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월 퇴근길에 불법 유턴 차량과 충돌해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된 럭비 국가대표 출신 윤태일(42) 씨는 끝내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 네 명에게 새로운 생명을 건네고, 인체조직 기증을 통해 100여 명 환자에게 기능적 장애 회복의 희망을 남겼다. 비슷한 시기 오토바이 배달 중 어지럼증을 느껴 병원으로 긴급 이송됐으나 뇌사 판정을 받은 한기문(55) 씨 역시 다섯 명의 생명을 살리고 생을 마감했다. 한국장기조직기증원(KODA)에는 이처럼 삶의 끝에서 생명을 나누는 기증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기증 규모로는 늘어나는 이식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다. 2024년 12월 기준 장기이식을 기다리는 환자는 5만 4789명에 달한다. 가족이나 지인의 생체 기증을 제외하면 국내에서 가능한 장기이식 방식은 ‘뇌사자 기증’이 유일하지만, 뇌사기증자 수는 정체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뇌사기증자는 2022년 405명, 2023년 483명, 2024년 397명, 2025년 370명으로 집계됐다.
장기이식까지 걸리는 평균 대기기간은 4년에 이른다. 이 기간 동안 하루 평균 8.5명이 이식을 받지 못한 채 사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신장이식은 평균 7년 9개월을 기다려야 할 만큼 수급 불균형이 심각하다. 고령화와 의료기술 발달로 장기이식 수요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지만 공급 여건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이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장기기증과 이식 전반을 아우르는 종합대책을 처음으로 마련했다. ‘제1차 장기등 기증 및 이식에 관한 종합계획(2026~2030)’이다. 정부는 이번 계획을 통해 만성적인 장기기증·이식 수급 불균형을 완화한다는 방침이다.
장기기증희망등록기관 2030년 904곳 이상
종합계획의 핵심은 기증 기반 확대와 제도 개선이다. 민간 중심으로 운영돼 온 ‘기증희망등록기관’을 공공 영역까지 대폭 확대해 기증희망자 등록을 늘리고 이식 선진국에서 보편화된 ‘연명의료 중단 후 심장사한 기증 희망자의 장기기증(DCD·Donation after Circulatory Death)’을 법제화해 새로운 장기기증 경로를 마련한다는 구상이다.
장기기증자에 대한 예우도 세심하게 손질한다. 정부는 ‘생명나눔으로 국민보건 향상’을 비전으로 ▲생명나눔 예우와 문화 조성 ▲의료기관 지원 및 관리 강화 ▲순환정지 후 장기기증 등 새로운 기증 방식 도입 ▲인체조직 공급체계 정비 ▲연구 지원과 거버넌스 활성화 등 5대 추진과제와 12개 세부과제를 단계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먼저 정부는 기증자·유가족 맞춤형 사후관리 서비스를 확대해 사회적 예우에 대한 체감도를 높인다. 장례 지원, 유가족-수혜자 간 서신 교환, 뇌사기증자 추모행사 등 다양한 예우제도를 운영해 왔으나 유가족의 만족도는 충분하지 않다는 판단에서다. 현금성 지원(장제비·의료비 최대 540만 원)이 적절한 유가족 지원 방식인지에 대한 사회적 논의도 미흡한 상황이다. 정부는 국민 인식 조사 등을 통해 장제비 지원의 합리성을 검토하고 지원금 기부 활성화와 민간 주도의 현물 예우 등 개선 방향을 모색한다. 지방자치단체, 지역 의료기관 등과 연계한 유가족 예우 행사, 지자체 청사·박물관·장기이식 의료기관 내 ‘기억의 벽’(기증자 현판) 설치, 유가족 자조모임 지원 등 정서적·실질적 지원도 강화할 계획이다.
장기기증 희망등록 접근성도 높인다. 정부는 기증희망등록기관을 2025년 462곳에서 2030년 904곳 이상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읍·면·동 주민센터 약 3500곳과 운전면허증 발급기관 27곳을 장기이식 등록기관으로 지정해 기존의 민간 중심 구조를 공공 영역까지 넓힌다. 아울러 죽음을 준비하는 단계에서 고려할 수 있는 장기기증 희망등록과 연명의료 중단을 한 번에 안내하고 신청 절차도 연계한다. 국민건강보험공단과 의료기관의 사전연명의향서 전문 상담 인력을 활용해 장기기증제도를 병행 안내하고 희망등록도 함께 접수받을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DCD 도입, 조혈모세포 이식 급여화 추진
의료 현장에 대한 지원과 관리도 뒷받침한다. 뇌사추정자가 발생하면 유선이나 문자 대신 병원 EMR(전자의무기록)을 통해 한국장기조직기증원에 알리고 기증원 소속 코디네이터 인력을 적정 시점에 지원받을 수 있도록 한다. 뇌사추정자 상담·신고에 관한 수가(의료서비스 대가)와 기증자 관리료 등 뇌사 관리에 대한 보상도 늘린다.
조혈모세포·안구 이식 분야의 공백 해소에도 나선다. 현재 검사비와 입원비 등 600만~700만 원의 비용을 수혜자가 전액 부담하는 조혈모세포 이식은 건강보험 급여화를 추진한다. 안구 이식의 경우 각막은 수입이 가능하고 의료기관이 이식 대상자를 선정할 수 있지만 별도의 안전관리 체계가 없다는 점이 지적됐다. 정부는 해외 운영 사례를 참고해 국내 각막 이식 활성화와 수입 각막 안전관리 방안을 검토할 계획이다.
우리나라는 생존기증자 비율(2024년 기준 100만 명당 49.7명)이 높은 수준이지만 기증 전후 과정에 대한 관리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도 과제다. 이와 관련해 정부는 ‘살아 있는 기증자’를 대상으로 정기 건강검진비 지원을 확대한다. 미성년자 기증의 경우 의사결정 능력, 자발성을 심층 평가하는 도구를 개발하고 장기적으로는 미성년자의 장기기증을 폐지하거나 제한적으로 승인하는 방향을 검토한다.
DCD 등 새로운 기증 방식 도입을 위한 법률 개정도 추진한다. DCD는 심장이 멈춘 뒤 혈액순환이 완전히 정지해 의학적으로 회복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판단된 사망자의 장기를 기증하는 방식이다. 해외에서는 생존기증을 제외한 전체 사후 장기기증자 중 DCD가 절반을 차지하고 있지만 국내에서 이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장기이식법과 연명의료법 개정이 필요하다.
정부는 DCD 전면 도입에 뇌사기증과 같은 상세 지침을 마련하고 고숙련 의료기관에서 시범 적출·이식을 시행할 계획이다. EMR을 연계한 뇌사추정자와 연명의료 중단 결정자가 발생하면 기증원에 신고되는 체계도 구축한다. 의료기관에서 신고가 이뤄지면 기증원 소속 인력이 현장에 출동해 기증 적합성 평가와 가족 상담 등 기증자 관리를 담당한다.
인체조직 국내 기증 활성화를 위해
정부는 인체조직 공급체계도 개선한다. 현재 사망자나 뇌사자 가운데 인체조직 기증자는 연간 150명 안팎에 그친다. 한국공공조직은행이 주로 담당하는 국내 기증 인체조직만으로는 화상 환자나 암치료 이후 조직 재건이 필요한 환자, 폭발사고 환자 등에 대한 수요를 충족하기 어렵다. 이로 인해 인체조직의 80% 이상을 해외 기증 인체조직에 의존하고 있다. 운영난으로 주요 병원의 인체조직은행이 잇따라 문을 닫으면서 국내 여건은 더욱 악화됐다는 분석이다. 정부는 인체조직 기증 참여를 늘리기 위한 홍보를 강화하고 병원 인체조직은행에 대한 지원 방안을 마련할 계획이다.
아울러 병원이 직접 입력하는 장기기증·이식 정보와 질병관리청이 장기간 축적해온 장기이식 코호트 연구 정보, 관련 건강보험 정보 등을 연계해 장기기증·이식 분야 연구 지원체계를 활성화한다. 의료계와 학계 전문가, 정부기관 간 논의를 확대해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장기기증·이식 분야 정책 결정 구조도 강화한다. 정은경 복지부 장관은 “삶의 마지막에 장기와 인체조직 기증이라는 숭고한 희생을 결심해 주신 기증자와 유가족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며 “국가도 국민적 공감대 형성을 통해 제도를 개선하고 장기기증 활성화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이근하 기자
알기 쉬운 장기기증·이식 Q&A
장기 이식과 인체조직 이식은 어떻게 다른가?
장기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즉시 이식이 이뤄져야 한다. 신장·간·심장 등이 대표적이다. 반면 인체조직 이식은 암이나 화상치료, 재활과정에서 기능 회복과 삶의 질 향상을 목적으로 한다. 피부·양막 등 채취한 조직을 가공해 최대 5년까지 보관한 뒤 이식할 수 있다.
조혈모세포 기증이란?
조혈모세포는 혈액을 만들어내는 뿌리세포로 백혈병 등 혈액질환 환자 치료에 활용된다. 과거에는 골수 기증이 중심이었지만 현재는 말초혈 기증이 주를 이룬다. 수혜자가 간접비용을 전액 부담해야 하는 점이 제도적 한계로 지적돼왔다. 이에 정부는 건강보험 적용과 법적 근거 마련을 추진하고 있다.
뇌사자 장기기증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나?
뇌사자 가족이 기증에 동의하면 뇌사 확인 절차가 시작된다. 뇌사조사와 뇌파검사 후 뇌사판정위원회 심의를 통해 뇌사 여부가 최종 판정되면 이식 대상자를 선정해 장기기증이 이루어진다.
장기기증이나 장기이식 신청은 어디서 할 수 있나?
장기이식은 환자가 치료를 받는 병원에서 이식대기자로 등록해 신청할 수 있다. 기증자가 발생하면 정해진 절차에 따라 대상자로 선정돼 이식을 받는다. 장기기증 희망자는 보건소 등 등록기관을 통해 신청할 수 있으며 16세 미만의 경우 부모 동의가 필요하다. 다만 장기기증 희망등록을 했더라도 실제 장기기증이 이뤄질 때는 가족 동의가 반드시 요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