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창업 역량이 국가 경쟁력의 핵심 요인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 정부는 창업 국가를 넘어 벤처가 도약하고 성장하는 나라를 만들고자 합니다. 세계시장에서 활약하는 ‘제2의 벤처 붐’을 일으키고자 합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3월 6일 열린 ‘제2 벤처 붐 확산 전략 보고회’에서 한 연설 중 일부다. 벤처는 모험이다. 창업도 모험이고, 투자도 모험이다.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나서 모험 도전을 강조했다.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대에 진입했지만 우리 경제의 성장 활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데다, 4차 산업혁명의 파고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새로운 활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세계경제는 벤처산업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다. 새로운 기술과 제품, 서비스로 무장해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도전에 나서야 돌파구가 열린다.
벤처·창업 활성화는 포용적 혁신성장을 위한 정부의 핵심 국정과제이자 전략이다. 2018년부터 관련 법률과 제도를 정비해 정책 집행의 효율성을 높이는 한편, 정책자금 투입 규모도 늘려왔다. 이에 힘입어 창업과 벤처 투자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외형적으로는 벤처산업이 새로운 성장기에 접어든 모습이다. 이제는 확산과 도약을 모색해야 할 단계다. 이를 위해 정부가 정책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종합대책을 마련해 3월 6일 발표했다.
벤처산업은 꿈을 먹고 자란다. 매출이나 이익이 제대로 나지 않는데도 새로운 기술이나 사업 아이디어로 사람을 모으고 투자를 유치해 성장의 선순환을 만들어야 하는 게 벤처산업이다. 성장 초기 단계의 관점에서 보면 2018년에는 벤처 훈풍이 완연했다. 창업과 금융시장의 벤처투자가 급증세를 보였다. 신설법인 수가 사상 처음으로 10만을 넘어섰고, 다양한 형태의 신규 벤처투자도 역대 최고·최대 기록을 경신했다. 정부가 지속적으로 추진해온 벤처·창업 활성화 대책의 효과가 컸다.
중소벤처기업부와 금융위원회의 업무보고 자료를 보면, 무엇보다 민간 주도 방식으로 전환한 벤처투자 분야의 성과가 뚜렷했다. 벤처 투자자의 법적 지위가 개선되고 추가경정예산(추경)을 통한 모태펀드 추가 출자, 3153억 원 규모의 민간제안 펀드 신설 등에 힘입어 2018년 신규 벤처투자액은 2017년보다 43.9%나 증가한 3조 4249억 원을 기록했다. 투자를 받은 벤처기업 수도 1266개에서 1399개로 10.5% 증가하며 역대 최고치였다. 주식 상장을 통한 기업공개(IPO), 장외주식 거래, 인수합병(M&A) 등을 통한 투자회수 규모 또한 2조 6780억 원으로 사상 최고 수준을 달성했다.
▶연세대가 운영하는 ‘스타트업 스쿨’ 워크숍 | 한겨레
기업가치 1조 유니콘기업 두 배로
벤처산업에 대한 정책 환경과 인식의 개선 때문인지 기존 벤처산업의 역동성도 높아졌다. 연 매출 1000억 원이 넘는 기업을 뜻하는 ‘벤처천억기업’ 수는 10년 연속 증가세를 유지해왔는데, 2017년에는 2.9%에 그치던 증가율이 2018년에는 10.5%로 치솟으며 572개를 달성했다. 장외시장에서 국내외 투자자로부터 기업가치가 1조 원(또는 10억 달러) 이상으로 평가를 받은 유니콘기업 수도 3개에서 6개로 두 배 늘었다.
외형적 성장세는 뚜렷하지만 질적 수준으로 보면 국내 벤처산업 기반은 주요국에 견줘 여전히 취약하다. 벤처 투자액이 늘긴 했지만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2018년 기준)은 고작 0.19%로 미국(2017년 기준) 0.4%, 중국 0.26%보다 훨씬 적다. 그것도 재정이나 정책자금으로 조성된 모태펀드 중심의 투자가 지속돼 민간 자본의 자율적인 투자 확대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다.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근거해 2005년부터 운영되기 시작한 모태펀드는 벤처기업에 직접 투자하는 게 아니라, 개별 펀드에 출자하는 ‘펀드를 위한 펀드’다. 벤처 육성을 위한 마중물을 제공할 수 있겠지만 벤처투자의 주체는 될 수 없다.
벤처기업 창업 분야가 애플리케이션(앱) 개발 등 소프트웨어 산업, 연령대로는 청년층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이른바 ‘쉽고, 가벼운 창업’으로 양적 성장은 가능하겠으나 질적인 고도화나 저변 확대에는 한계가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기술력과 잠재력 있는 전문가의 창업이 활성화돼야 4차 산업혁명에 부응하는 새로운 산업의 출현이나 인재 유입과 축적을 기대할 수 있다.
벤처기업 창업이나 투자 뒤 회수와 재투자의 연결고리가 미약하다는 것도 반드시 해결해야 할 과제다. 역동적인 벤처 생태계를 위해서는 자본시장 내 투자 유인 채널 확대, 기업 간 M&A 활성화 등을 통한 투자-회수-재투자의 선순환이 구축돼야 한다.
세 가지 목표로 다섯 가지 전략 추진
정부도 이런 문제들을 인식해 3월 6일 발표한 ‘제2 벤처 붐 확산 전략’에서는 벤처·창업 생태계에서 민간의 역할을 확대, 강화하기로 했다. 우선 2022년까지 달성해야 할 목표를 세 가지로 압축했다. 첫째 신규 벤처투자액 5조 원 달성, 둘째 유니콘기업 20개 육성, 셋째 M&A를 통한 투자회수 비중 10% 수준 달성이다. 이를 위해 △신사업·고도기술 스타트업 발굴 △벤처투자 시장 내 민간자본 활성화 △스케일업과 글로벌화 지원 △벤처투자의 회수·재투자 촉진 △스타트업 친화적 인프라 구축 등 5가지 전략 과제를 추진하기로 했다.
무엇보다 창업 초기의 벤처 지원을 중심으로 했던 기존 대책과 달리 성장 단계, 다시 말해 스케일업(규모화) 지원에 초점을 맞췄다는 게 핵심이다. 창업 7년 이내의 초기 기업인 스타트업이 정체기를 지나 지속가능한 성장과 도약 단계로 들어서려면 후속 투자가 꾸준히 이어질 수 있어야 한다. 정부는 우선 올해 2조 5000억 원을 포함해 2022년까지 4년 동안 12조 원 규모의 ‘스케일업 전용 펀드’를 새로 조성하기로 했다. 또 신뢰도 높은 벤처 투자자에게 투자받는 스타트업에 대출 등을 지원하는 ‘실리콘밸리 은행’ 기능도 도입한다. 장기간 매출이 없거나 영업이익 적자지만, 혁신성과 성장성이 충분한 유망 기업의 경우 기업당 최대 100억 원의 보증 한도를 제공하는 ‘성장 유망 적자기업 특례보증’을 1000억 원 규모로 시범 운영하기로 했다.
차등의결권 도입은 찬반 팽팽
벤처투자 시장 내에서는 민간 자본의 참여를 확대하는 방안을 마련했다. 올해 상반기까지 일반 투자자가 편리하게 소액으로 스타트업에 간접 투자할 수 있도록 ‘비상장기업 투자전문회사(BDC) 제도’를 만든다. 대기업과 기존 금융기관의 회수시장 참여를 촉진하는 펀드도 생긴다. 이 밖에도 정부는 벤처특별법을 개정해 ‘차등의결권’ 주식의 발행을 허용하는 것을 검토하기로 했다. 차등의결권은 특정 주식에 많은 수의 의결권을 부여해 벤처 창업자 등 대주주의 지배권을 유지하면서도 외부 자본을 수혈받을 수 있게 하는 제도로 미국, 캐나다, 영국 등에서 허용하고 있으나 국내에선 도입을 두고 찬반 의견이 팽팽히 맞서고 있다.
▶3월 13일 서울 관악구 서울대 글로벌공학교육센터에서 열린 ‘우수 스타트업과 우수 인재가 함께하는 스타트업 채용 박람회’에서 학생들이 취업 상담을 기다리고 있다. | 연합
벤처 창업 분야의 다양화를 위해 대학과 연구기관, 대기업의 분사 등을 통한 벤처 창업도 촉진한다. 창업 친화적인 대학을 만들기 위해 교수의 승진과 성과급에 창업 실적을 고려하도록 하고, 석사과정 학생에게는 창업 활동으로 논문을 대체하거나 학점을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고려대와 성균관대, 카이스트 등에는 올해 상반기 중 인공지능(AI) 전문 대학원이 신설된다. 지난해 다시 도입된 벤처기업 직원의 스톡옵션 비과세 혜택은 기존 2000만 원에서 올해 3000만 원으로 한도가 확대된다. 벤처기업의 인재 확보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또 정부와 민간의 협업을 전제로, 올해 안에 100건 이상의 규제 샌드박스 적용 사례를 발굴하기로 했다.
▶서울 강서구 마곡 LG사이언스파크에서 2018년 10월 22일 열린 ‘스타트업 테크 페어’에서 노기수 LG화학 사장(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을 비롯한 LG계열사 임원들이 한 스타트업 업체의 제품을 체험하고 있다. | 한겨레
국민적 참여와 시장의 활력이 열쇠
산업융합법, 정보통신융합법의 개정에 따라 1차 접수 과제 20건 가운데 도심 수소충전소 설치, 모바일 전자고지서 발급 등 13건이 이미 샌드박스 적용 대상으로 확정돼 사업화가 추진 중이다. 정부는 4월 중 금융혁신법과 지역특구법 개정안의 발효에 따라 규제 샌드박스 적용 대상이 확대되면 핀테크와 지자체 숙원 사업에서도 다양한 벤처 창업이 이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벤처·창업은 경제성장과 일자리 창출의 핵심 동력으로 다른 나라에서도 혁신창업 생태계 조성을 위해 국가 역량을 집중하고 있다”면서도 “정부의 지원과 정책적 노력만으로는 제2 벤처 붐을 이끌어내기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벤처·창업을 통한 혁신성장은 정부 개입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국민적 참여와 시장의 활력이 관건이다. 2010년 이후 적극적인 벤처·창업 정책을 펴는 중국 정부도 ‘대중창업 만중창신’(大衆創業 萬衆創新·국민 누구나 창업을 하고 누구나 혁신 활동에 참여하라는 뜻)을 구호로 내걸고, 민간 중심을 강조하고 있다. 정부는 민간의 창의와 도전 정신이 살아날 수 있도록 시장과 플랫폼을 구축하고 규제 환경을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시장, 정책, 금융, 문화, 지원체계, 인적자원 등을 벤처·창업 생태계의 핵심 구성요소로 정의한다. 이상적인 생태계에선 이런 각 구성 요소의 성숙도가 높아진다. 여기에 더해 각 구성 요소 간 긴밀한 정보 교환과 상호작용, 협력을 바탕으로 유기적 관계가 형성된다. 홍남기 부총리는 “창의성과 자율성을 키우는 교육 시스템, 기업가 정신을 뒷받침하는 금융시장, 직업의 안정성보다 도전 정신을 격려하는 문화 등 모든 경제·사회·문화적 환경이 함께 변해야 제2 벤처 붐이 성공적으로 확산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박순빈 기자
1차 벤처 붐은 어땠나
1998년 불붙었다가 4년 뒤 거품 붕괴 침체 겪었지만 한국경제 허리층
희망의 빛은 어둠에서 더욱 빛을 낸다. 우리 경제에 벤처산업이 희망으로 떠오를 때도 그랬다. 국내 벤처기업의 창업과 투자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시기는 1990년대 말 외환위기를 겪은 뒤부터이다. 노동과 자본 투입에 의존하는 기존 산업들이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새로운 성장엔진을 모색해야 할 단계에 인터넷 확산과 정보통신(IT) 기술혁명을 바탕으로 벤처산업의 잠재성이 자연스럽게 부각됐다. 1996년 코스닥시장 개설과 김대중정부 초기의 적극적인 벤처 육성 정책도 벤처산업의 밑거름이 됐다.
금융계에선 벤처 열풍이 가장 뜨거웠던 기간을 1998년부터 2001년까지로 본다. 이른바 ‘1차 벤처 붐’이 일던 시기다. 지표상으로 쉽게 확인되는 벤처 붐은 벤처기업 창업 열기다. 정부로부터 벤처확인기업으로 인증받은 기업 수가 1998년 2024개에서 해마다 2000여 개씩 증가해 2001년에는 1만 1392개에 이르렀다. 코스닥 등록기업 가운데 벤처기업의 비중이 1998년 34.4%에서 2001년에는 49%로 높아지며 코스닥시장의 성장세를 이끌었다. 이 기간 코스닥 내 벤처기업의 주가로 구성된 벤처지수는 78%나 올랐다.
장외의 시중 자금도 벤처업계로 몰렸다. 우선 벤처캐피탈이 운용하는 창업투자회사의 수가 1997년 말 54개에서 2001년 말에는 145개로 급증했으며, 이들이 결성한 투자조합(펀드) 수도 같은 기간 5배 증가했다. 이들 조합의 전체 신규 투자액은 1998년 2168억 원에서 2001년 8913억 원으로 늘어 411%의 증가율을 기록했다. 이처럼 단기간에 과도하게 벤처투자가 이뤄지면서 후폭풍이 일기 시작한 것도 2001년부터이다.
벤처기업의 매출 성장세가 둔화하고 수익성도 급격히 악화하면서 코스닥 벤처지수가 급락세로 반전했다. 이에 따라 자본이득의 저하가 우려되자 2001년부터 투자조합 결성 건수와 투자금 조성 규모가 급감하기 시작했다. 벤처기업의 저조한 경영 성과와 이에 따른 벤처투자 위축은 시장의 과잉 기대로 인한 거품의 해소 과정이었다. 벤처 거품의 붕괴는 당시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적 현상이기도 했다.
과열 양상마저 보이던 벤처투자는 2000년대 들어 침체기를 이어왔지만 벤처산업은 우리 경제의 안정과 성장에 기여하면서 새로운 허리층으로 자리 잡았다. 중소기업연구원이 1차 벤처 붐 시기의 벤처확인기업 2801곳의 경영 성과를 분석한 보고서를 보면 벤처기업의 10년 평균 생존율은 46.8%로 일반 창업기업(17.9%)보다 훨씬 높았다. 또 벤처기업의 매출액 증가 폭(기업당 평균 3.5배) 역시 일반 기업(2.1배)보다 높고, 영업이익률도 시간이 흐를수록 일반 기업과의 차이가 확대되는 양상을 나타냈다. 2006년부터 2015년까지 벤처기업의 연평균 고용 증가율은 2.7%로, 양질의 일자리 창출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연구원은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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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K-공감누리집(gonggam.korea.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