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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신여학교 3·1 만세운동 재구성
2019년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기리고 호명해야 할 것에는 여성들의 주도적 참여가 있다. 당시 조선에서 수탈의 이중고를 질 수밖에 없었던 여성은 3·1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김삼웅 독립기념관 전 관장은 말한다. “남녀 차별이 엄존한 지배 체제하에서 여성은 남성보다 큰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3·1운동은 여성들에게 억압의 사슬을 끓을 분출구였다. 3·1 만세시위에 여성들은 물밀듯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국가보훈처의 서훈을 보면, 2017년 12월까지 독립운동가 포상자 1만 4830명 가운데 여성은 296명이었다. 지난해 국가보훈처에서 ‘여성 독립운동가 발굴 및 포상 확대방안 연구’ 등 적극적인 작업으로 202명이 새롭게 발굴되고 26명이 서훈을 받았다. 여성 독립운동가의 비율은 전체의 2%를 겨우 넘겼다. 독립운동 포상 기준이 남성 기준으로 만들어져 있어서다. 실제로 서훈의 경우 3개월 이상의 징역형을 요건으로 명시하고 있는데, 같은 행위에 대해서도 여성은 남성보다 선고량이 적은 사례가 발견되곤 한다. 역사학자 박용옥(3·1여성동지회 명예회장)은 <여성독립운동사 자료총서 1-3·1운동 편>(국가기록원)에 이렇게 썼다. “여성들의 경우 최고의 폭력은 여성들의 증언에서 누누이 언급되는 것처럼 일제 경찰들 앞에서 나체를 만들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고, 나체로 기어 다니게 한 것이었다. 그것은 여성들에게 최고의 수치였다. 그러나 포상 기준에 이러한 것들은 고려돼 있지 않다.”
<위클리 공감>은 3·1운동에서 부산·경남 시위의 물꼬를 튼 부산진일신여학교(지금의 동래여중고)를 찾아 만세운동을 재구성했다. 일신여학교는 1909년 호주의 선교사들이 설립한 부산 여자 교육기관의 시초다. 역사의 기록과 학계 고증을 바탕으로 100년 전 긴박했던 상황을 되살려내고자 했다. 아쉽게도 시위의 전개, 참가자의 신원, 신상 등에 관한 기록이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아 추론을 입힌 ‘실화 베이스 픽션’이 됐다. 이제 고인이 된 등장인물들의 명예에 행여 누가 될까 옷깃을 여미며 100년 전 감동의 순간과 마주한다.
▶2018년 2월 28일 부산 동구 일신여학교를 출발한 시민들이 동구청까지 행진하며 일신여학교 만세운동을 재현하고 있다. 일신여학교 만세운동은 부산·경남에서 만세운동을 이끄는 구심점 구실을 했다. | 연합
# 소식을 전해 듣다
멀리서 학교 앞 느티나무가 보이자 명시(李明施)는 더 속도를 냈다. 평소에는 수다를 떠는 중에도 한숨을 몇 번씩 쉬며 가던 오르막길을 오늘은 뜀박질 선수처럼 단박에 올라갔다. 좌천동 768번지 일신여학교 건물에는 주경애(朱敬愛) 교사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선생님!” 숨 가쁘게 불렀다. 선생이 명시를 향해 얼굴을 들었다. “이것 좀 보이소.” 명시는 손에 쥐면 들킬까 봐 가슴팍에 숨겼던 종이를 꺼냈다. 종이를 읽는 경애의 얼굴이 점점 상기됐다.
3월 1일의 소식은 신작로 자동차보다도 빨리 부산진에 도착했다. 고종황제의 인산(因山·장례) 이틀 전인 그날 서울을 비롯해 평양·진남포·안주·의주·선천·원산 일곱 도시에서 “조선 독립 만세” 외침이 벌어진 뒤, 전국적으로 시위가 들불같이 번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놀랍고 가슴이 뛰었다. 사람들이 모이고 만세시위가 확산되는 게 두려운 일제는 휴교령을 내렸다. 하지만 휴교령은 만세시위 확산을 도왔다. 유학생들은 고향으로 독립선언서를 들고 내려갔다. 명시는 교사 경애에게 말했다. “아까 우물가에서 만난 남학생이 이것을 여럿 만들어놓으라 카대요.”
▶당시 길거리에 뿌려진 독립선언서 | 한겨레
# 거사를 모의하다
일 토요일 화창한 오후, 우물가에 빨래를 들고 간 명시의 등을 이미 모여 있던 아낙들이 떠밀었다. 남학생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내외한다고 곁눈질로 퉁명스럽게 ‘뭔 일이냐’ 물었더니, 교복 입은 청년이 명시의 손을 번쩍 들어 올리고는 종이를 한 장 쥐어주었다. 명시는 손에 쥔 독립선언문을 입으로 소리 내어 읽었다. “오등은 자에 아,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유인임을….” 눈을 퍼뜩 들어 남학생을 쳐다보았다. 남학생은 소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경애가 명시에게 물었다. “언제라고?” “11일 저녁이라 카대예.” 경애가 부산제2상업학교(제1학교는 일본인의 학교), 동래고등보통학교 선생들에게 연락받은 대로였다.
경애는 지난해 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 모교 선생이 된 시연(朴時淵)과 머리를 맞댔다. 시연은 박순천(훗날 민주당 국회의원) 등 동기들과 학생 시절에 교실의 일본 국왕 사진에 흰 줄을 그어, 왕이 눈물을 흘리는 것처럼 만들어놓는 일을 벌이기도 했다. 두 교사는 기숙사 학생 여덟 명을 뒷산(학이네 산)으로 불렀다. 경애가 명시가 갖다준 종이를 내보였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 불쑥 말했다. “요즘 만세에는 다들 구한국기(태극기)를 들고 나간대예. 우리도 만듭시더.” 결혼 날짜를 받아놓은 반수(金班守)가 말했다. “지한테 혼숫감인 옥양목이 열 마 넘게 있어예.”
다음 날 밤 학생들은 은밀하게 만세시위를 준비해나갔다. 야간에 불빛이 새어나가지 못하게 창문을 이불로 꽁꽁 싸맸다. 폭에 여섯 개가 나오도록 포목을 찢고, 가사 시간에 쓰는 재봉틀로 가장자리를 다듬었다. 명진(宋明進)이 남은 밥을 훔쳐다가 풀을 쑤어서 빳빳하게 만들었다. 대접을 엎어 원을 그리고 물감으로 태극과 괘를 그렸다. ‘출정’의 전운이 감돌아야 할 방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잘 읽을 줄 모르는 선언서가 얼마나 길었던지 인쇄를 위해 원지(등사지 원본)를 몇 장씩 긁는데 지루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잠 많은 아이들은 재봉틀 일을 해야겄어.” 등사지를 밀다 잠이 든 동무한테 말했지만 재봉틀 앞에 앉은 동무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졸다가 태극기의 괘는 좌우가 바뀌었다. “이 아까운 걸 우짜꼬.” “이리 흔들모 누가 알겄노.” 잠을 깨는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전라도 익산에서 두루마기 입은 어른이 만세를 부르는데, 일경이 와서 태극기를 든 팔을 잘랐디야. 그 어른이 떨어진 태극기를 왼손으로 들고 또 만세를 외쳤다는 기라. 그랬더니 일경이 그 팔도 마저 베어뿌릿단다. 그런데 그 어른이 입으로는 계속 만세를 불러, 일경이 난자했다 안 카나.”(시기적으로는 4월 4일에 있었던 일)
▶부산진일신여학교. 1919년 당시에는 1층 건물이었지만 이후 1931년 2층 건물로 증축했다.
# 결전의 날이 밝다
11일 화요일 결전의 날 아침, 기숙사 학생 응수(金應守)는 마당을 쓸다가 삐라를 발견했다. “만세를 부르지 않는 자는 천벌을 받을 것이다.” 응수는 경애에게 달려갔다. 경애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오늘 저녁에 만세를 부를 것인데 준비하고 있어.”
일신여학교 교실은 수면이 부족한 학생들로 가득해 수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졸린 눈을 뜨지 못하던 학생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삼삼오오 모여서는 속삭였다. 동무들 가족 중 형사거나 경찰인 사람이 있으니 대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형세는 불온했다. 경찰은 11일 예정된 시험을 취소하고 부산제2상업학교 학생들을 돌려보냈다. 귀가를 확인하기 위해 경찰이 학생들을 집까지 호위했다.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기별이 더 이상 없어 불안했다. 저녁 해가 진 뒤에도 아무런 만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날은 야학이 있는 날이었다. 경애와 시연은 망설이다가 결국 야학으로 향했다.
밖이 웅성이더니 발 빠른 명시가 들어왔다. “저녁 8시에 학교에서 낼다보이는 신작로에 모인단다. 동무들 부르자.” “교복도 안 입은 애가 하는 말이라매. 우찌 믿노.” “이리 준비했는데 무라도 베야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 아이가.” 아이들은 웅성이며 등겨 밑에 숨겨두었던 태극기를 꺼냈다. 통학생들에게 연락을 하러 나갔고, 명시는 선생들을 부르러 달려 나갔다. 범래골에서 동래로 출발하는 기동차에서 경애를 발견했다. “주 선생님, 박 선생님!” 악을 지르자 경애와 시연이 명시를 발견하고는 무슨 일인지 짐작하고 뛰어내렸다.
8시가 되자 일신여학교 학생들은 좌천동 신작로로 달려 나갔다. 호주인 선교사와 선생도 합류했다. 일단 거리로 뛰쳐나오니 벅찬 심정이 되어 교장인 대마가례(代瑪嘉禮·Margaret Davis)가 말한 ‘푸리쇼(Pull up show)’가 절로 나왔다. 호킹(허대시·許大時) 교사도 함께 만세를 불렀다. “남학생들은 다 어디 갔노?” “무서바서 삭 다 도망갔나.” 만세 소리를 듣고 달려 나온 주민 외에 달리 남학생들은 보이지 않았다.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목이 쉬도록 ‘조선 독립 만세’를 불렀다. 응수는 만세를 부르다 보니 신고 있던 짚신도 어디론가 달아나고 없었다.
2시간쯤 지났을까. 총칼로 무장한 일경이 신작로를 막아섰다. 그들은 잡히는 대로 오랏줄에 묶었다. 여학생 40명과 데이비스 교장, 호킹 교사, 일반인이 굴비 꿰듯 한 두름으로 엮였다. 경찰은 숨은 이들도 찾아 나섰다. 난줄(金蘭茁)은 친구 집에 숨어 있었는데, 어머니가 이름을 부르며 찾는 바람에 뛰어나갔다가 잡혔다. 학생들은 부산파출소에서 심문을 받고 이틀 뒤 부산형무소로 갔다. 응수는 그날 처음으로 타보는 택시가 신기했다. 외국의 시선이 두려웠던 일제는 호주인 선교사와 교사는 석방했다.
▶학교는 ‘교회 옆에 학교’라는 개신교의 개척자적 의지를 반영하여 부산진교회 옆에 세워졌다. | 구둘래 기자
# 고문에 굴하지 않다
잠깐의 해방구였고 대가는 가혹했다. 10대의 여학생들은 고문에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경찰은 뺨을 때리고 발을 비틀며 선동자를 대라고 했다. 응수는 “내가 내 나라를 내어달라고 하는데 무엇이 잘못이며 주동자가 어디 있겠느냐”고 했다가 기절하도록 얻어맞았다. 명진은 희미한 전깃불에 퀴퀴한 냄새가 겁이 나서 여간수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다가 기절했다. 그나마 울산 대부호인 아버지가 변호사를 대어 6개월 징역을 받았다. 교사인 경애와 시연은 2년, 학생들은 6개월을 구형받았다. 4월 28일 선고 공판에서 1년 6개월과 5개월로 확정되었다.
경찰에 잡혀갔던 교사 임말이와 학생 망이는 웬일로 풀려났다. 형부인 형사에게 모의 사실을 이야기하여 기소 면제된 것이었다. 학생들은 이 둘을 쫓아내기 위해 10일간 동맹 휴학을 단행한다. 서슬이 퍼렇자 망이는 자퇴하고 말이는 학교를 그만둬야 했다. 반수 등 졸업반 학생들은 만세운동 때문에 졸업식을 치르지 못했다. 학생(7회 졸업)들은 다음 해 후배들(8회)까지 졸업시키고, 선생들의 출소를 기다렸다가 졸업식을 치렀다.
재판에서 형을 받은 일신여학교 교사와 학생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오미일 부산대 교수 ‘부산진일신여학교의 3·11 만세시위와 여성운동’). 주경애, 박시연(이상 교사), 박정수, 김응수, 이명시, 김반수, 김봉애, 김복선, 송명진, 심순의, 김난줄(이상 학생) 전체 11명.
부산/구둘래 <한겨레21>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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