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유럽은 대항해 시대를 맞았습니다. 많은 모험가들은 아프리카, 아시아로 항해하며 유럽 사람들이 원하는 물자를 수입했고 항해에 성공하면 막대한 재산을 손에 쥘 수 있었습니다. 모험 선단을 꾸리는 일은 매우 위험이 컸습니다. 배와 선원을 모집하는 데 많은 돈이 필요하고 성공할지 여부도 불투명했습니다. 이런 모험 자본을 모으기 위해 주식회사가 만들어졌습니다. 회사는 지분을 잘게 쪼개 증권을 만들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자본을 모으면 규모도 크고 위험도 분산됩니다. 이들은 주주가 되어 무역 선단이 돌아왔을 때 배당받을 권리를 가졌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직접 경영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주들은 자신의 투자금을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지를 확인할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선원이나 경영자들이 몰래 투자금을 빼돌릴 수 있다고 하면 자본이 모이지 않습니다. 경영자는 스스로의 투명성을 투자자들에게 입증해야 하고 투자자는 투자금이 잘 사용되고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상호 거래의 투명성을 높여줄 각종 제도는 근대에 와서 상법, 공정거래법, 금융관계법 등으로 체계화됐습니다.
‘공정경제 3법’은 왜 추진되고 있는가
한국 기업 생태계에서 금융자본인 투자자와 산업자본인 경영자 사이의 신뢰가 높지 않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국가 산업정책을 기반으로 성장했습니다. 산업자본은 민간 자본보다는 정부의 정책자금을 통해 성장했고, 그렇게 축적된 자산을 계열사들이 공유하며 더 큰 규모의 사업에 투자했습니다. 그러면서 재벌이라는 체제가 만들어졌습니다. 국가 전체의 자본 축적이 부족하던 시절 재벌 체제는 높은 효율성을 보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 주주의 존재감은 미미했습니다.
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민간 자본이 쌓이면서 자금 조달의 방식도 달라졌습니다. 정부는 시장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초기 시장에 개입하고, 일반 기업은 규모가 더 크고 유연한 민간 자본을 통해 자금을 조달합니다. 하지만 대기업 집단은 민간 금융자본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습니다. 제도가 있긴 하지만 실질적으로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불법 경영승계와 일감 몰아주기, 금융자산의 유용 등 대주주가 회사 자금으로 사익을 편취하는 행위는 공공연하게 이뤄졌습니다.
성숙하지 못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관계는 자본시장의 발전과 제도적 변화, 기업의 글로벌화로 상당히 많이 개선됐습니다. 그럼에도 산업자본 중심의 기업 지배구조에는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공정경제 3법’은 그동안 제도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부분을 개선하기 위해 추진되고 있습니다. 20대 국회에서 발의가 됐지만 국회를 통과하지는 못했습니다. 공정경제 3법은 공정거래법 전부개정안과 상법 개정안, 금융그룹의 감독에 관한 법률 제정안입니다.
경영자 악용제도 개선한 상법 개정안
공정거래법 개정안에는 일감 몰아주기 규제 사각지대로 지적된 부분을 보완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대주주 지분율이 30% 이상 되는 기업에 일감 몰아주기를 하면 안 된다고 규정하자 대주주 경영진은 지분율을 29%로 낮추며 법망을 피해갔습니다. 그래서 1%를 낮추는 꼼수가 생기지 않도록 대주주 지분율 기준을 상장, 비상장 모두 20% 이상으로 강화했습니다. 이에 따라 규제 대상기업은 210개에서 591개로 늘어납니다. 그만큼 투자자들의 몫을 대주주가 개인적으로 편취하는 일이 줄어들게 됩니다.
또 대주주가 회사 자산을 자신이 사실상 지배하고 있는 공익법인에 보내는 행위도 제한됩니다. 승계 목적으로 악용한다는 의혹이 있는 대기업 집단 계열 공익법인의 의결권 행사는 원칙적으로 금지됩니다. 공정거래위원회가 아니면 누구도 불공정 행위를 고발할 수 없는 전속고발제 폐지, 법 위반 과징금 2배 상향 등 공정거래의 예방 및 적발 가능성을 높이는 내용도 담겼습니다.
상법 개정안에도 최대주주, 경영자가 악용했던 제도를 개선하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예를 들어 감사위원회 위원 분리 선출 제도가 있습니다. 주주는 이사를 선임하고, 이사는 이사회를 통해 경영진을 선임합니다. 특히 감사는 이사회의 일원으로 경영 상황을 감시하고, 위법성이 확인된 경우 고발을 하는 기업 내 파수꾼 역할을 수행합니다. 하지만 최대주주 경영진이 감사를 골라서 선임하면 견제 역할이 매우 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상법은 감사 선임에 한해 대주주의 의결권을 3%로 제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회피하기 위해 대주주 경영진이 감사를 선임하는 대신 감사위원회를 만들어 이사 중 1명을 감사위원으로 임명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개정안은 감사든 감사위원이든 이사회에서 감시의 역할을 책임지고 수행할 이사를 선임할 때 의결권을 3%로 제한하는 안을 담았습니다. 정상적으로 감사를 선임했다면 개정할 필요가 없었겠지만, 감사위원회를 편법 수단으로 활용한 탓입니다.
금융감독 사각지대 없애는 금융그룹 감독법
다중대표소송제 역시 대주주 경영진이 주주 이익을 훼손할 경우를 방지하기 위한 장치입니다. 다중대표소송제는 모회사의 소수 주주가 자회사의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는 제도입니다. 통상 자회사가 불법행위를 저질러 모회사에 피해를 끼칠 경우 모회사는 의결권 등을 행사해 견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회사의 불법행위를 모회사 대주주 경영진이 조장한 경우 눈감아줄 여지가 있습니다. 자회사가 모회사 대주주 또는 그 자녀의 것일 때 발생합니다. 그래서 자회사를 모회사의 주주가 견제할 필요가 생긴 것입니다. 상법 개정안은 진보, 보수를 막론하고 대주주의 전횡을 방지해야 한다는 시대적 흐름에서 나왔습니다. 2013년 박근혜정부 당시 법무부가 만든 상법 개정안에도 이 같은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금융그룹 감독법은 금융자산이 매우 크지만 금융지주회사가 아니어서 금융감독의 사각지대에 놓인 비지주 금융그룹에 대한 감독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신한, KB국민, 하나금융 등 금융지주사들은 금융지주회사법을 통해 그룹 전반에 대한 금융감독을 시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금융지주가 아닌 금융그룹, 예를 들어 교보, 미래에셋, 삼성, 현대차 등 비지주 금융그룹은 규제의 사각지대에 있습니다. 금융그룹 감독법은 지주회사가 아니어도 대표회사로 선정된 금융회사를 중심으로 위험관리 정책을 마련하고 위험관리 기구를 운영하게 됩니다. 또 금융자본을 중복 이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금융그룹 수준에서 자본 적정성을 점검합니다.
기업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는 왜 필요한가
한국 주요 기업들은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할 만큼 규모가 커졌습니다. 미래의 상황(비전)과 능력을 가진 기업가에게 충분한 자본을 뒷받침해줄 때 세계를 무대로 한 기업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2019년 1조 원 넘는 적자를 기록한 미국의 전기차 회사 테슬라는 유상증자를 통해 20억 달러, 우리 돈 약 2조 3000억 원을 조달하기로 했습니다. 막대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것은 최고경영자(CEO)인 일론 머스크가 보여주는 비전과 성과도 있겠지만 투자자들의 자금이 기업 성장을 위해 적절히 운영되리라는 믿음이 근간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존이 20년 동안 배당 한번 하지 않아도 투자자들이 경영진을 신뢰하는 이유는 경영진이 적절히 자본을 투자해 기업을 성장시키고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 강화는 대주주 경영진의 의사결정을 방해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경영진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더 많은 자본을 기업으로 끌어들이고 더 큰 사업(비즈니스)을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사익 편취나 불법행위가 발생하는 것을 눈감아주길 바란다면, 그것은 용납되기 힘듭니다. 남의 돈을 그냥 자기 주머니에 챙길 수 없고, 주주에게서 위임받은 경영권을 사익 추구를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까지 용납받으며 사업을 하고 싶다면 자기 돈으로 자기 사업 하는 개인사업자로 남아야 합니다.
권순우 <머니투데이방송>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