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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함도’로 알려진 일본 나가사키 앞바다의 섬 하시마. 1940년대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이 석탄 채굴에 동원됐다가 100명이상이 숨진 곳이다.│한겨레
일본 정부가 조선인들이 강제 노역했던 나가사키현 하시마(군함도)를 포함한 ‘메이지 시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면서 희생자들을 기리는 산업유산정보센터(군함도 전시관) 설치에 대한 약속을 어기고, 오히려 강제동원 역사를 왜곡하는 전시를 시작했다.
하시마를 비롯해 일본 정부가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이라고 밝힌 시설은 메이지 시대(1868~1912년)에 건설된 탄광·제철소들이다. 이곳엔 조선인들이 가혹한 노동을 강요당한 아픈 역사가 담겨 있다. 후쿠오카현 야하타 제철소와 미이케 탄광에는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있었고, 미쓰비시중공업 나가사키 조선소에 동원됐던 조선인들은 원자폭탄 투하로 피폭을 당한 경우도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하시마를 포함해 23곳의 탄광·제철소를 메이지 시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이라며 유네스코에 세계유산 등재 신청을 냈고, 2015년 등재에 성공했다. 한국 정부가 등재 과정에서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에는 조선인이 강제 노동을 당한 시설이 다수 포함됐다는 사실을 지적하자, 일본 정부는 당시 등재 심의에서 “(하시마 등 일부 산업시설에서) 과거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강제 노역’한 일이 있었다”며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정보센터 설치 등의 조처를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일본이 6월 15일 공개한 메이지 산업유산정보센터는 일본의 근대 산업화 성과를 내세우는 내용이 대부분이고 희생자들을 기리는 내용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조선인들이 하시마에서 ‘좋은 환경에서 생활했다’ 식의 증언을 영상으로 보여주며 역사를 왜곡했다.
“조선인 좋은 환경에서 생활” 역사 왜곡
도쿄 신주쿠구에 위치한 산업유산정보센터 입구에는 일본이 2015년 메이지 일본 산업혁명 유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기까지 연혁이 적혀 있다. 연혁 맨 아래에는 당시 유네스코 회의에서 일본 정부 대표가 발언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하시마 등 일부 산업시설에서) 과거 1940년대 한국인 등이 ‘자기 의사에 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 아래서 ‘강제 노역’한 일이 있었다. 희생자를 기리기 위해 정보센터 설치 등과 같은 조처를 하겠다.”
하지만 산업유산정보센터에선 이 문구 외에 일본 정부가 약속했던 희생자를 기리기 위한 조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산업유산정보센터 어느 곳에도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 사실이 명확하게 기술돼 있지 않았다. 되레 조선인이 하시마에서 좋은 환경에서 생활했다는 식의 역사 왜곡을 부추기는 전시가 대부분이었다. ‘태평양전쟁 시기 하시마에서 살았다’는 재일동포 2세 스즈키 후미오의 생전 증언 등을 담은 영상이 대표적이다. 그는 영상에서 “조선인이 채찍으로 맞았느냐”는 질문에 “일을 해야 하는데 왜 때리느냐”고 답했다.
한국 정부의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지원위원회’ 조사에 따르면 하시마에서는 노동환경이 열악해 탈출을 시도하다 익사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생존자 증언이 존재하지만, 산업유산정보센터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되지 않았다.
일본 정부는 세계유산 등재 뒤 유네스코에 두 차례 이행상황 보고서인 ‘보전상황 보고서’를 제출했다. 2017년 첫 보고서에서는 2015년 등재 신청 당시 약속과는 달리 강제노동 등의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반도 출신자가 일본 산업현장을 지원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도록 전시를 하겠다”고 했다. 유네스코가 2018년 7월 바레인 회의에서 “전체 역사 해석에 있어 국제 모범사례를 참고하라”고 권고했으나, 2019년 제출한 두 번째 보고서에서는 조선인 강제노동 피해자에 대한 언급 자체를 삭제했다.
정부, 유네스코에 등재 취소 검토 요청
일본 언론조차 일본 정부의 이 같은 태도에 대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내놨다. <교도통신>은 익명의 일본 정부 관계자 말을 인용해, 일본 정부가 이번 전시를 통해 일본 식민지 지배 당시 하시마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이 비인도적 취급을 받았다는 그동안 정설을 ‘자학 사관’으로 보고 반론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전했다. 통신은 “과거 사실을 은폐하고 ‘역사 수정주의’를 조장한다는 비판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외교부는 도미타 고지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강력히 항의하는 한편, 성명을 내 “일본은 세계유산 등재 당시 한국과 국제사회에 약속한 내용을 성실히 이행하라”고 엄중히 촉구했다. 또 일본이 하시마 관련 왜곡된 내용의 전시물을 산업유산정보센터에 전시한 사실과 관련해 6월 22일 유네스코에 ‘일본 근대 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취소’를 검토해달라고 요청했다.
김인철 외교부 대변인은 6월 23일 브리핑에서 전날인 22일 강경화 외교부 장관 명의로 이런 내용을 담은 서한을 유네스코 사무총장 앞으로 보냈다고 밝혔다. 김 대변인은 “(서한에서 일본 근대 산업시설의 세계유산) 등재 취소 가능성을 포함해 여러 가지 사항을 검토할 것을 요청했다”며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일본에 충실한 후속조치 이행을 촉구하는 결정문이 채택될 수 있도록 적극적인 협조와 지지를 요청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부는 세계유산위원국을 대상으로 이 사안에 대한 관심과 이해 제고를 위한 외교적 노력을 지속적으로 전개해나갈 예정”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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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에 공개된 도쿄 신주쿠 산업유산정보센터 누리집 갈무리. 센터는 군함도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는 증언을 소개하는 등 역사 왜곡 논란을 빚고 있다.
한일 전문가들, 일본 정부에 약속 준수 촉구
이와 관련해 한국과 일본의 전문가들은 6월 19일 동북아역사재단 한일역사문제연구소 주최로 열린 ‘일본 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 내용 검토 및 대응방안 모색’ 토론회에서 “왜곡된 역사 전시로 논란이 일고 있는 산업유산정보센터와 관련해 일본 정부가 국제사회의 약속을 준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참석자들은 토론 세션에서 이 문제를 지나치게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다루기보다 국제사회의 참여와 동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대응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화상회의로 진행된 이날 토론회에는 고바야시 히사토모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간사를 비롯해 김민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전진성 유네스코한국위원회 과학문화본부 문화팀장, 나카타 미쓰노부 강제동원진상규명네트워크 사무국장 등 두 나라 전문가들이 참여했다.
고바야시 간사는 “일본 정부가 국제공약을 확실히 지키고 전시 내용을 개선하도록 요구할 필요가 있다”며 “산업유산정보센터가 일본의 역사 위·변조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산업유산정보센터를 운영하는 일본 재단법인 ‘산업유산국민회의’가 만든 보고서 내용을 소개하며 “피해자 측과 대화는 이뤄지지 않은 채 일본 정부의 일방적 견해만 기술해 모든 것을 끝내려 하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고 비판했다.
김현숙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정책실장은 “일본은 강제노역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을 기리기 위한 조치를 약속했으나 유감스럽게도 이번에 공개된 산업유산정보센터 전시에서는 이런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며 “외면한다고 역사적 사실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부채를 미래세대로 넘길 뿐”이라고 강조했다.
나카타 사무국장은 “산업유산정보센터의 전시 내용은 엉터리”라며 “국제사회와 약속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지만 일본 언론에서는 다뤄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잘못된 점에 대해 일본 정부에 직접 전달하는 등의 노력을 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