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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 씨가 아름다운재단 보호종료아동 자립지원 캠페인 ‘열여덟 어른’의 일환으로 관객과 만나는 연극 <열여덟 어른> 포스터 앞에서 자신이 만든 ‘김군자 블렌드’를 들고 포즈를 취했다.
아름다운재단 보호종료아동 지원 캠페인 참여 김준형 씨
만 18세가 되어 아동양육시설을 나와 자립해야 하는 이들이 있다. 세상은 이들을 ‘보호종료아동’이라 부른다. 준비되지 않은 자립 앞에서 이들은 혼란스러움과 막막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
김준형(26) 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장의 학비와 생활비 마련에 막막해하던 때 나눔의 손길이 그에게 다가왔다. 대학 등록금과 학업 생활 보조비를 지원해준 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군자 할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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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열린 정기 수요집회에서 김 씨가 김군자 블렌드 시음회를 준비하던 모습
“김군자 할머니는 내 삶의 든든한 버팀목”
아름다운재단 1호 기금인 ‘김군자 할머니 기금’. 17세 나이에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일본군에 끌려가 해방되기까지 3년간 고통 속에서 살았던 할머니는 평생 모은 돈 1억 원을 “가난하고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들의 교육비로 써달라”며 두 번에 걸쳐 기부했다. 할머니의 뜻을 담아 조성된 김군자 할머니 기금으로 256명(2017년 7월 기준)의 아동보호시설 퇴소 대학생들이 학비를 지원받았다. 김 씨는 그 장학생 가운데 한 명이다.
2017년 세상을 떠난 김 할머니는 살아생전 김 씨에게 용기와 나눔 그리고 실천의 의미를 일깨워준, ‘외할머니’와도 같은 존재였다.
“누구보다 일찍 어른이 돼야 했던 저한테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셨죠. 평소 관심은 많았지만 경제적인 부담 탓에 참여가 쉽지 않던 커피 박람회, 요리 대회, 엑스포 등 다양한 행사에 마음껏 참여할 수 있었어요. 할머니 장학금 덕분에 자기 계발을 할 수 있었고 세상을 보는 시야도 넓어졌어요. 감사하게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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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가 ‘김군자 블렌드’ 커피를 만들고 있다.
할머니가 준 ‘나눔’이란 유산으로 ‘김군자 블렌드’ 펀딩
김 씨는 김군자 할머니의 발자취를 아름다운 유산으로 기억하자는 뜻에서 ‘김군자 블렌드’라는 커피를 제작, 이 커피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인 8월 14일부터 텀블벅에서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판매했다.
이른바 ‘김준형 프로젝트’는 아름다운재단 보호종료아동 자립지원 캠페인 ‘열여덟 어른’의 일환으로 진행한 것이다. ‘열여덟 어른’은 곧 시설을 떠나야 하는 아이들이 잘 자립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당사자’들이 각자의 꿈과 재능을 담아 진행하는 프로젝트다. 김준형 프로젝트로는 펀딩 시작 한 달여 만에 947만 6000원이 모였다. 판매 수익금 전액은 보호종료아동을 위한 교육비로 사용했다.
“2017년 7월, 김군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문자를 받고 ‘내가 아니면 누가 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머니 마지막 가시는 길에 꼭 함께하고 싶어 자원해서 운구를 했죠. 운구에 참여하며 할머니가 제게 주신 기회를 저 역시 누군가에게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침 아름다운재단 측에서 좋은 프로젝트를 제안해주셔서 참여하게 됐습니다.”
할머니의 발자취를 기억하자는 의미로 다름 아닌 ‘커피’를 택한 이유는 뭘까. 김 씨는 “커피 원두 겉모습은 단순한 검은색 동그란 원두일 뿐인데, 그 안에는 참 다양한 맛과 향이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신맛, 단맛, 쓴맛…. 할머니가 살아오신 삶의 모습을 표현할 수 있는 매개체가 커피가 아니었나 싶어요. 커피 안에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등 삶의 희로애락이 담긴 것 같거든요. 또 할머니 장학금으로 제가 커피를 배우기도 했고요. 마침 아름다운재단에 커피 제작을 도와준다는 간사님도 계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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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가난하고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들의 교육비로 써달라”며 전 재산을 기부하고 떠난 고(故) 김군자 할머니 | 아름다운재단
정기 수요집회 때 ‘대한민국 살 만한 곳이구나’ 반응도
김군자 블렌드에는 그가 김 할머니를 생각했을 때 떠오르는 느낌 그리고 할머니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도 담겨 있다. “할머니가 유독 흰 꽃을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은은한 꽃 향이 나도록 했죠. 총 세 가지 원두가 들어갔는데 에티오피아 예가체프를 베이스로 선정해서 산뜻한 꽃 향과 과일 향이 나게 했고요. 콜롬비아 원두로 꽃 향을 부각했죠. 또 브라질 세라도 특유의 고소한 내음을 통해 흙으로 돌아가신 할머니를 기리는 의미도 담았습니다.”
8월 7일, 옛 일본대사관 앞 평화로에서 진행한 정기 수요집회 때는 시민들에게 이 커피를 나눠주며 시음회를 열기도 했다. 김 씨는 “당시 커피를 시음한 분들 가운데 ‘대한민국이 아직은 살 만한 곳이라는 걸 느꼈습니다’라는 어느 분의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할머니가 출연한 장학금의 수혜자인 제가 다시 저와 같은 상황에 처한 이들을 위해 나눔 활동을 한다는 데 감동하셨던 거 같아요. 제가 받은 걸 나누고, 우리 사는 세상이 아직은 살 만한 곳임을 알리는 게 제가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이유였는데 그 뜻을 알아주시니 참 뿌듯했죠.”
그는 아동복지시설을 떠나 자립해야 하는 이들에게 멘토 역할을 해주는 자립 선배들의 모임 ‘아동자립지원단 바람개비 서포터즈’(5기)로도 활동하고 있다. “‘나눔’은 ‘좋은 선생님’ 같아요.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알려주는 선생님 말이죠. 나눔을 선생님 삼아 사회문제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서로 연대해나가면 개인과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찾을 거라 생각해요.”
글·사진 김청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