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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의 상봉은 역사적인 6·15 남북공동선언과 ‘우리 민족끼리’ 정신에 기초하여 남북관계를 보다 높은 단계에로 확대 발전시켜, 한반도의 평화와 민족공동의 번영, 조국 통일의 새로운 국면을 열어나가는 데서 중대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이다.”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을 부제로 하는 ‘2007 남북정상선언(이하 정상선언)’이 채택됐다. 정상선언은 6·15공동선언의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는 데 기초를 두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6·15 공동선언은 통일의 과정에서 남북이 견지해야 할 원칙과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강령적 성격을 띤 합의이자 통일의 이정표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정상선언은 원칙을 선언했던 6·15공동선언을 구체화해 정치, 군사,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교류와 협력을 더욱 발전시키고 남과 북이 하나의 민족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실천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번 합의서는 6·15에 비해 다양하고 구체적인 실천사항을 담은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정상선언은 남북관계의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백과사전적 실천계획서라고 할 수 있으며 6·15실천 선언이라 할 수 있다.
정상선언에 담긴 내용들이 새로운 것들이라기보다는 그동안에 다양한 방식과 기회에 논의되었던 내용이라는 평가다. 통일연구원 박영호 기획조정실장은 “이번 남북정상선언은 1992년 2월 발효되었던 ‘남북기본합의서’의 토대 위에서 6·15남북공동선언 이후 진전된 남북관계를 반영”한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평화와 공동번영 및 교류·협력 분야에서 그동안 미진했거나 갈등을 초래했던 문제들, 그리고 더욱 발전시켜야 할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결과들을 담은 것”이라고 평가했다. 조 실장은 “그런 점에서 이번 선언을 2007년판 남북기본합의서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공동선언이 원칙을 밝히고, 기본합의서가 주로 실천적 사항을 담은 것으로 봤을 때, 이번 선언을 통해 6·15공동선언의 정신이 본격적으로 실현되어 제2의 6·15실천시대, 자주통일과 평화번영의 새 시대가 활짝 꽃피게 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다.
정상선언에는 △6·15선언의 우리 민족끼리와 자주적 원칙의 재확인 △낮은 단계 통일과 민족통일기구 수립을 위한 제도적 기반 구축 △남북 간 군사적 신뢰 구축과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전기 마련 △민족경제공동체로 나아가기 위한 실천적 대책 △남북 교류와 협력의 전면화를 위한 방안 등 실천 목표들이 구체적이고 포괄적으로 명시돼 있다.

각종 회담 수준 높여 안정적 협의체제로
정상선언에서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남북관계의 보다 높은 발전을 위한 각종 회담 수준의 격상이다. 우선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 정상들이 수시로 만나기로 합의했다. 국방위원장이 사실상 의사 결정의 전권을 쥐고 있는 북한 정권의 특수성에 따라 정상회담의 상시적 추진은 매우 의미 있다. 또 정상선언 이행을 위해 11월 서울에서 제1차 남북총리회담을 갖기로 했다.
6·15남북공동선언에서는 합의사항을 조속히 실천에 옮기기 위한 당국 사이의 대화 개최가 명시되어 있을 뿐이다. 그러나 정상선언에는 정세변화가 급변하는 상황에 맞춰 장관급회담보다 의사결정 수준이 높은 총리회담을 제기해서 정책결정과 추진력이 한층 높아지게 되었고, 안정적 남북관계 추진의 제도적 틀이 마련된 것이다. 또한 국방장관회담 재개 등 남북 간 군사분야 협력증진에도 합의, 한반도 평화를 확고히 보장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올 11월 개최될 국방장관회담은 1차 회담 후 약 7년여 만에 남북의 국방장관이 마주앉아 한반도 평화정착 문제를 논의하게 되는 의미 있는 자리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현재 차관급인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도 부총리급인 ‘남북경제협력공동위원회’로 격상하기로 합의했다. 위원회가 격상되어 의사결정 권한이 확대됨에 따라, 남북경제협력을 전담해 추진할 새로운 창구가 제도적으로 확보된셈이다.
법·제도적 장치 정비… 통일의 길 확보 큰 의미
경제협력에 대한 논의도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쌍방향 투자협력으로 전환돼 추진될 토대가 마련됐다. 해주 지역에 경제 특구를 개발해 북측 선박이 해주직항로를 이용해 개성~해주~남측 간 산업연계를 강화해나가는 프로젝트가 제기됐다. 해주를 비롯한 서해지역은 남북 군사력이 밀집된 곳으로 이 지역에 경제협력특구가 조성될 경우 군사적 긴장을 크게 완화시킬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정상선언의 1항과 2항은 6·15공동선언이 밝힌 조국통일의 원칙과 방법을 재확인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들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2항에서는 “남북관계를 통일 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가기 위해 각기 법률적·제도적 장치들을 정비한다. 남북관계 확대와 발전을 위한 문제들을 민족의 염원에 맞게 해결하기 위해 양측 의회 등 각 분야의 대화와 접촉을 적극 추진해 나간다” 라고 돼 있어 낮은 단계 통일과 민족통일기구 수립을 위한 제도적 준비와 정치 협상의 본격화를 예고했다.
이경원 조국통일범민족연합남측본부 사무처장은 5일 오전 열린 ‘2007 남북정상회담 결과 분석 및 향후 전망에 대한 긴급정책토론회’에서 “이번 선언이 6·15 공동선언 이후 7년 동안 정체됐던 남북간 정치·군사 문제를 반영하고 있고, 6·15 공동선언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나가기 위한 선언”이라면서 “남은 것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남한의 실천 문제”라고 지적했다. 또 정대연 한국진보연대 정책위원장은 “이번 정상선언은 다음 단계로 발전하기 위한 구체적 조치에 합의하고 남북대화가 다방면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선민 기자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고 2007 남북정상선언이 성사되기까지 남한과 북한 사이에는 수많은 대화와 교류협력이 진행됐다. 35년간 꾸준히 이어온 남북한의 접촉 결과가 집약된 것이 바로 2007 남북정상선언이다.
남북 최초 대화 시작한 7·4남북공동성명
6·25전쟁 이후 적대적인 관계였던 남북한 간에 처음으로 성사된 만남은 1971년 8월 20일 적십자회담이었다.
1972년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3대 원칙을 천명한 7·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며 본격적인 남북대화의 통로가 마련됐다. 국토분단 이후 최초로 통일과 관련해 남북한 당국이 합의한 성명으로 이후 남북한 간에 이뤄진 모든 접촉과 대화의 기본 지침 역할을 해왔다. 합의에 따라 남북적십자회담 개최, 남북직통전화 개설, 남북조절위원회 등이 구성되는 등 발전을 보였다. 그러나 아직은 남북대화 채널이 적십자회담, 조절위원회 정도로 단순한 수준이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올림픽 단일팀 구성 회담, 경제 회담, 국회 회담 등 남북한 간의 대화 채널이 더욱 다양해졌다. 1985년 남북이산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공연단의 교환방문이 성사됐다. 이는 남북대화가 시작된 이래 대화를 통해 이룩된 최초의 결실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전두환 정부의 적극적인 대북정책에 이어 1988년 노태우 정부는 북한뿐만 아니라, 소련과 중국을 포함한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시도하는 북방외교채택을 선언하고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1990년대는 남북 접촉의 증가와 함께 세계적 분위기도 유화국면이었다. 미국과 대결하던 구 소련권이 붕괴되면서 국제적으로 탈냉전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남한과 소련의 수교, 중국의 개방·개혁정책 가속화, 남한과 중국관계 진전과 국교수립, 그리고 남북한 유엔가입 등이 일어나며 남북한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그 결과 1991년 ‘남북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기본합의서)’가 나왔다.
남북기본합의서의 채택으로 남북한이 상대방의 실체를 인정하고 군사적 침략이나 파괴·전복 행위를 하지 않으며, 상호 교류 협력을 통해 민족공동 발전과 점진적·단계적 통일을 실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다음해인 1992년 1월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함으로써 남북 간 화해무드는 무르익었다.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의 정상회담 추진의지에 북한이 호응했지만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정상회담은 무산됐다.
199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당시 클린턴 미 행정부는 북한을 협상 파트너로 인정하며 포괄적 대북 접근정책을 폈다. 이런 분위기에 힘입어 1998년 국민의 정부가 출범하며 이산가족 상호방문을 성사시켰다. 국민의 정부는 대북정책에서 정경분리원칙을 제시하고 남북 사이의 경제교류와 민간교류를 적극 권장했다. 그해 여름 현대그룹 정주영 명예회장의 ‘소떼 방북’을 계기로 금강산 관광이 남북 사이에 합의됐다.
더욱 가까워진 남북 … 실질협력 시대로
대북정책에서 햇볕정책을 내세운 김대중 대통령이 2000년 6월 평양을 방문해 6·15공동선언을 발표하며 남북 간 화해·협력을 본격화하는 시동을 걸었다. 통일문제를 우리 민족끼리 자주적으로 해나가기로 했으며, 남측의 연합제와 북측의 연방제에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했다. 이산가족의 상호방문 실현과 경제협력 및 제반 분야의 교류 확대를 추진하기로 했다. 이후 이산가족 상봉과 남북장관급회담이 지속적으로 진행됐다.
햇볕정책을 계승한 참여정부는 대북정책에서 더욱 유연한 자세를 유지했다. 금강산 관광과 개성공단 건설을 합의대로 진행해 왔고, 하늘, 땅, 바다를 통한 문화·경제 교류는 계속 증가했다. 안중근 의사 유해 공동발굴, 남북이산가족 화상상봉 실시, 통일열차 시험 운행 등 남북 공동사업이 각계각층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2007년 10월 2일 남북정상의 만남이 성사되고 교류·협력을 더욱 구체화한 2007남북정상선언이 발표됐다.
유호열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개성공단 시범 사업 운영이 참여정부의 최대 성과”라고 평했다. 경제를 통해 남북간 협력 기조를 마련함으로써 한반도 긴장완화에 일조했다는 의미다. 또한 북한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좀더 유연해지는 데 참여정부가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고 평가했다. “최근 국민들의 대북관이 유연성 있고 신축성 있게 변화한 데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이다. 아울러 6자회담에 대해서도 미국과 북한, 중국 사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을 제대로 해낸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평가했다.
글 이선민 기자 사진 서울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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