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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의 대형 화면에 나온 ‘군함도’ 모습
현장에서 느낀 산업유산정보센터 문제점
일제 강제동원 역사 왜곡 논란의 중심에 있는 도쿄도 신주쿠구 소재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이하 정보센터)를 방문한 날은 7월 1일이었다. 일본 정부가 한국 대법원의 일제 징용피해자 배상판결에 대한 사실상의 보복 조치로 한국 수출규제를 처음 발표한 지 딱 1년이 지난 날이었다. 이날 10시 30분부터 오후 1시 20분까지 일본 총무성 제2청사 별관 1층에 있는 정보센터에는 필자 외 다른 관람객은 없었다.
필자는 6월 10일 사전 신청해 이날 일반 관람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일본 관람객이 이렇게 없는데 왜 완전 예약제로 운영하는 것일까’라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3시간 가까이 전시 내용을 살펴보면서 가토 고코 센터장을 비롯해 총 여섯 명에게서 설명을 들은 필자의 결론은 이렇다. 정보센터에는 아시아 최초로 산업혁명에 성공했다는 자랑은 있지만, 식민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주변국에 피해를 준 역사에 대한 반성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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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歐美)의 산업을 배우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 이토 히로부미 등을 소개한 사진. 근대화과정에서 주변국에 피해를 준 주역들을 추앙하는 모양새다.
일반 관람객 거의 없는 산업유산정보센터
일본은 메이지(明治·1868년 10월 23일∼1912년 7월 30일) 시대 자신의 힘으로 산업화를 이뤄냈다는 자부심을 표현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산업화 초기 자국 노동자의 희생에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자국 우월주의 탓에 조선인 징용 노동자는 물론 자국 노동자의 희생에도 눈을 감은 것으로 보인다. 코로나19 영향도 있겠지만, 일본 국민마저 정보센터를 찾지 않는 것은 도무지 역사적 진실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사람 냄새 나지 않는 ‘선전의 장’이기 때문은 아닐까.
2015년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23개 메이지 산업시설이 전시된 정보센터는 1078㎡ 규모이며, 3개 구역으로 나뉜다. 1구역에 들어서자 세계문화유산 등재 당시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적절한 조처를 하겠다는 사토 구니 주 유네스코 일본대사의 발언이 적힌 패널에 가장 먼저 시선이 갔다.
사토 대사는 2015년 7월 산업유산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당시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 권고를 존중한다면서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과 여타 국민이 본인의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 노역했다”고 인정했다.
나이가 지긋한 정보센터 안내원 두 명은 필자에게 1853년 미국 페리 제독의 개항 요구 당시 일본 에도(江戶) 막부 시대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페리 제독이 타고 온 군함의 크기에 당시 일본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이후 일본은 구미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해 조선업은 물론 철강, 석탄 등의 산업을 육성했다. 많은 젊은이가 산업화의 길을 배우기 위해 구미로 유학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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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 전쟁 당시 어린 시절을 군함도에서 보낸 재일교포 2세 스즈키 후미오씨의 일방적 증언이 담긴 패널
“산업혁명 아시아에서 가장 빨랐다” 자랑만
일본의 산업혁명은 1860년대 시작됐고 아시아에서 가장 빨랐다고 한다. 19세기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산업화에 성공한 나라이기도 하다. ‘한국의 산업혁명은 언제부터냐’는 한 안내원의 질문에 필자는 “본격적인 산업화는 1960년대부터”라고 답변했다. 일본이 훨씬 빨랐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의도처럼 느껴졌다. 구미의 산업을 배우기 위해 유학길에 오른 다섯 명의 젊은이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안중근 의사가 저격한 이토 히로부미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침략의 원흉이지만, 일본에선 메이지 시대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2구역에서는 대형 화면과 패널을 통해 조선, 제철·철강, 석탄 등 분야별로 메이지 시대의 본격적인 산업화를 다루고 있었다.
2018년 10월 한국인 징용 피해자에게 배상하라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받은 미쓰비시는 메이지 시대 대표적인 기업으로 소개돼 있었다.
주요 산업의 발전 경로와 시설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지만, 메이지 시대 일본 노동자들의 삶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일본의 시민단체에서도 정보센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고바야시 히사토모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사무국 차장은 6월 16일 <연합뉴스>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일본이 약속한 ‘역사 전체를 이해할 수 있는’ 전시가 필요하며, 일본의 산업혁명을 뒷받침한 노동자들을 전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마지막 3구역에는 조선인 징용 현장인 하시마(端島, 군함도) 탄광에서 일한 노동자와 그 가족의 사진들이 전시돼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일본 정부가 당초 약속한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희생을 기억하는 전시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당시 노예노동이 없었고, 조선인에 대한 차별도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데 치중하고 있었다.
3구역에선 가토 센터장과 그의 비서, 하시마 도민회 관계자 등 네 명이 필자 한 명을 상대로 열성적으로 군함도는 ‘지옥도’가 아니었다는 주장을 쏟아냈다. 한국 영화 <군함도>에 묘사된 가혹한 노동환경은 사실과 다르며, 1943~1945년 군함도에서 조선인 징용 노동자 122명이 사망했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도 틀렸다고 주장도 서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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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시마 탄광에서 일한 노동자와 그 가족 사진
“징용 노동자 수기 공개하겠다” 엉뚱한 뒷북
가토 센터장은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희생을 기리는 내용이 정보센터에 없다는 지적과 관련해서는 징용 노동자가 작성한 수기를 공개하겠다고 밝혔다. 수기의 내용을 묻자 ‘조선인 징용 노동자의 생활’에 관한 것이라고만 답하고 구체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군함도에서 일한 징용 노동자는 아니라고 했다.
필자가 ‘세계 최초로 산업혁명에 성공한 영국의 맨체스터 과학산업박물관에는 노동자들이 당시 겪은 고통을 보여주는 전시물이 있는데, 정보센터에는 그런 것이 없다’고 지적하자, 가토 센터장은 대형 화면을 통해 노동자와 그 가족들의 생활상이 담긴 사진 자료를 보여줬다. 그러나 사진 속의 일상생활은 사토 일본대사도 인정한 ‘가혹한 노동조건’과는 거리가 있었다. 하시마 도민회 관계자는 사토 대사가 “조선인이 가혹한 조건에서 강제 노역했다”고 발언한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 잘못 얘기한 것”이라는 취지로 반박했다.
관련 서적을 모아놓은 정보센터 서가에는 이영훈 씨 등이 집필한 <반일 종족주의> 일본어판이 꽂혀 있었다. 필자가 이 책을 비치한 이유를 묻자 “일본 측과 같은 입장이기 때문”이라고 도민회 관계자는 설명했다. 책장에는 수백 권의 서적이 배치돼 있었다. 일본의 시민단체인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모임’이 편찬한 <군함도에 귀를 기울이면>이라는 피해자 증언집도 있었다.
글 김호준 <연합뉴스> 도쿄특파원
사진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일본 세계유산 등재 전후 이렇게 말 바꿨다
• 2015년 7월: 세계유산 등재 결정 당시 일본의 약속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는 결정문에서 일본 근대산업시설 23개소(23개 시설 중 하시마(군함도) 탄광, 미이케 탄광, 다카시마 탄광, 야하타 제철소, 미쓰비시 조선소 내 3개 시설 등 7개 시설에서 한국인 등 강제 노역 피해 발생)의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고,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이해 할 수 있는 ‘해석 전략’을 마련할 것을 권고했다.
유네스코 일본 대표는 당시 세계유산위원회 권고를 성실히 이행하기 위해 ▲1940년대 일부 시설에서 수많은 한국인 등이 본인 의사에 반해 동원되어 가혹한 조건 아래서 강제 노역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정보센터 설치와 같은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적절한 조치를 해석 전략에 포함시키겠다고 발언했다. 이에 따라 세계유산위원회는‘세계유산위원회가 각 시설의 전체 역사를 이해할 수 있는 해석 전략과 관련해 일본 대표의 발언을 주목한다’는 각주를 명기해 일본 정부의 약속을 결정문의 일부에 포함했다.
• 2017년 12월: 세계유산위원회에 이행경과보고서 제출
일본은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권고 이행 상황 점검을 위한 보고서를 제출하였으나 보고서 내용은 2015년 등재 당시 일본 대표의 발언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 2018년 6월: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 보고서 점검 후 결정문 채택
일본이 제출한 ‘이행경과보고서’를 점검한 세계유산위원회는 결정문에서 ▲일본 대표의 발언을 포함한 2015년도 결정문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요구하고 ▲관련 당사국과 지속적인 대화를 권장하면서 ▲전체 역사 해석에 있어서 다양한 국제 모범 사례를 고려할 것을 강력히 독려했다.
• 2019년 12월: 일본 세계유산위원회에 이행경과보고서 제출
일본은 제42차 세계유산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다시 한 번 이행경과보고서를 제출하였으나 이 보고서 역시 2015년 등재 당시 일본이 약속한 후속조치 이행 내용을 포함하지 않았다. 또한 세계유산위원회의 당사국과 대화 권고를 일본 내 이해당사자로 제한적으로 해석해 주요 당사국인 한국을 대화 상대에서 배제했다.
• 2020년 6월 15일: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일반 공개
일본 정부가 6월 15일 일반에 공개한 도쿄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 내용을 보면, 2015년 7월 세계유산 등재 당시 세계유산위원회의 권고 및 일본이 약속한 후속조치를 이행하지 않았다.
강민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