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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 12일 중국선전의 스타트업 어우보스 사무실에서 후디에 대표가 모니터가 내장된 AI 스피커 ‘AI 박스’를 시연하고 있다.
‘QR코드의 도시’ 중국 선전을 가다
2017년 2월 중국 언론들은 인공지능(AI) 기반의 얼굴인식 기술로 허난성에서 사기범들을 검거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거리를 비추던 폐쇄회로 텔레비전(CCTV)이 보행자의 얼굴과 용의자 사진이 일치한다고 판독한 덕분이었다. 용의자를 추적한 경찰은 2000만 위안(당시 한화 약 36억 원) 상당의 사기 사건을 벌인 일당을 일망타진할 수 있었다. 허난성 공안부가 번카이안추엔사의 얼굴인식 시스템을 시범 설치한 지 한 달도 안 돼 거둔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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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에만 여덟 곳의 지점이 있는 무인 마트 ‘허마셴셩’ 입구. 마트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계산대 없이 입구가 뻥 뚫려 있다.
전통적 보안 업무에 AI 기술 접목
2019년 12월 12일 광둥성 선전시에 있는 번카이안추엔 본사를 방문하자 입구에 각종 카메라와 함께 ‘007 가방’ 모양의 검은색 가방이 전시돼 있었다. 가방을 열자 노트북처럼 모니터와 자판이 나왔다. 번카이안추엔 리차오양 이사는 “최근 중국 공안부에 납품한 이동식 얼굴인식 시스템”이라며 “설치에 상당한 시간과 비용이 든 기존 제품과 달리 유동인구가 일시적으로 늘어나는 전시회나 행사장에 놓고 카메라와 연결하면 바로 사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2007년 보안회사로 시작한 번카이안추엔은 2015년부터 전통적 보안 업무에 AI 기술을 접목하기 시작했다. 당시 새롭게 떠오르던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등 AI 기술에서 정체된 보안 사업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것이다. 선전시의 개발비 지원이 연구개발(R&D)에 큰 도움이 됐다. 단계별 연구개발 계획을 제출하면 선전시는 제품이 국가에 도움이 되는지 심사해 지원 여부를 결정한다. 심사를 통과해도 계획대로 진행해야 단계마다 개발비를 지원받을 수 있다. 얼굴뿐 아니라 지문, 정맥, 홍채 등 다양한 생체인식 기술을 개발한 번카이안추엔은 ‘얼굴인식 순찰 로봇’ ‘주차장 무인 관리 로봇’ 등 다양한 응용 제품을 공항·빌딩 등에 납품했다. 번카이안추엔은 중국 대표 정보통신기술(ICT) 회사인 화웨이의 스마트시티 프로젝트에도 참여하고 있다. 공공안전 부문을 맡아 최근 입주한 아파트에 ‘얼굴인식 출입 관리 시스템’을 설치했다. 리 이사는 “얼굴인식 인터폰과 도어록을 아파트에 설치하면 출입하는 입주자도 편리하지만, 오가는 사람들을 관리하며 빅데이터를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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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마셴셩의 간이 판매대에서는 현금이나 신용카드로는 결제할 수 없고 오직 간편결제 앱으로 결제 할 수 있다.
AI 기반의 소프트웨어(알고리즘) 기술만 가지고 있는 번카이안추엔이 다양한 하드웨어 제품을 출시할 수 있었던 건 선전의 제조 생태계 덕분이었다.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 정준규 선전무역관장은 “선전은 ICT 기간산업이 잘 갖춰져 있고 화웨이, 텐센트 등 대표적인 ICT 기업이 많아 AI를 응용한 신제품을 중국에서 가장 빨리 확인할 수 있는 지역”이라며 “베이징이 국영 연구소들을 중심으로 R&D 교류가 활발하다면, 부품과 정보가 공존하는 선전은 제품 시연의 장이자 시장의 풍향계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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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마셴셩의 모든 상품에는 QR코드가 있어 간편결제 앱으로 원산지, 생산자, 각종 검사결과 등을 볼 수 있다.
중국판 실리콘밸리 ‘화창베이’의 무인 가게
특히 선전 도심에 있는 세계 최대의 전자상가인 화창베이(華强北)는 베이징 중관춘(中關村)과 함께 ‘중국판 실리콘밸리’로 불리는 곳이다. 2019년 12월 11일 방문한 화창베이는 용산 전자상가의 20배에 이르는 지역에 수많은 소재·부품·장비 매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작 기자의 관심을 끈 곳은 상가 곳곳에 있는 무인 가게였다. 냉장고만 여러 대 놓여 있는 작은 가게에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냉장고 문은 아무리 힘을 줘도 열리지 않았다. 휴대전화에서 알리페이나 위챗페이 같은 간편결제 앱을 실행해 문에 붙어 있는 QR코드를 찍어야 열렸다. 마시고 싶은 음료수를 꺼낸 뒤 문을 닫자 음료수값이 간편결제 앱에서 자동 결제됐다.
선전에는 무인 가게뿐 아니라 무인 마트도 성업 중이다. 선전에만 여덟 곳의 지점이 있는 ‘허마셴셩’에 들어가자 마트라면 당연히 있어야 할 계산대 없이 입구가 뻥 뚫려 있었다. 대신 ‘셀프 계산대’를 뜻하는 ‘쯔주서우인(self service)이라고 적힌 곳에 여러 대의 간이 판매대(키오스크)가 있었는데, 현금이나 신용카드로는 결제할 수 없고 오직 간편결제 앱으로 결제할 수 있었다. 모든 상품에는 QR코드가 있어 간편결제 앱으로 찍으면 원산지, 생산자, 각종 검사 결과 등 상세한 정보를 볼 수 있었다. 선전에 사는 중국 재외국민 박옥희 씨는 “어떤 단계를 거쳐 여기까지 왔는지 유통과정을 다 알 수 있고, 생산업체와 유통업체의 사업자 등록증까지 볼 수 있어 믿음이 간다. 다른 곳보다 가격이 조금 비싸지만 이곳을 자주 이용한다”고 했다.
선전에는 ‘구걸하는 걸인도 현금은 안 받는다’는 우스개가 있을 정도로 간편결제 앱이 보편화되어 있다. 박 씨는 “현금을 안 갖고 다닌 지 2년 정도 됐다”며 “시중에 현금이 돌지 않다 보니 8월 말부터 발행된 새 지폐를 가짜 돈으로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전했다. 얼마 전 한국에서 온 손님이 환전해서 가져온 위안화 지폐를 가게에 냈는데, 신권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직원이 위폐인 줄 알고 신고하려 한 것이다. 몇 달 전 나온 신권이라고 설명하자 다른 직원들도 몰려와 “새 지폐는 오늘 처음 본다”며 신기하게 쳐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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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 번카이안추엔 본사에서 리차오양 이사가 ‘이동식 얼굴인식 시스템’과 ‘얼굴인식 출입 관리 시스템’을 소개하고 있다.
AI 발전의 원천이 된 간편결제 빅데이터
14억 중국인이 간편결제를 사용하며 축적하는 빅데이터는 중국 AI 발전의 원천이 되고 있다. 데이터를 통한 반복적인 탐색과 학습을 통해 스스로 발전시키는 AI 기술에서 빅데이터는 기술 수준을 좌우하는 핵심 인프라다. 알리페이와 위챗페이는 중국 시중은행에 계좌를 개설해야 이용할 수 있는데, 11월부터 알리페이가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투어패스 서비스를 시작했다. 중국 현지 취재에 앞서 투어패스에 미리 가입한 기자가 한국에서 시험 삼아 결제하자 갑자기 계정이 사용할 수 없게 됐다. 알리페이 고객센터에 문의하자 중국 밖에서 결제한 것을 감지한 AI가 해킹 등 부정 사용으로 의심해 거래를 중지시켰다는 설명을 들었다. 신분증 등 각종 서류를 제출하자 계정은 다시 정상화됐다. 선전에 머문 3박 4일 동안 지하철·택시·식당·마트·상점 등에서 현금 한푼 쓰지 않고 알리페이 투어패스로만 결제했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이처럼 선전에 새로운 기술과 문화가 빠르게 자리 잡은 배경에는 인구 평균 나이가 33세에 그칠 정도로 젊은 도시라는 점도 작용한다. 2019년 12월 12일 방문한 스타트업 어우보스(?博思)의 후디에 대표도 33세였다. 중국의 유명 AI 로봇 회사인 유비텍에 근무하다 2018년 회사를 설립해 2019년 8월 AI 스피커인 ‘AI 박스’를 출시했다. 후 대표는 “샤오어, 샤오어, 음식을 배달시켜줘”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원통 모양의 AI 박스 화면에 등장한 AI 캐릭터 ‘샤오어’는 배달이 가능한 근처 식당을 평점이 높은 순서대로 보여주면서 음식과 가격을 자연스러운 음성으로 읽어줬다.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식당과 음식 이름을 말하자 화면에 QR코드가 나타났다. 간편결제 앱으로 QR코드를 찍자 주문이 완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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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장고 문에 붙어있는 QR코드를 간편결제 앱으로 찍어야 문이 열린다.
지방정부의 적극적인 지원도 큰 힘
어우보스는 AI 박스 공급을 놓고 중국뿐 아니라 SKT, KT, LG유플러스 등 한국의 이동통신업체와 논의하고 있다. 그는 “기존 AI 스피커가 수십 달러에 불과한데 AI 박스 스탠더드는 400달러, 미니는 200달러로 훨씬 비싸 한국 업체들이 난색을 표한다”며 “AI 스피커의 음성 인식률은 이미 한계에 이른 상태라 더는 획기적인 제품이 나오기 힘들다. 음성에 시각 효과까지 더한 AI 스피커가 앞으로 트렌드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어우보스는 얼굴인식 빅데이터를 활용해 사람처럼 다양한 감정을 담은 AI 캐릭터의 표정을 구현했다. 사진을 입력하면 자신을 닮은 AI 캐릭터를 만들 수 있다. 앞으로 텔레비전, 전광판 등 다양한 디스플레이 장치에 AI 캐릭터를 활용하는 기술도 개발하고 있다.
후 대표는 “어우보스는 AI 스피커를 만드는 제조업체가 아니라 AI 캐릭터를 만드는 소프트웨어 회사”라며 “하드웨어는 다른 제조업체에 맡기고, 우리는 AI 기술 개발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게 선전의 장점”이라고 말했다. 대규모 공장은 드물지만 각종 칩 제조공장, 금형공장, 조립공장 등 소재·부품·장비 업체들과 하드웨어·소프트웨어 분야의 젊은 인재가 많기 때문이다.
설립 2년 안에 ‘하이테크 기업’으로 인증받으면 사업비 대출 등 지방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점도 큰 힘이 된다. 어우보스는 조만간 공항 근처에 새로 조성된 자유무역특구로 이전할 계획이다. 변두리 원룸 월세가 100만 원을 넘을 정도로 부동산 가격이 비싼 선전에서 사무실 임대료 50% 할인, 직원 무료 숙소 지원 등 파격적 혜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후 대표는 “베이징이나 상하이를 가봐도 선전만큼 제조 생태계가 잘 형성된 도시는 없다. 그래서 선전이 중국뿐 아니라 ‘세계의 공장’으로 불리는 게 아닐까”라고 말했다.
글·사진 강민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