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3일 부산 강서구 부산신항 모습. 부산항 터미널 운영사들 집계에 따르면 4월 신항과 북항 9개 부두에서 처리한 환적 컨테이너는 97만 7000여 개로 전년 같은 기간과 비교해 1.8% 늘었다.│연합
정부는 4월 22일 5차 비상경제회의에서 기간산업의 위기와 고용 충격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40조 원 규모의 ‘위기 극복과 고용을 위한 기간산업안정기금’을 긴급 조성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국책은행인 산업은행에 기간산업안정기금을 설치할 근거를 마련하는 ‘한국산업은행법 시행령 개정안’이 발의된 지 6일 만인 4월 29일 국회를 통과했고, 5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됐습니다. 그동안 금융위원회는 정책금융기관, 시중은행, 금융협회와 만나 기간산업안정기금을 설명하고 전폭적인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산업은행에서도 기간산업안정기금 설립준비단이 발족해 5월 말부터 기간산업안정기금을 가동하기 위한 준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국회의 전례 없는 빠른 처리와 정부의 신속한 후속 조치는 기간산업의 위기와 고용 충격이 심각하고 그 대책이 시급함을 의미합니다.
“기간산업 지켜 대규모 실직 사태 막겠다”
코로나19 세계적 대유행으로 세계 경제는 100년 전 대공황과 비교되는, 그야말로 ‘전시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국제적 협력의 시대에서 미중 갈등이 다시 격화하는 등 자국 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한 무한경쟁 시대로 치닫고 있습니다. 수출 위주의 개방경제로 발전해온 한국으로서는 더욱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 일시적 자금 지원이나 유동성 공급만으로는 어려움을 극복하기 힘든 기업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한국 경제와 고용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기간산업이 크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기업의 위기와 함께 고용 한파도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통계청이 발표한 고용 동향을 보면 4월 한 달 동안 취업자 수는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47만 6000명 줄어 1999년 2월 이후 최대 감소폭을 기록했습니다. 유례없는 경제활동 위축에 따라 고용 충격이 빠르게 깊이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 본격적으로 다가올 글로벌 경기 침체로 인한 수출 부진과 기업 실적 악화 등 실물경제 충격까지 가세할 경우 기간산업마저 쓰러질 수 있습니다. 국가 산업의 토대가 되는 기간산업이 무너지면 해당 업종은 물론 전후방 산업이 타격을 입는 만큼, 기간산업을 지켜 대규모 실직 사태를 막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기간산업안정기금 조성에 담겨 있습니다.
출자 등 모든 기업 지원 방식 총동원
기간산업안정기금은 국민경제와 고용에 미치는 영향이 큰 기간산업 등에 대해 유동성, 자본력 보강 등을 지원하는 기금입니다. 정부가 조성하는 규모는 40조 원이지만, 민간자금과 공동투자를 통해 추가적인 지원도 가능합니다. 앞으로 5년 동안 한시적으로 운용할 기금의 재원은 국가보증 기금채권을 발행해 조달합니다.
민생의 근간인 일자리를 지켜내기 위해 정부는 지금까지 고용안정 특별대책과 기업안정화 지원방안 등 크게 두 가지 대책으로 대응해왔습니다. 선제적으로 고용 안정과 취약계층 지원 대책에 역점을 기울였고, 100조 원 이상의 금융 조치를 통해 기업을 살리고 일자리를 지키는 조처를 했습니다. 기간산업안정기금 조성을 계기로 기업안정화 지원방안은 국민경제와 고용에 미치는 영향 등을 고려해 기업 특성에 맞게 맞춤형으로 지원하게 됩니다. 코로나19 이전부터 부실이 발생한 기업은 주채권은행을 중심으로 통상의 구조조정 프로그램을 통해 경영 정상화를 추진합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일시적으로 유동성이 부족한 기업에 대해서는 기존 100조 원+α 지원 규모를 대폭 확대하고 비우량채 매입 프로그램 등을 신설합니다. 유동성 이외에 자본력 보강 같은 복합 지원이 필요한 기간산업 등에 대해서는 기간산업안정기금을 조성해 지원합니다.
특히 기간산업에는 일시적 유동성 지원을 넘어 출자를 비롯한 모든 기업 지원 방식을 총동원합니다. 대출, 보증 등 전통적 수단뿐 아니라 자산 매수, 우선주(상환전환우선주) 매입, 주식연계증권(전환사채·신주인수권부사채 포함) 등에 대한 출자, 특수목적기구(SPV)·펀드 지원, 민간과 공동투자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산업 특성, 개별 기업의 수요 등을 고려해 기금을 지원할 계획입니다. 또 자금지원 과정에서 기업 경영의 자율성을 충분히 보장합니다.
지원 기업에 고용유지·이익공유 등 조건 걸어
대신 기간산업을 지키는 데 국민의 세금을 투입하는 만큼, 지원받는 기업들에는 상응하는 의무가 부과됩니다. 정부는 미국, 독일 등 주요국의 사례를 참조해 고용 안정, 도덕적 해이 방지, 정상화 이익공유 등 세 가지 조건을 설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첫째, 지원을 받는 기업은 일정 기간 고용을 유지해야 하고, 고용 안정 등을 위해 노사가 고통 분담 방안을 마련해야 합니다. 고용 안정이 전제돼야 지원하겠다는 것입니다. 고용 총량 90%를 유지하는 것이 기본 가이드라인인데, 업종과 기업마다 상황이 다른 점을 고려해 고용유지 비율을 산업별로 가감할 예정입니다. 조건을 위반하면 가산금리 부과, 지원자금 감축·회수 등의 벌칙을 부과합니다. 둘째, 임직원의 보수 제한과 주주 배당 제한, 자사주 취득 금지 등 도덕적 해이를 막는 조처를 합니다. 지원자금을 고액연봉 지급에 써버리거나, 주주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배당을 늘리고 자사주를 매입할 수 없도록 지원자금 전액 상환 시까지 고액 연봉(퇴직금·성과급 등 포함)을 제한하고 배당·자사주 취득 등을 금지합니다. 셋째, 위기 이후 기업들이 정상 궤도로 돌아올 경우 국민과 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장치도 마련합니다. 예컨대, 지원자금의 일정 부분(15∼20%)은 주식연계증권이나 상환전환우선주 등 주식으로 전환될 수 있는 형태로 제공해 기업의 정상화 이익을 국민과 공유하겠다는 것입니다.
WTO 보조금 제소 우려에 항공·해운만 명시
정부는 4월 22일 기간산업안정기금의 지원 대상은 항공, 해운, 조선, 자동차, 일반기계, 전력, 통신 등 7대 기간산업이며 필요하면 고용과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해 대상을 확대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5월 12일 국무회의에서 통과한 한국산업은행법 시행령 개정안에는 지원 대상을 항공과 해운 두 곳만 명시했습니다. 정부가 특정 제조업 지원을 법령에 적시할 경우 세계무역기구(WTO)의 보조금 지급 관련 제소 위험(리스크)을 키울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세계무역기구의 ‘관세무역 일반협정(GATT)’에 따른 ‘보조금 및 상계조치에 관한 협정’을 보면, 정부의 대출과 대출보증 등의 지원이 명백히 특정 기업이나 산업에 흘러 들어가면 정부 보조금으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협정은 상품(제조업)에 국한돼 서비스업에 해당하는 항공과 해운 운송업 등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대신 애초에 지원 대상으로 꼽힌 조선·자동차·기계 등은 제조업에 속해 언제든 다른 회원국이 이로 인해 피해를 봤다며 세계무역기구에 제소할 우려가 있습니다. 2018년 11월과 2020년 2월에도 일본은 산업은행의 대우조선해양 금융지원과 현대중공업-대우조선해양 합병 과정에서 재정 지원을 각각 보조금 협정 위반이라 주장하며 세계무역기구에 한국 정부를 제소한 바 있습니다.
애초 정부 입법예고대로 7개 업종을 시행령에 담을 경우 세계무역기구 보조금 관련 제소 우려를 키울 수 있다고 판단한 정부는 구체적 지원대상 업종은 제조업이 아닌 항공·해운 2개 업종만 명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5월 12일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한국산업은행법 시행령에는 지원 대상에 항공과 해운 2개 업종만 열거하고, 다른 업종은 금융위원회가 소관 부처의 의견을 듣고 기획재정부와 협의해 지정했습니다. 다만 기간산업안정기금을 통한 제조업 지원이 전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른 국가의 보조금 때문에 자국 산업이 피해를 보았다는 것까지 입증해야 보조금 협정 위반이 되는데, 상대적으로 수출 경쟁력이 약한 업종에 대해서는 저촉될 가능성이 낮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시장 상황과 자금 수요를 봐가면서 관계부처와 협의해 다른 기간산업의 지원 시기를 조절할 계획입니다.
한국은 코로나19의 성공적 방역을 통해 안전한 생산기지로 부상하며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또 한 번 도약의 기회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국가 경제의 주춧돌인 기간산업의 국제적 경쟁력을 지키고 기업과 일자리, 협력업체 생태계를 유지하는 데 기간산업안정기금이 핵심 역할을 할 것으로 정부는 기대하고 있습니다.
원낙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