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0일 오후 4시경, 대전 유성구 소재 한국지질자원연구원직원들이 가방을 싸기 시작했다. 이곳은 하루 8시간 근무를 자유롭게 선택하는 ‘시차출퇴근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직원들은 출근 시간을 오전 7시에서 10시 사이로 정하고, 퇴근은 오후 4시부터 7시까지 알아서 결정한다. 다만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까지는 필수근무시간으로 정해져 있다.
그러다 보니 오후 4시 퇴근은 자연스러운 풍경이 됐다. 일찍 출근한 직원들은 상사 눈치 볼 필요 없이 가벼운 인사만 하고 퇴근했다.

▶ 일찍 출근하고 오후 4시 퇴근을 준비하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직원들 ⓒC영상미디어
이들은 “교통체증으로 인한 시간 낭비가 없다, 필요할 때 집중적으로 일할 수 있어 능률이 오른다, 아침에 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출근할 수 있어 좋다”며 시차출퇴근제도의 장점을 설명했다.
아이를 맡겨놓은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자기계발에 적극적인 직원들은 학원 수업을 듣는 등 퇴근 후 풍경이 저마다 다양하다. 무엇보다 ‘자율’로 본인의 업무를 수행하는 분위기가 정착돼 업무 효율이 높아졌다는 점이 장점이다.
본격적인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 근무 분위기와 관련, 한 연구원은 “저마다 일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시간 안에 업무를 완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며 “최대한 자율적으로 일하는 것이 성과 측면에서도 좋다”고 덧붙였다.
자율근무로 업무 효율 높아져
푸른 바다와 초록빛 산, 다채로운 토양, 하얀 구름 등 현재 지구의 아름다운 모습을 갖추기 위해 46억 년이 걸렸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지구의 지난 46억 년의 역사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기관이다. 구체적으로 국내외 육상·해저 지질 조사, 지하자원 탐사·개발·활용, 지질재해 및 지구환경 변화를 연구하고 있다.

▶ 시차출퇴근제 시행으로 오후 4시 어린이집에서 아이와 함께 퇴근하는 직원 ⓒC영상미디어
대전 대덕연구단지에서 생활하는 연구원들 역시 가장 큰 고민은 아이를 키우는 일이다. 특히 여성 연구원들이 늘어나면서 이들의 경력단절을 막는 것은 조직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도 중요하다. 이진원 인력경영실장은 “일·가정 양립 지원을 위해 아이 키우는 직원들을 위한 다양한 인사제도를 시행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우선 만 8세 이하 자녀를 둔 연구원의 경우 최대 1년까지 주당 15~30시간 범위 내에서 단축 근무를 할 수 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이에게 집중적으로 신경 써야 하는 부모를 위한 제도다. 생후 1년 미만의 아이가 있는 경우, 1일 1시간 동안 육아시간을 추가로 주고 있다.
또 초등학교 1학년 입학생을 둔 연구원의 경우, 3월 한 달 동안 부서 업무의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노동시간 1시간 단축을 허용하는 ‘입학기 자녀 돌봄지원’ 제도도 운영하고 있다.
연구원 측은 “요즈음 여성은 물론 남성 직원도 육아에 적극적인 경우가 많다”며 “최대한 자율적으로 아이를 돌볼 수 있도록 조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시차출퇴근제도 역시 비슷한 취지에서 시행 중이다. 단순히 노동 시간만 줄이는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이 업무의 효율을 높이는 것에 시행 취지가 있다.
정부는 연구개발 분야에서 노동시간 단축이 자연스럽게 정착되도록 힘쓰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7월 1일부터 시행하는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연구개발 분야의 혼선을 최소화하고, 노동시간 단축 현장 안착을 지원하기 위해 ‘노동시간 단축 대응 TF’를 운영하고 있다.
신설된 TF는 노동시간, 노동 형태, 인력관리 현황 등을 모니터링하고 애로·건의 사항을 지속적으로 청취한다. 이를 통해 선택근무제, 재량근무제 등 유연근무제를 활용하거나, 노동자의 근무 여건을 개선해 생산성을 제고한 모범 대응기관 사례를 발굴해 전파시킨다. 또 노동시간 단축 시행 이후에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파악해 대응 방안 역시 마련할 예정이다.
2018년 4월 기준으로 전체 연구개발 분야 종사자는 39만 명으로 7월부터 적용되는 종업원 300인 이상 대상기관의 종사자는 16만 명이다.
현재 기업부설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연구직 노동자의 평균 근무시간은 주 45시간 내외로 법정 최대 노동시간은 넘지 않으나, 연장근무가 집중되는 특정 기간(신제품 개발, 공정 개선 등)에 일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에서 사업장별 상황에 맞는 유연근무제를 도입하고, 부족한 인력이 생기면 추가 채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선택근무제 등 다양한 근무 형태 필요
정부출연연구기관의 경우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 가지 업무를 수행하는 연구 인력의 특성상 근무시간을 정확히 측정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업무 특성상 특정기간에 52시간을 초과해서 근무해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연구개발 분야의 노동시간 단축의 정착을 위해 효율적인 운영 방식을 놓고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업무 특성을 고려해 개선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한국지질자원연구원 관계자는 “과학 분야 연구는 트렌드에 민감해 육아 등의 이유로 연구에서 1~2년 물러나 있으면 뒤처질 수밖에 없다”며 “다양한 근무 형태를 개발해 연구원들이 선택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단순히 일을 줄이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일이 많을 때 몰아서 할 수 있는 유연한 노동환경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실제 한국지질자원연구원은 시간선택형 근무를 인정하고 있다. 육아, 자기계발 등을 위해 오전, 오후를 선택해 반만 근무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것이다. 다만 이 경우 임금 역시 비례해 줄어든다.
이정현│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