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람 중심 경제, 혁신적 포용국가, 노동 존중 사회. 정부의 의지가 실린 국정 목표들이다. 국민 누구나 실현되기를 꿈꾸는 목표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해관계가 다른 경제주체들끼리 양보와 타협으로 힘을 모아야 꿈을 실현할 수 있다. 정부가 주도하거나 기업을 중심으로는 하는 정책으로는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국민 모두가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다종·다양한 갈등을 관리하고 조정하는 것부터 시급하다. 빠른 경제 성장과 절차적 민주화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사회·경제적 갈등은 오히려 심화, 확대되는 양상이다. 불필요한 사회적 비용이 커지고 사회 통합을 위협하고 있다. 소수의 경제적 강자의 이익 때문에 다수의 약자들이 억압을 받거나 배제되는 절차와 관행이 남아 있고,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 결정된 사안에 대해서도 이해가 상반되는 집단이 반발하며 극한 대립을 불사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국제사회가 요구하는 노동, 인권, 환경 관련 보편적인 가치에 대해서도 서로 다른 의견이 여전히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민주 사회에서 갈등 표출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갈등과 타협이 민주주의 발전의 기반이라는 말도 있다. 문제는 갈등을 적절하게 관리, 조정할 수 있는 체계의 부실이다. 탄탄한 체계를 구축하려면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고 존중하는 관행과 문화가 쌓여야 한다. 사회적 합의에 이르는 길은 멀고 험난하다. 그렇지만 반드시 가야할 길이다. 사회적 합의로 가는 길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멀고 험한 길 하지만 가야할 길
노동 관련 사회·경제 정책의 쟁점 현안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난항을 겪고 있다. 최저임금 결정 체계 개편,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이행 등을 놓고 노동계와 경영계 사이의 마찰이 이어지고 있다. 정부와 정치권에서도 파열음이 나온다. ILO 핵심협약은 1998년 총회에서 채택된 ‘노동의 권리 및 기본원칙에 관한 선언’에 따라 모든 회원국이 준중하고 실현할 것을 권고한 기준이다.
▶신고리 5·6호기 공론조사 시민 참여단이 2017년 10월 15일 충남 천안의 계성원에서 진행된 설문조사를 마친 뒤 박수를 치고 있다. | 연합
ILO 187개 국 중 165개국이 준수
2018년 현재 187개 ILO 회원국 가운데 165개국이 핵심협약을 준수하고 있다. 한국은 이런 기본적인 국제규범에 대한 논의조차 삐거덕거리고 있다. 국내총생산(GDP) 기준 경제 규모 세계 12위, 수출 규모 세계 6위을 자랑하는 나라의 ‘부끄러운 민낯’이다.
ILO 핵심협약의 이행을 위한 사회적 논의가 진행되기는 했다. 또 정부 관련 부처의 준비 작업과 국회 입법 절차도 진행 중이다. 협약을 이행하려면 대통령의 비준과 국회의 비준 동의, 협약과 충돌하는 현행 노동 관련 법률의 개정 등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직접적 이해당사자인 노동계와 경영계의 의견 수렴이 우선이다.
이에 따라 대통령 소속 사회적 대화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경사노위)는 산하 ‘노사관계 제도·관행 위원회’의 공익위원 중심으로 논의를 모아왔다. 지난해 7월부터 10개월여 동안 42 차례의 회의 끝에 마련한 공익위원 최종안이 4월 15일 나왔다. 최종안의 뼈대는, ILO 핵심협약과 관련해서는 노동계 요구대로 공무원·해고자·실업자의 노동조합 가입 요건을 완화하는 등의 법률 개정을 추진하되, 경영계 요구인 단체협상 유효 기간 연장을 입법 과제로 제시한다는 것이다.
경사노위 공익위원 안은 사회적 합의의 완성체가 아니다. 공익위원들이 중재안 성격의 제안을 했을 뿐 합의 주체인 노동계와 경영계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 경사노위는 앞으로 회의체 구성 단계를 끌어올려 최종 의결안까지 내놓을 계획이지만 전망은 어둡다. 당장 공익위원 안만 하더라도 노동계와 경영계 양쪽으로부터 반발을 사고 있다. 한국노총은 “사용자 단체 요구 사항 일부를 수용한 것은 명백히 현 제도를 후퇴시키는 것으로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밝혔다. 경총은 “경사노위 공식 의견으로 채택되지 못한 공익위원 안은 공신력을 얻을 수 없다”며 역시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경사노위 참여를 거부하고 있는 민주노총은 아예 사회적 합의 절차를 생략하자고 요구한다. 조약에 대한 비준권이 있는 대통령이 곧바로 ILO 핵심협약을 비준한 뒤 국회 동의와 입법을 추진하는, ‘선(先)비준-후(後)입법’ 요구이다. 이에 대해 고용노동부는 “법 개정이 필요한 조약의 경우 국회 동의가 반드시 필요해 대통령이나 정부의 의지만으로 선비준은 불가능하다”며 난색을 표한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는 야당 의원들을 중심으로 ‘노사정 합의가 전제 되지 않는 법 개정 불가’라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온다. 이런 책임 공방 속에 ILO 핵심협약은 자칫 ‘사공 없이 표류하는 쪽배’ 신세로 전락할 위기에 놓였다.
주요 쟁점 현안에 대한 논의가 표류하면서 경사노위도 휘청거린다. 사회적 대화기구로서 위상이 흔들리고 산적한 다른 논의 과제의 진행까지 차질을 빚을 가능성이 우려된다. 경사노위는 문재인정부 출범 뒤 1년여 동안 노사정 대표자들간 협의 결과에 따라 야심차게 탈바꿈한 기구이다. 기존 ‘경제사회발전노사정위원회’에서 ‘발전’과 ‘정(정부)’을 뺀 이름으로 바꾸고, 보다 다양한 계층의 이해가 반영될 수 있도록 논의에 참여할 수 있는 주체를 확대했다. 본회의 위원 수가 10명에서 18명으로 늘어나, 기존 노동계와 경영계 대표 외에 중소·중견기업, 소상공인, 여성, 비정규직, 청년 대표 등이 새롭게 자리를 얻었다.
▶3월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 열린 제24차 노사관계제도·관행개선위원회 전체회의를 마친 뒤 박수근 위원장(왼쪽)이 회의 내용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 연합
“노동 존중과 포용적 성장 지혜 모아야”
경사노위 참여 주체의 확대는 사회적 합의주의의 기본 원리와 부합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유럽 복지국가에서 발달한 사회적 합의주의는, 경제적 이해관계가 엇갈리는 계층들이 서로 승복할 수 있도록 합의하는 절차를 진행해, 여기서 나온 결과를 바탕으로 법과 제도를 만들고 운영하는 게 기본 원리이다. 이런 원리가 작동하려면 계층 대표들이 서로 수평적 관계에서 테이블에 마주앉아 절충과 타협을 이어갈 수 있는 여건을 갖춰야 한다.
기울어진 테이블에서는 절충과 타협이 나올 수 없다. 소수의 경제적 강자 집단이 다수의 약자 집단을 배제하고 지배하는 구조를 시정하자는 게 사회적 합의주의의 정신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은 계층일수록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창구가 좁다.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도 취약하다. 이런 상황에 놓인 계층이 바로 비정규직 노동자, 청년, 소상공인 자영업자들이다. 이들은 우리 사회의 다수를 구성하면서도 자기이익을 관철하기 어렵다. 사회적 대화기구로 수평적인 테이블을 마련해줘야 한다.
경사노위가 바로 이런 취지로 개편됐다. 참여 주체가 확대되면서 논의 의제도 사회, 경제적 현안 전반으로 넓힐 수 있게 됐다. 다양한 영역을 다루는 사회적 대화를 통해 노사 관계의 개선을 넘어 격차 해소 등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설 것이라는 기대감이 컸다. 문재인 대통령도 2018년 11월 22일 청와대에서 열린 경사노위 출범식 및 1차 본위원회 회의에서 그런 기대감을 표시하며 적극적 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우리가 추진하는 사람 중심 경제, 노동 존중 사회, 포용적 성장, 혁신성장과 공정경제는 정부의 노력만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모든 경제주체들이 지혜를 모으고 양보와 타협을 통해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야만 가능하다”라고 했다. 아울러 노동계와 경영계는 국정의 동반자이며 협력의 관계임을 강조하며 “자기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는 게 아니라 대화와 타협, 양보와 고통 분담을 통해 합리적인 대안을 찾자”고 호소했다.

작은 합의 경험 꾸준히 축적해야
그러나 아직 경사노위를 통한 새로운 대화의 문은 열리지 않은 모습이다. 출범 초기의 기대감도 점차 시들해지고 있다. 경사노위 관계자는 “기구 구성과 조직 운영 방식이 바뀐 다음에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불이익 걱정 없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회의 환경이 조성됐다”면서도 “그러나 노사 모두 해묵은 쟁점에 대한 소모적 공방에 매달리는 바람에 대화 주체들이 서로 양보할 수 있는 ‘자원’이 무엇인지 고민할 여유가 없는 것 같다”고 전했다. 그는 “일부 위원회 구성 단체의 대표성과 정책 개발 전문성 부족도 논의 활성화에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덧붙였다.
경사노위 참여 주체의 확대에 따른 효과가 나타나는 부분도 있다. 노동계와 경영계가 당장 충돌하지 않는 의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비교적 활발하다. 경사노위 산하 의제별 위원회 중 하나인 사회안전망개선위원회는 2019년 3월 초 ‘한국형 실업부조 제도의 운영 원칙’에 대한 노사정 합의문을 확정해 발표했다. 고용보험의 사각지대에 있는 실업자와 저소득층 구직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최초의 사회적 합의다. 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장지연 노동연구원 부원장은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도, 청년 구직자도 고용 보험을 통해 기본적인 생계를 해결하고 고용서비스를 통해 어려운 현실을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는 것”이라고 합의 내용의 의미를 설명했다. 고용노동부는 경사노위 합의를 토대로 올해 상반기 중 관련 법안 개정안과 함께 지원 규모 등을 확정해 내년 예산에 반영할 계획이다.
또다른 의제별위원회인 ‘디지털 전환과 노동의 미래위원회’는 ‘디지털 전환에 대한 노사정 기본인식과 정책에 관한 기본합의’를 최근 발표했다. 우리 사회에 도래한 디지털 혁명에 노·사·정이 함께 힘을 모아 대응하자는 게 합의의 핵심 내용이다. 선언적 내용이지만, 플랫폼 경제 등 신산업 출현으로 인한 사회적 갈등을 선제적으로 해소한다는 뜻을 담았다. 전문가들은 크게 주목을 받지 못하더라도 이처럼 쉽게 합의하는 경험을 꾸준히 축적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2018년 11월 22일 문재인 대통령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 위촉장 수여식을 마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청와대사진기자단
시장경제 병폐 제어하는 기제
사회적 대화는, 기본적으로 시장경제의 병폐를 제어하는 기제다. 사회적 간섭이 배제된 시장경제는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유발할 위험이 크다. 갈등을 관리하고 조정하는 기능이 취약한 사회는 계층 간 불신의 골이 깊어지고 거래 비용 등의 증가로 성장 동력과 시장경제의 활력마저 잃는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하면 사회적 갈등은 커질 수밖에 없다.
통계청이 최근 발표한 소득분배 지표에 따르면, 2017년 기준 우리나라 가계의 균등화 처분가능소득 기준 지니계수는 0.355로 나타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5개 회원국 가운데 5위다. 소득분배의 불평등 정도를 0과 1사이의 값으로 산출하는 지니계수는 값이 1에 가까울수록 불평등이 심하다는 뜻이다. 스웨덴은 0.282, 네덜란드는 0.285 등으로 지니계수가 0에 가깝다.
한국의 사회통합 수준도 지난 20년 동안 최하위권에 머무르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간한 ‘사회통합지수 개발 연구’ 보고서를 보면, OECD가 1995부터 2015년까지 20년 동안 5년마다 사회통합 지수를 측정한 결과 한국은 5차례 모두 지수 값이 0.2 이하로 지수 측정 대상 30개 회원국 가운데 29위를 기록했다.
지수가 높은 국가는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등이다. 모두 계층간 대화와 타협의 문화가 성숙된 나라들이다. 시장친화적이면서도 적극적인 분배 정책으로 든든한 복지를 자랑하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경제적 불평등이 심할수록 사회적 신뢰는 낮아지고 공동체의 기반은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환경이 다시 사회 갈등을 부추기는 구조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 갈등 심화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사회적 대화의 활성화가 답이다.
이미 문재인정부 들어 사회 각계각층의 이해관계가 얽힌 대형 현안을 공론화와 대화를 통해 풀어낸 사례가 적지 않다. 신고리 원전 5·6호기 건설 여부를 시민 공론화 과정에 맡겨 해결했고, 삼성반도체 산업재해 분쟁도 대화를 통해 타결했다. 2019년 1월에는 ‘상생형 일자리’의 첫 모델인 광주형 일자리가 첫발을 내딛었다. 사회적 대화의 틀 속에서 노사정이 양보하고 타협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든 것이다. 문 대통령도 "광주형 일자리가 사회적 대타협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 무척 반갑다"며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 적정임금을 유지하면서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미세먼지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산업계, 학계, 시민사회 등 각계를 대표할 수 있는 위원 30~40명으로 구성한 ‘미세먼지 해결을 위한 범국가기구’ 또한 사회적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나가려는 노력이다. 이들 사례는 갈등과 대립이 심한 현안에 대해 숙의민주주의를 공론화하고 치열한 토론과 대화를 통한 협상으로 최종 합의를 이끌어냈다는 데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사회적 대화가 양극화 해소와 포용적 성장의 실현, 노동존중의 사회 더 나아가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로 연결된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박순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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