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문화비축기지’를 공중에서 본 모습이다. 41년간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된 ‘석유비축기지’였던 이곳은 도시재생 사업을 통해 공원으로 바뀌었다. | 한겨레
서울 서대문구 천연·충현동의 재발견
‘도시의 경쟁력 강화 및 삶의 질 개선을 위한 도시재생 뉴딜’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면서 100대 국정과제 중 하나다. 정부는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한 도시재생특별위원회 심의를 거쳐 관계부처 합동으로 추진할 ‘도시재생 뉴딜 로드맵’을 2018년 3월 발표했다. 도시재생 뉴딜 로드맵의 정책 목표는 주거복지 실현과 도시 경쟁력 회복, 사회 통합, 일자리 창출이다. ‘지역공동체가 주도하여 지속적으로 혁신하는 도시, 살기 좋은 대한민국’을 비전으로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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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재생 뉴딜사업의 핵심은 주민들의 자발성이다. 2018년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선정된 서울 천연·충현동을 찾아가 주민들의 의견 수렴 과정과 공동체 활동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들여다봤다. 정부는 도시재생 지원 구역을 선정할 때 몇 가지 원칙과 예시 유형을 제시할 뿐, 재생의 방식과 유형은 주민과 지자체가 결정한다.
도시재생이라는 개념은 문재인정부 이전에 수립됐다. 2013년 제정된 ‘도시재생 활성화 및 지원에 관한 특별법’에 따르면 도시재생은 기존 재개발·재건축보다 취지와 목적이 더 복합적이다. 기존의 재개발 방식뿐만 아니라 다양한 형태의 도시재생 방안을 아우른다. 이명훈 한국도시재생학회장이 도시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한 재생 방안과 해외 사례를 소개했다.
▶천연·충현 도시재생지원센터 옥상에서 바라본 천연동, 충현동 일대. 고층 아파트를 경계로 지붕의 모습만 봐도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도시는 단순히 건축물과 이동 수단을 모아놓은 곳이 아닙니다. 높게 솟아 하늘을 가린 빌딩과 도로를 달리는 버스 안에도 많은 사람들의 삶이 녹아 있습니다. 도시재생은 도시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2018년 국토교통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선정된 서울 서대문구 천연·충현동의 도시재생 소식지 <사기충천>은 이렇게 시작한다. 서울 통일로에 자리한 영천시장 인근에는 천연·충현 도시재생지원센터가 있다. 센터의 옥상에 올라가면 이 일대가 한눈에 보인다. 사방이 고층 아파트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가운데 천연·충현동만은 저층 주거지역에다 좁고 가는 골목길이 모세혈관처럼 퍼져 있다. 명동과 광화문이 가깝기 때문에 교통의 요지이지만 이 동네만은 개발이 되지 않았다. 이웃 동네와의 격차는 커져만 갔다. 노후한 주택들은 골목이 좁아 사실상 다시 집을 짓기 어렵고, 골목길에 쓰레기봉투가 나뒹굴며 주차난은 심각했다.
그러나 6월 13일 찾아간 천연·충현동의 모습은 달랐다. 아파트 대단지처럼 조경 시설은 없지만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내놓은 파릇파릇한 화분들이 좁은 골목길에 자리했고, 쓰레기도 눈에 띄게 줄었다. 주차난 해결을 위해 지역 교회는 평일에 이웃이 사용할 수 있도록 교회 주차장을 개방했다. 무엇이 이 동네를 바꾸기 시작했을까. 도시재생 소식지 <사기충천>에 적힌 것처럼 이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공간에 녹아든 삶이 궁금했다.
▶6월 13일 서울 영천동에 자리한 천연·충현 도시재생지원센터에서 김혜민 사무국장(오른쪽)과 노정순 공동체사회적경제분과장이 이야기를 나누고있다. | 박유리 기자
의자 두 개와 장미 한 그루의 배려
천연·충현 도시재생지원센터에 찾아갔을 때 건물 바로 옆에 자리한 다세대주택이 눈에 띈 이유는 한 그루 장미나무 때문이었다. 의자 두 개와 장미 한 그루. 다세대주택 1층에 사는 한 주민이 쉬었다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웃을 위해 자발적으로 내놓은 것이다. 소박한 가구, 그리고 따뜻한 배려였다. 장미나무를 지나 영천동의 도시재생지원센터로 걸어 올라갔다. 건물 5층에 자리한 센터에는 김혜민 사무국장과 노정순 공동체사회적경제분과장이 앉아 있었다. 김 사무국장은 서울시 소속으로 도시재생 실무를 담당한다. 이 지역에 수십 년간 살아온 주민 노정순 씨는 마을 이야기를 들려줬다.
“영천시장에는 떡집이 많아요. 이 인근에 서대문형무소역사관이 있잖아요. 독립운동으로 투옥된 분들 뒷바라지하려고 가족들이 근처에서 떡을 많이 팔았다고 해요. 떡골목으로 불리기도 하고요. 조용하고 차분한 주민 분들이 많아요.”(노정순)
“보통 행정과 주민 간에 간극이 있어요. 행정은 주민들이 맨날 떼쓰는 이야기 한다고 여기고, 주민들은 행정이 늘 틀에 박힌 이야기만 한다고 하잖아요. 센터는 그 간극을 좁혀주고 주민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사업 추진 때 매끄럽게 진행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해요.”(김혜민 사무국장)
▶영천시장 배후골목, 골목길 정비사업 예정지
천연·충현동은 2016년 6월 서울형 도시재생 희망지 사업을 거쳐 2017년 2월 서울형 2단계 도시재생활성화사업에 선정됐다. 2018년 8월에는 국토교통부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선정됐다. 도시재생의 핵심에는 주민들의 의견 수렴과 자발성이 있다. 2018년 7월 구성한 도시재생 주민협의체는 주민 중심 사업이 될 수 있도록 계획 수립과 사업 시행 과정에 참여하고 의견을 제시한다. 주민협의체 내부에는 네 명의 분과위원장이 있다. 지역 주민이자 저마다 자신만의 전문성을 보유한 이들이다. 노 위원장은 조선왕조 궁중음식 부문 기능보유자인 무형문화재 제38호 고(故) 황혜성 씨의 전수자다. 건축사, 시장 상인, 경기대 교수 등 다양한 전문인이 골목보행환경, 동네상권, 역사·문화 분과장을 맡았다. 이들은 이견 조정과 공감대 형성을 위한 활동도 진행한다. 노정순 공동체사회적경제분과장은 주민들의 사랑방 공간인 ‘골목통’에서 요리 강습을 한다. 자발적으로 주민들이 양념이나 쌀, 재료를 가져와서 요리는 풍성해지고, 10명 내외를 대상으로 하려던 강습은 언제나 인원이 넘쳐난다.
“어떤 분들은 쌀 20㎏씩 들고 와요. 떡이나 쌀강정을 해서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죠. 작은 거지만 드시면서 정말 행복해하세요. 주민들과 ‘마을 김장’도 했고 앞으로는 발효식품을 함께 만드는 ‘마을 발효’도 진행할까 생각 중입니다. 이런 경험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재미있게 해나가고 있어요.”(노정순)
▶쓰레기가 아무렇게 버려져 있던 골목에 주민들이 스스로 화분을 놓아 꾸민 곳이다.
올해 7개의 마을 공모 사업 선정
역사·문화분과위원장인 남상식 경기대 교수는 마을 축제를 기획하고 있다. 이벤트 업체가 비용을 받아서 축제를 대신 열어주는 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이 직접 기획하고, 출연할 계획이다. 최근에는 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축제 기획단도 모집했다. 올가을에 열릴 축제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와 역사를 담아 전시, 퍼포먼스, 콘서트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될 예정이다.
▶주민 공모 사업으로 만든 영천시장 쉼터
천연·충현동에는 오래 거주한 토박이들이 많다. 수십 년간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지금처럼 왕래가 잦았던 것은 아니다. 서로 얼굴이나 이름을 몰랐던 주민들이 스스로 마을 문제를 고민하고 공유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센터가 주민들의 역량 강화를 위해 노력한 덕분이다. 주민 스스로 마을의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점을 모색해나가는 자발성이 하루아침에 생겨나지는 않는다. 센터는 2017년부터 주민 공모 사업을 개최하고 이듬해 도시재생의 가치를 알리는 아카데미를 열었다. 해를 거듭하면서 주민들이 마을에 필요한 사업을 스스로 제안하면, 천연·충현 도시재생사업비 일부를 지원하는 주민 공모 사업의 종류와 질도 발전해갔다. 첫해에는 취미, 사회적 이슈 등 다양한 사업이 제안됐다. 이듬해부터는 주민들의 공통 관심사가 차츰 천연·충현동을 개선하기 위한 방향으로 확산됐다. 올해는 7개의 마을 공모 사업이 선정됐다. 독거노인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인 치매를 예방·치료하기 위해 메타인지 교육사업을 하는 ‘커뮤니티 케어’ 등이 선정된 것이다.
▶영천시장 떡골목
노 위원장은 커뮤니티 케어 사업을 소개하며 “그러잖아도 메타인지 교육 받는 분들을 위해 국수라도 삶아드릴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서 “공동체에 어떤 게 더 필요한지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되는데, 그런 과정이 도시재생을 하면서 스며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천연·충현동이 벌이는 사업들은 국토부 심의에 앞서 타당성 평가를 받았다. 향후 심의를 통과하면 시설 사업비 등을 쓸 수 있게 된다. 사업으로는 골목길 쓰레기 문제나 여성 안심귀가 등을 담당하는 ‘마을 관리소’를 구상 중이다. 마을 관리소는 위생과 치안뿐 아니라 돌봄, 집 수리, 교육, 문화 등 다양한 콘텐츠로 확장이 가능하다. 마을 관리소의 주체 또한 주민이다. 주민 리더들이 중심이 되어 마을 관리 협동조합 형태로 운영할 수도 있다. 골목길이 좁아서 사실상 집을 다시 지을 수 없는 노후 주택 문제도 해결할 계획이다. 건축법상 4m 이상의 도로가 확보돼야 집을 다시 지을 수 있는데 이를 충족하지 못해서 오래된 주택들이 방치된 경우가 많았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 소규모 주택정비사업도 구상 중이다.
▶시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골목책방’ 서점 주인은 “40년 넘게 이곳을 지키고 있다”고 말한다.
언젠가 재개발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전면적 재개발이 아닌 마을 공동체 중심의 도시재생 방식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지 않는다. 지역 주민들의 협의와 이견을 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주민들의 공간 ‘골목통’에는 각종 아카데미와 모임 등이 거의 매일 잡혀 있다. 몇 개의 시설이나 건물을 짓고, 당장 대규모의 비용 투자를 하는 것으로 도시재생은 완성되지 않는다. 재정적 지원을 하기에 앞서 주민들의 문화가 달라져야 지원의 결과 또한 장기적으로 빛을 낸다. 김혜민 사무국장과 직원들은 골목길을 다니며 주민들과 유대감을 쌓았다.
▶6월 14일 도시재생 주민공간 ‘골목통’에서 공동체 사회적경제분과 사업으로 추진된 요리 강습. 이날 모인 주민들이 만두를 빚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인터뷰를 끝내고 이들과 일대의 노후 주택을 찾아다녔다.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한옥부터 1990년대 주택까지 다양한 시대의 건축물이 한 골목길에 빽빽이 들어서 있다. 좁은 길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다. 골목길 곳곳에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조성한 작은 화단이 보였다. 오래된 한옥을 고쳐 만든 한옥책방 카페도 눈에 띄었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를 집필한 이장희 작가와 아내가 문을 연 공간이다. 김 사무국장, 노 위원장과 함께 차를 마셨다. 김 국장은 “도시재생 사업을 한다고 해서 전면적인 재개발을 하지 말라거나 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고 말했다. 언젠가 재개발이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지만, 노후 주택들을 버려두는 게 아니라 고치고 가꾸며 사는 삶의 방식이 스며드는 것이 도시재생이다. 노후 주택가는 재개발이 되는 땅과 그렇지 않은 땅으로 나뉜다. 어디에 자신의 집을 소유하느냐에 따라 주민들의 빈부 격차가 벌어진다. 토지나 주택 소유자에게 재개발은 자산 가치를 증식시키는 수단이다. 그러나 자산 가치의 증식 수단이 아닌, 삶의 가치가 자라나고 풍요로워지는 공간을 지향하는 것이 도시재생이다. 노 위원장은 인터뷰 내내 ‘행복’ ‘감사’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썼다. 그의 얼굴에 진심이 묻어났다.
글 박유리 기자
사진 곽윤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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