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가 2019년 12월 24일 중국 청두 세기성 샹그릴라호텔에서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12월 24일 중국 청두에서 열린 한일 정상회담에서 강제징용과 수출규제 등 핵심 갈등 현안을 놓고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그러나 2018년 9월 이후 1년 3개월 만에 성사된 정상회담에서 두 정상이 관계복원의 필요성을 공감하면서 갈등 해소를 위해 대화를 계속하자고 의견일치를 본 것은 큰 성과로 꼽힌다. 앞으로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을 둘러싼 현안은 외교채널을 통해, 일본의 수출규제로 불거진 통상 갈등은 수출 당국 간 정책대화를 통해 협의가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2019년 7월 이전” vs 일본 “2018년 10월 이전”
문 대통령은 이번 정상회담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해 “일본이 취한 조치가 2019년 7월 1일 이전 수준으로 조속히 회복되어야 한다”면서 아베 총리의 관심과 결단을 당부했다고 청와대는 전했다. 한일관계 악화가 일본의 수출규제에서 비롯된 것이니 일본이 원상복귀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요구였다.
이에 반해 아베 총리는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징용 문제와 관련해 “한국의 책임으로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 일한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리는 계기를 한국 측이 만들도록 (문 대통령에게) 요구했다”고 밝혔다. 한일관계 악화의 근원을 2018년 10월 우리 대법원의 일본 기업에 대한 징용 배상 판결로 보고 이에 대한 해결책을 요구한 것이다.
간단히 얘기하면 우리는 2019년 7월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것이고, 일본은 2018년 10월 이전으로 복귀해야 관계 복원이 가능하다는 입장인 셈이다. 일본의 수출규제는 우리 대법원의 징용 판결에 대한 사실상의 보복조치라는 점에서 징용 판결과 수출규제는 연계돼 있다. 아울러 우리 정부는 2019년 8월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를 선언했다가 10월에 일본의 수출규제 철회를 조건으로 종료를 일시 유예했다. 따라서 징용 판결과 수출규제, 지소미아 등 한일 갈등 3대 현안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 있어 실타래를 풀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강제징용 갈등 핵심 현안… 해결책 마련까진 시간 필요
징용 문제는 양국 간 견해차가 가장 큰 이슈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정상회담 후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 양 정상은 서로의 입장차를 확인했지만,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의 필요성에 공감대를 이뤘다”고 밝혔다. 우리 정부는 사법부의 판단에 행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입장이나, 일본은 우리 정부가 책임을 지고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상황이다.
우리 정부는 2019년 6월 한일 양국 기업의 자발적인 갹출금으로 재원을 조성해 징용 피해자에게 지급하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일본 정부는 국제법 위반이라며 거부한 바 있다. 일본은 징용 배상은 1965년에 체결된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끝난 문제로 우리 대법원의 배상 판결은 국제 위반이라는 입장을 고집하고 있다. 아베 총리가 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국교정상화의 기초가 된 일한기본조약, 일한청구권협정이 지켜지지 않으면 나라와 나라의 관계는 성립하지 않는다”면서 국가 간 약속 준수를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는 한일 청구권 협정으로 징용 피해자 개인의 배상 청구권까지 소멸한 것은 아니라는 입장으로 맞서고 있다. 게다가 사법부의 판단에 행정부가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정부의 일관된 입장이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문 대통령이 강제징용 문제와 관련해서는 ‘대법원 판결에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하고도 강하게 설명했다”고 밝혔다. 양국은 강제징용 판결 관련 입장차를 확인한 만큼 외교당국 간 소통과 협의를 계속하기로 했으나 해결책이 마련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한일 정상회담에서 발언하고 있다.│청와대사진기자단
수출규제 이견 여전하지만 “대화로 풀자”
징용 문제와 동전의 양면인 수출규제 문제는 이견이 존재했지만 양국 정상은 “대화로 풀자”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앞서 일본은 2019년 7월 4일 불화수소,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등 반도체·디스플레이 핵심 소재 3개 품목의 대 한국 수출규제를 단행했다.
한일 통상당국은 2019년 12월 16일 일본 도쿄에서 3년 6개월 만에 열린 제7차 수출관리 정책대화에서 양국 모두 진정성 있는 대화를 나눴다고 밝혀 한일 정상회담에서 보다 진전된 내용이 나오리라는 기대가 생겼다. 또 한일 정상회담을 닷새 앞두고 일본이 규제 대상 3개 품목 중 포토레지스트의 수출규제를 소폭 완화하는 등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이면서 이 같은 기대는 더욱 커졌다. 문 대통령은 정상회담에서 “일본이 취한 조치가 2019년 7월 1일 이전 수준으로 조속히 회복돼야 한다”면서 아베 총리의 관심과 결단을 당부했다. 이에 아베 총리는 문 대통령의 수출규제 철회 요구에 안전보장의 관점에서 규제를 강화한 것이라는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그러나 한일 양국 간 수출규제를 둘러싼 의견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화를 통해 해결하자는 원칙에 두 정상이 합의한 것은 성과로 꼽힌다. 아베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수출관리 정책 대화가 유익하게 진행됐다고 들었다”며 “수출 당국 간 대화를 통해 문제 풀어나가자”고 말했다. 이에 문 대통령은 "“실무협의가 원활하고 속도감 있게 진행되도록 함께 독려하자”면서 “이번 만남이 양국 국민에게 대화를 통해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희망을 주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일 통상당국은 조만간 서울에서 제8차 수출관리 정책대화를 개최할 예정이다.
일본 기업 자산 현금화 여부가 지소미아 변수
한일 정상이 대화를 통한 양국 현안 해결 의지를 확인하면서 ‘조건부 연장’ 상태인 지소미아도 일단 시간을 벌게 됐다. 두 정상이 특히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를 대화를 통해 해결하자는데 공감대를 형성한 만큼 수출규제 문제와 맞물려 있는 지소미아도 최종 연장 결정을 위한 동력(모멘텀)이 마련될지에 관심이 쏠린다.
그러나 양국 갈등의 근본 원인인 강제징용에 대한 입장차가 여전하고 이르면 2020년 2∼3월로 예상되는 강제징용 배상 관련 일본 기업 자산 현금화 조치 등이 변수로 작용할 수 있어 지소미아의 향방을 예단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양국이 앞으로 수출규제 문제 실무 협의에서 진전을 본다면 지소미아 연장 문제도 자연스레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일본의 수출규제를 촉발한 대법원의 강제징용 배상 판결 이후 양국이 여전히 강제징용 배상 해법에서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어 수출규제와 지소미아도 단시일 내 결론이 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아베 총리는 정상회담 때 징용 소송 관련 “압류된 일본 기업 자산이 현금화되는 사태는 피해야 한다”고 문 대통령에게 호소했다고 일본 언론들은 전했다.
일본 기업 자산의 현금화 조치가 이뤄지면 일본이 추가 보복조치에 나서 한일관계가 지금보다 더 악화할 가능성도 있다.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은 2019년 12월 10일 일본의 월간지 <문예춘추>와 인터뷰에서 “만에 하나 한국 측이 징용공(강제징용) 판결로 압류 중인 (일본) 민간 기업 자산의 현금화를 실행하면, 이쪽으로서는 심각한 예를 든다면 한국과의 무역을 재검토하거나 금융제재에 착수하는 등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며 협박성 발언을 하기도 했다.
정부 관계자는 지소미아와 관련해 “(조건부 연장 상태가) 무작정 계속 길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라며 “어느 정도 기한 안에는 이 문제가 풀려야 된다는 것에 대해선 양국도 다 인지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김호준 <연합뉴스> 도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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