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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이념에서 해방시켜라



 

2011년부터 새로 도입할 중고등학교 역사 과목을 위한 교과서 집필 기준안이 공개됐다. 좌편향 문제로 논란의 대상이 됐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들과 달리 민주화 투쟁 과정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건국과 발전 과정이나 6·25전쟁, 북한의 실상도 비중 있게 다루며 주요 사건을 균형 있게 서술함으로써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강조하고 우리가 이루어온 역사에 대해 긍지와 애정을 갖도록 교육한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교육과학기술부가 많은 고심을 한 흔적이 보이며, 높이 살 만한 일이다. 하지만 역사교과서를 제대로 만드는 작업은 단지 집필 기준안을 마련한다고 보장되는 일은 아니다. 국민적 관심과 독려 없이는 어려운 일임을 알 필요가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역사교육은 인간교육과 정치교육의 핵심이었다. 전통사회에서 통치자가 될 준비교육을 받는 사람들은 역사 이야기를 통해 사람을 다스리는 방법을 터득했다. 시민교육에서 역사교육은 정치 공동체로서의 도덕적 결속을 다지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선대들이 겪은 체험에 대한 애정 어린 이해 없이는 애국심과 국민적 결속을 기대하기 어렵다.
 

역사교육을 등한시하는 민족은 엄청난 대가를 언젠가는 치르게 마련이다. 어찌 보면 지금 우리 대한민국이 놓여 있는 처지가 바로 그렇다.
 

대한민국 초창기에는 역사교육이 강조됐다. 우리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 교육을 통해 세상을 제대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있었다. 그러나 개발독재 체제에 진입하면서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정신이 사라졌고,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주는 보물창고가 아니라 정치적 도구로 조작될 수 있다는 착각이 일었다. ‘한국적 민주주의’에 걸림돌이 된다고 의심받는 세계사는 교과과정에서 추방되고, 개발독재 체제를 미화하는 방향으로 각색된 ‘국사’와 ‘국풍(國風)’을 강조했다.
 

학자적 소양을 가진 사람들이 현대사 분야를 기피하면서 해방전후사에 관한 해석은 군사독재 타도와 통일이라는 두 가지 국민적 열망을 구호로 내건 운동권의 독점물이 되었다.
 

역사를 정치적 도구로 잘못 인식했다는 면에서는 군사독재세력이나 운동권이나 마찬가지였고, 역사의 보복은 양쪽이 다 이념적 파산의 궁지로 몰리는 상황으로 나타났다. 공산주의에 관한 지식과 정보까지 차단하는 우매한 반공정책으로 유신체제를 정당화하려던 시도는 젊은 세대가 공산주의에 대해 완전히 백지라서, 오히려 심정적으로, 지적으로 공산주의 진영의 선전선동 전략에 노출되는 역설적 상황을 낳았다. 반공적 민족주의 대신 반체제적, 친북적 민족주의가 배양되는 효과도 나타났다.
 

일반 사람은 물론이고 군사독재 측도 간과했던 점은 역사의 조작을 포함한 선동선전 기술에 관한 한 옛 소련과 북한은 자유세계 진영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담대함과 고도로 정예화된 기술과 조직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20년이 넘게 우리 운동권의 교재로 쓰인 책 가운데는 스탈린의 역사 날조가 절정에 달했던 1938년에 출간된 <소련공산당약사>나 그 무렵에 나온 세계사책, 경제이론서, 그리고 빨치산 출신으로 그런 식의 이념교육을 받았던 국내 학자들이 집필한 책들이 핵심을 이뤘다. 대한민국의 역사를 미국의 반(半)식민지로 편향되게 기술한 것은 물론이고,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집요한 폄훼(貶毁)나 6·25전쟁에 관한 사실 왜곡 모두 냉전시기 소련 공산당의 한반도 전략의 일부였음은 물론이다.
 

공산주의 억압체제에서 벗어난 러시아에서는 현재 역사개편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그들의 선전선동에 노출됐던 우리 민주화 진영도 1990년대 초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이념의 공황을 겪었으나 역설적이게도 잘못된 역사인식에 대한 철저한 반성을 통해 진보이념을 재정립하기 전에 정치의 중앙무대를 장악하고 통일지상주의에 함몰됨으로써 기회를 놓쳤다.
 

정치적으로 보수 진영에 속하는 사람도 역사를 제대로 못 배웠고 역사는 각색의 대상이 되어도 좋다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역사교과서를 제대로 만드는 일은 칼날 위를 걷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일이다.
 

글·이인호(KAIST 김보정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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