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25일 서울 마포구 공덕동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에서 김진향 이사장을 만났다.│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8월 5일 문재인 대통령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일본의 경제 침탈을 남북의 평화경제로 극복하자”고 제안했다. 이어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평화로 번영을 이루는 평화경제를 구축하고 통일로 광복을 완성하고자 한다”고 밝혔고, 9월 19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는 “평화경제는 한반도의 운명을 바꾸는 일”이라며 다시 한번 강조했다.
김진향 개성공업지구지원재단 이사장은 “뉴스를 보면서 굉장히 반갑고 기뻤다”고 말했다. “사실 평화경제의 개념을 쓴 건 꽤 됐습니다. 개성공단을 착공하던 시기에 ‘남북경협을 고도화해 평화경제로 가자’는 말이 회자됐죠.”
김 이사장은 “평화경제, 남북경협, 개성공단 재개는 가능성의 영역이 아니라 분단체제를 살아가는 국민의 행복을 위해 반드시 실현해야 하는 당위 문제”라며 “대통령이 확고한 의지를 천명하면서 ‘한반도 평화경제’가 국가적 화두로 떠오른 이때 국민적 공감대를 범사회적으로 넓혀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형적 분단경제 제약요인 넘어서는 평화경제
-먼저 ‘한반도 평화경제’의 개념을 설명해달라.
=단순하게는 남북경협이 확대·심화·고도화되는 것이고, 내용상으로는 남과 북이 경제협력을 통해 평화와 경제 번영을 함께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 70년 동안 남과 북이 지리적,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철저히 상호 고립·단절·대립했던 분단경제(전쟁경제)의 반대 개념으로도 볼 수 있다. 기형적 분단경제가 안고 있던 수많은 제약요인을 넘어서는 게 평화경제다.
-평화를 이룬 뒤에 경제 협력하자는 주장이 있다.
=‘평화’와 ‘경제’를 분리해 선후의 문제로 봐선 안 된다. 남북경협 자체가 이미 평화를 담보하고 더욱 심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을 시작할 때만 해도 평화를 정착시키기 위한 경제협력, 즉 ‘평화를 위한 경제’의 의미가 강했다. 막상 운영해보니 ‘경제를 위한 평화’도 성립하더라. 평화경제를 ‘평화를 위한 경제’와 ‘경제를 위한 평화’가 맞물려 있는 선순환 구조로 이해해야 한다.
-평화경제가 국가적 화두로 떠오른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더는 미룰 수 없을 만큼 평화가 절박하기 때문이다. 개성공단의 경험으로 봤을 때 남북경협은 평화를 정착시킬 수 있는, 가장 고도화한 방법이다. 둘째는 한국 경제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다. 한국 경제의 위기, 제조업의 위기는 중국의 제조업 경쟁력이 한국을 추월해서 발생한 측면이 강하다. 제품이 세계시장에서 안 팔리자 한국의 제조기업들이 저임금을 찾아 동남아로 빠지면서 국내 산업의 공동화와 급격한 일자리 소멸이라는 악순환이 나타난 것이다. 이런 구조적 경제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대안이 바로 남북경협이다. 개성공단이 정상 가동되던 시절, 입주기업 사장들 사이에선 “개성공단보다 좋은 공단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 “개성공단에서 돈을 못 벌면 기업이 아니다”라는 말들이 있었다. 개성공단 13년 동안 우리 기업들의 고정자산, 설비투자 총액이 6억 달러인데, 2018년 한 해 동안 국내 기업이 동남아 등 해외에 투자한 돈이 83배인 498억 달러다. 한반도의 엄청난 부와 일자리가 해외로 나간 것이다. 해외투자의 10%만이라도 평화경제에 투자한다면 한국 경제는 새로운 장을 열게 될 것이다.
-한국 업체들에 개성공단이 가진 장점은 무엇인가?
=우선 임금이다. 초기 3년(2004~2006년) 동안 월평균 실질임금이 57달러(약 6만 3000원)였고, 가장 임금이 높았던 2015년 12월에도 157달러(약 18만 원)에 불과했다. 이주노동자 1명 인건비로 북측 노동자 13명을 고용할 수 있었다. 임금 인상률도 연 5%로 고정되어 있다. 같은 언어와 같은 문화, 민족적 정서도 큰 장점이다. 원·부자재가 들어가고 완제품이 나올 때 관세가 없고, 서울에서 1시간밖에 안 걸린다. 무엇보다 북측 노동자들이 거의 이직을 하지 않아 숙련 노동자가 된다는 게 기업 입장에서 가장 큰 매력이다. 서울에서 만드는 것보다 더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 저렴한 토지 가격, 세금과 사회보험료 등 여러 제도적 측면에서 개성공단은 전 세계 어느 공단보다도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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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공단 여러 개 생기면 우리 경제 바뀌어
-개성공단을 재개하면 한국 경제에 어떤 효과가 있나?
=첫째, 노무비·세금·물류비 등이 저렴해 제품 수출·가격 경쟁력이 확보된다. 둘째, 국내 기업의 탈한국을 방지하고, 기존에 해외에 투자했던 기업도 유턴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셋째, 개성공단 기업의 수익 증대는 수많은 연관 협력업체의 일감 증가를 의미한다. 생산 관련 도소매, 서비스업 등 후방산업 일자리도 자연스럽게 늘어날 것이다. 올해 금융기관에서 추산한 ‘개성공단 재개 시 취업유발 효과’를 보면, 입주기업 수가 3000개일 때 직간접 고용 인원이 21만 명, 5000개일 때 35만 명이었다. 이처럼 남북경협의 경제적 가치와 일자리 창출 효과는 엄청나다. 개성공단 같은 곳이 북측에 여러 개 생긴다면, 우리 경제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
-개성공단 외에 북한과 어떤 경제협력이 가능할까?
=남북의 자원협력이 가져다줄 예를 하나 들겠다. 포스코가 철강 원재료를 오스트레일리아나 칠레 등에서 가져오는데, 북측에 아시아 최대의 노천 철광산이 있다. 남북 자원협력을 통해 포스코가 북측의 철광석을 국제시장 가격보다 좋은 조건으로 가져온다면 철강재 가격을 낮출 수 있다. 철강재는 거의 모든 산업에 쓰이기 때문에 ‘산업의 쌀’로 불린다. 철강재를 쓰는 자동차와 조선 산업의 경쟁력도 높아질 것이다. 남과 북의 경제가 상호 보완적이라 산업적 역할분담도 큰 효과를 낼 것이다. 남측의 민수 제조업 기술과 자본은 북측의 노동력·토지와 결합할 수 있다. 우리 산업의 고질적 문제인 노동력 부족을 북측의 1700만 양질의 노동력으로 해소하고, 내수 시장도 8000만 명으로 확대되면서 규모의 경제가 성립한다. 북측의 첨단 군수 기술이 남측의 글로벌 마케팅·유통망과 만났을 때 낼 시너지 효과도 기대된다. 지금까지 북측이 군수 분야에 집중하면서 첨단 기계, 컴퓨터수치제어(CNC), 우주항공, 석탄화학(C1화학) 분야의 기술력은 세계적 수준이다.
-북한의 기술력이 그렇게 높다니, 북한 경제에 대해 제대로 몰랐던 것 같다.
=북측 경제를 이해하려면 먼저 북측 사회의 기본 특징을 알아야 한다. 북측은 고도의 집단주의 체제, 즉 공동체 사회다. 개인의 가치와 공동체(사회)의 가치를 동일시한다. 개인주의 사회와는 사회 작동의 원리가 많이 다르다. 전체주의와는 다른 북측만의 집단주의 체제, 조직 생활과 문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북측은 현재 전통적인 국가사회주의 계획경제를 골간으로 일정 부분 시장화를 접목하고 있다. 사회주의경제의 국가 주도성, 계획성 등의 일사불란함이 여전히 강하고 국가가 주도적으로 경제개혁 조치를 추진함으로써 상당히 빠른 변화를 보이고 있다. 국가에 대한 인민들의 충성심과 공동체성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고 공고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파주시 서부전선 비무장지대(DMZ) 도라전망대에서 바라본 개성공단의 모습│ 한겨레
북측 경제 변화와 맞물릴 때 폭발성 지녀
-북한이 미국과 관계 개선에 적극적이다.
=북측 전체를 지배하는 환경적 요인이 세계적 패권국가인 미국과 전쟁을 끝내지 못하고, 전쟁적 위기 상황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군수공업 분야가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군수 분야가 민수 분야로 일정 부분 전환되고 있는 것이 현재 북측 경제의 변화다. 아마도 미국과 관계 개선이 이뤄지고, 경제제재가 일정 부분 해소되면 북측 경제가 엄청난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중국의 고도 경제성장 사례를 북측에 대입해볼 필요가 있다. 법과 제도적으로 그런 경제개혁 조치들을 이미 완비했다. 북측의 경제적 변화에 우리 한국 경제가 맞물려야 한다. 그것이 바로 평화경제다. 평화경제는 북측 경제의 변화와 함께 맞물릴 때 폭발성을 지닌다.
-한반도 평화경제가 가져올 변화가 기대된다.
=국제 정치·경제적 맥락에서 한반도 평화경제는 동북아 평화경제의 핵심축이자 시금석이 될 것이다. 한반도 평화경제는 에너지, 자원, 물류 등이 남북의 평화경제를 넘어 동북아 평화경제로 확장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정치·군사적 측면에서 한반도는 동북아 4대 강국에 갇힌, 지정학의 감옥이다. 그런데 지정학을 남북경협의 평화경제가 확산하는 지경학(地經學) 관점으로 바꿔보면 한반도는 동북아라는 블루오션의 중심, 허브에 위치한다. 이탈리아가 지중해의 중심에 있는 것처럼 동북아시아를 바다의 내해로 본다면 한반도는 정중앙에 있다. ‘동북아 지정학의 감옥’에서 ‘지경학의 블루오션, 허브’로 전환. 바로 한반도 평화경제가 만들어낼 우리 눈앞의 현실이다.
원낙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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