시 살고 있었던 죄로 이름 없이 산화한 이들 덕분에 우리는 이 땅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는 이들을 챙겨줘야 하지 않겠는가.

미국은 한 전사자가 묻혀 있는 곳이라면 세계 어느 곳을 불문하고 찾아가 유해를 발굴, 대대적인 본국송환행사를 열어 전사자를 추모하고 유족을 위로하고 있다. 국가가 국민들을 책임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다. 

취재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황대형(77) 옹과 함께 했다. 황 할아버지는 유해발굴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자원봉사자다. 사비를 들여 유해발굴과 관계되는 일이면 전국방방곡곡을 누빈다. 왜 그렇게 유해발굴에 집착하는가. 그 의 대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낙동강 전투에서 동료들이 대부분 전사했는데 죽기 전에 그 무덤을 찾아 술 한잔 올려야겠어. 그래야 저승에서 그들을 만나도 미안하지 않지.” 헤어지는 황 할아버지의의 뒷모습에선 5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멈추지 않은 포성이 들리는 듯했다. 

강원도 양구·인제 = 권영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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