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기, ‘우주 05-Ⅳ-71 #200’, 캔버스에 유채, 254×254cm, 1971

2019년 이맘때였다. 국내 대다수 신문과 TV 뉴스에서 동시다발적으로 그림 한 점과 관련된 기사를 쏟아냈다. 뉴스의 주인공은 한국 추상회화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화가 김환기(樹話 金煥基, 1913~1974)가 그린 ‘우주’였다. 그림 한 점이 이렇게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건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런데 정작 모든 기사의 초점은 ‘작품’보다 ‘돈’에 맞춰졌다. 2019년 11월 23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크리스티 경매에서 김환기 작품 ‘우주’가 8800만 홍콩달러(한화로 약 131억 8750만 원)에 낙찰되었기 때문이다. 130억 원! 한국 미술품 경매가 최고 기록이다. 그림 하나에 100억 원이 넘는다는 사실에 많은 사람이 거부감을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세상엔 수천억 원이 훌쩍 넘는 그림이 차고 넘친다. 그러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오히려 한국 미술작품 (가격) 수준이 세계와 비교해 아직 멀었다는 증거인 셈이기도 하니까.
물론, 가격과 작품의 가치가 비례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예술 작품의 특성상 그 가치를 객관적으로 쉽게 수치화(계량화)할 수 없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작품의 수준(?)을 가격으로 결정짓는 행태를 무조건 거부할 수만도 없는 법. 작품 가격이 최소한의 판단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음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뭐든지 그 가치를 ‘돈’으로 환산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선 특히 더욱 그렇다.
 
▶김환기, ‘매화와 항아리’, 캔버스에 유채, 53×37cm, 1957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
아무튼, 이 글을 쓰기 위해 집에 있는 책장 아래 칸에 꽂혀 있던 김환기 화집을 다시 꺼내 봤다. 2012년 출판사 마로니에북스에서 펴낸 <한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The most beloved painter in Korea) 김환기 1913~1974>라는 제목의 두툼한 책이다. 역시나 ‘명불허전!’ 초기 피란 시절 그림부터 백자 달항아리, 나무, 새, 인물 등이 등장하는 형상 회화, 그리고 말년에 뉴욕에서 그린 푸른색 점 추상화까지. 새삼 다시 봐도 무엇 하나 좋지 않은 그림이 없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라는 제목으로 정리된 김환기 글 모음 가운데서 아주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소제목은 ‘그림 안 파는 이야기’. 내용 중 몇 줄을 인용하면 이러하다.
“나는 그림을 안 팔기로 했다. 팔리지가 않으니까 안 팔기로 했을지도 모르나 어쨌든 안 팔기로 작정했다. 두어 폭 팔아서 구라파 여행을 3년은 할 수 있다든지 한 폭 팔아서 그 흔해 빠진 고급차와 바꿀 수 있다든지 하면야 나도 먹고사는 사람인지라 팔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디 내 그림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인사가 있기를 바라겠는가. 그림을 팔지 않기로 작정한 다음부터는 마음이 편안하다. … 아, 그림을 안 파는 것 얼마나 속 시원한 일인가. 이 심경은 화가가 되어보지 않고는, 특히 한국의 화가가 되어보지 않고는 모를 게다. 그래서 내 공방(工房)은 자꾸만 내 그림으로 좁아간다. 지금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통틀어 내 재산이라고는 공방과 내 그림뿐 그 밖에 아무것도 없다.”
김환기가 이 글을 쓴 때는 1955년 3월. 마흔세 살, 부산 피란지에서 돌아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할 당시였다. 그는 짐작이나 했을까? 자신의 그림이 한국에서 제일 비싼 그림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것도 자신이 죽고 나서. 

▶김환기, ‘무제 03-Ⅶ-68 #9’, 캔버스에 유채, 208×157.5cm, 1968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
김환기는 1913년 목포에서 뱃길로 20여 km나 떨어져 있는 작은 섬 기좌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행정구역상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이다. 안창도의 ‘안’과 기좌도의 ‘좌’를 합쳐 이렇게 부르게 되었단다. 어쨌든 이제는 자동차를 타고 편하게 섬에 들어갈 수 있다. 2019년 개통한 천사대교(신안군은 1004개의 섬으로 이루어졌다)를 비롯해 신안군 여러 섬이 연륙교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조만간 안좌도엔 김환기미술관도 생길 예정이다. 참고로 김환기 생가 근처에 살았던 사촌 동생 소화 김암기(蘇話 金岩基, 1932~2013) 역시 목포를 대표하는 유명 화가다. 목포 유달산에 있는 노적봉예술공원 안에 김암기미술관이 2019년 개관했다.
김환기 작품 세계는 일반적으로 크게 세 시기로 구별된다. 먼저 1930년대 일본 유학 시절부터 1945년 해방까지, 이후 서울대와 홍익대 교수를 역임하고 4년간 프랑스 파리 체류 기간을 거쳐 1963년 뉴욕으로 떠나기 이전까지, 마지막으로 10여 년 동안의 뉴욕에서 작품 활동 기간이 그것이다.
안타깝게도 김환기는 1974년 7월 25일 뇌출혈로 쓰러졌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노년이라고도 할 수 없는 62세 나이였다. 앞서 거론한 한국에서 제일 비싼 그림이 된 ‘우주’를 제작한 것도 1971년, 뉴욕에 머물며 추상회화 작업에 몰두했을 시기였다. 이처럼 김환기는 후기로 접어들면서 추상 이미지에 심취했지만, 그 근원엔 한국의 전통과 거기서 우러나온 미의식이 자리 잡고 있다. 무수히 많은 푸른색 점을 고향 바다의 잔잔한 쪽빛 물결이라고 해석하는 이도 있다.
서울에서 수화의 흔적을 더듬고자 멀리 다도해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청와대 뒤편 북악산 기슭 부암동에 있는 환기미술관에 가면 된다. 그의 작품이 상설 전시된다. 건축가 우규승이 설계한 미술관 건물도 그림 못지않게 멋있다.

이준희_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