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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상 78회의 우승 기록을 갖고 있는 여자씨름계의 간판 임수정 선수(오른쪽)의 경기 모습. 2019년에 놓친 천하장사타이틀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 임 선수의 2020년 목표다.│대한씨름협회
모래판의 양념에서 주역이 된 여자 씨름
“씨름 교본을 보는 듯한 정석 배지기 기술, 전광석화 같은 무릎치기 공격, 잠시도 멈추지 않는 적극적인 공격과 부드러운 기술 연결은 남자 씨름을 능가합니다.” 한 방송사 뉴스의 여자 씨름 보도 내용이다. 1990년대를 지나며 힘을 기반으로 한 남자 씨름의 인기는 식었지만 기술을 앞세운 여자 씨름은 인기를 더해갔다. 스포츠 채널로 중계되는 씨름 경기 시청률은 여자 씨름이 남자 씨름보다 높게 나올 정도로 인기가 많아지면서 실업팀 창단도 뒤따랐다.
화려한 기술로 씨름 부흥에 디딤돌 놓아
2011년 전남 구례군이 반달곰씨름단을, 2015년 아웃도어 기업 콜핑이 기업 최초로 여자 씨름단을 창단했다. 거제시청과 안산시청, 화성시청도 뒤를 이었다. 안정된 환경이 조성되면서 여자 씨름선수들의 기량도 빠르게 발전했다. 화려한 기술이 입소문을 타면서 공중파의 카메라도 여자 씨름장을 찾았다. 2017년 ‘IBK기업은행 설날장사씨름대회’는 여자 씨름대회가 최초로 KBS 1TV 공중파로 중계된 경기였다. 최근 다시 높아지고 있는 씨름의 인기 비결 가운데 하나가 화려한 기술인 점을 고려한다면 여자 씨름이 씨름의 부흥을 위한 디딤돌을 놓은 셈이다.
여자 씨름의 역사는 1930~4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구례와 영남 등 지방 각지에서는 여자 씨름판이 자주 열렸다고 한다. 전북 옥구에서 1938년 촬영한 여자 씨름대회 사진도 전한다. 특히 구례는 남악제와 오일장 날에 여자 씨름대회를 연 전통을 앞세워 여자 씨름 발상지를 주장한다. 발상지답게 1970년부터 전국 여자 씨름대회를 열었고, 2009년에는 ‘제1회 국민생활체육 전국여자천하장사씨름대회’를 개최했다. 올해로 12회를 맞는 대회는 여자 씨름 발전의 동력을 제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렇다고 여자 씨름이 꽃길을 걸어온 건 아니다. 여자 씨름이 경기로서 형식을 갖추고 공식적으로 전국 대회를 연 건 1991년 대통령배 대회였다. 전국 시도 대항전으로 열리는 탓에 각 지방자치단체는 선수 선발에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수원에서 열린 대표선수 선발전에는 주부와 학생들도 출전해 뉴스에 나올 정도로 화제가 됐다. 대부분의 지자체는 상황이 급한 만큼 유도와 레슬링 등 다른 종목의 선수를 씨름선수로 선발해 대회에 참가했다. 2009년 구례대회에서 첫 여성 천하장사로 등극해 ‘여자 이만기’로 불리며 여자 씨름계의 간판선수로 성장한 임수정 선수의 성장기는 여자 씨름의 발전 과정을 상징한다. 중학생 때 잠깐 유도선수로 활동하기도 한 임 선수는 대학 때까지만 해도 일반 학생이었다. 임 선수는 ‘샅바 매는 법도 모른 채’ 출전한 교내 대회에서 우승을 해 2006년부터 선수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나 실업팀이 없었다. 선수 생활과 트레이너, 재활치료사라는 직업을 병행해야 했다. 임 선수는 2015년 콜핑이 여자 씨름단을 창단하면서 안정적인 선수 활동을 하고 있다. 임 선수는 지금까지 천하장사 6번, 체급장사 63회 등 80여 회의 타이틀을 차지했다. 엉덩배지기가 장기인 임 선수의 2020년 목표는 2019년에 놓친 천하장사 타이틀을 되찾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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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양윤서 선수/ 이연우 선수/ 한유란 선수/ 이다현 선수│각 선수 제공
다치지 않고 즐겁게 운동하는 게 소원
2019년 천하장사 씨름대축제에서 매화급 장사 타이틀을 차지한 양윤서 선수는 2020년 소속팀을 콜핑에서 구례군 반달곰씨름단으로 옮겼다. “지도자로서 길을 찾고 있어요. 소속팀을 옮긴 것도 새로운 시작을 위한 다짐이죠.” 2013년 동호인 활동으로 씨름에 입문한 양 선수는 2015년 4개 대회에서 우승하며 주목을 받았다. 들배지기가 주특기인 공격형 선수로 별명도 ‘모래판의 파이터’다. “다치지 않고 즐겁고 재밌는 경기를 하자”고 자신을 다독이는 양 선수의 2020년 목표는 ‘들배지기를 더 잘하는 선수’가 되는 것이다.
JTBC <요즘 애들>에 출연해 씨름선수는 뚱뚱하다는 편견을 깬 한유란 선수는 유도선수 출신이다. 2019년 2월 설날장사씨름대회를 시작으로 6월 횡성단오장사씨름대회 단체전과 7월 전국시도대항장사씨름대회를 석권하며 매화급의 최강자로 떠올랐다. 2017년 거제시청씨름단에 입단한 지 2년 만에 이룬 성과다. 씨름의 매력을 ‘짧고 굵게 힘써서 끝을 내는 맛’으로 꼽는 한 선수의 2020년 꿈은 민속대회에서 장사 타이틀을 획득하는 것이다. “안 다치는 것이 중요하지만 모래판에 올라서면 상대를 쓰러트리고 내려와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승부욕도 강하다.
이다현 선수는 씨름선수 출신인 아버지 권유로 고등학교 2학년 때 씨름을 시작해 1년 만인 2010년 제3회 국민생활체육 대천하장사씨름대회 무궁화급(-80kg) 결승에서 이기며 ‘여고생 장사’로 불리기도 했다. 2012년 구례군 반달곰씨름단에 입단해 실업 선수가 됐다. 2017년에는 거제시청으로 소속을 옮겼다. 2019년에는 구례여자천하장사대회 통합 준우승과 회장기씨름대회 무궁화급에서 우승을 했다. 들배지기 기술과 연결되는 잡채기와 밭다리 기술을 집중적으로 연습 중이다.
이연우 선수 역시 씨름 지도자이자 이천시씨름협회 전무이사로 활동한 아버지 권유로 고등학교 2학년 때 씨름을 시작했다. 용인대학교 씨름부에서 활동하며 천하장사 출신인 이태현 교수에게도 지도를 받았다. 나이가 어리기도 하지만 키가 163cm로 작아 ‘꼬맹이’로 불리기도 한다. 2019년 횡성단오장사씨름대회에서 매화급 장사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연우를 이길 선수가 없다”는 말을 오래도록 듣기 위해 부상하지 않고 열심히 운동하자는 바람도 갖고 있다. 여자 씨름선수들은 2020년이 여자 씨름의 위상을 확실히 하는 해가 되기를 바란다. 2019년 이루지 못한 전국체전 정식종목화, 남자 씨름에 비해 턱없이 낮은 대회 상금 규모, 하루에 3체급 경기가 한꺼번에 치러지는 경기 운영 방식 등 개선해야 할 사항이 적지 않다. 선수들은 바람을 이루는 길을 스스로 열심히 해 경기력을 향상하는 데서 찾는다.
윤승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