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이 분단되고 73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분단의 아픔만큼이나 이산가족의 한 역시 깊어지고 있다. 대한적십자사가 2013년 제작한 10분가량의 옥선봉(당시 87세) 할머니의 영상편지는 그 아픔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황해도 연백이 고향인 옥 할머니는 6·25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겨울밤, 작은아들만 둘러업고 남쪽으로 내려왔다. 치맛자락을 붙들며 같이 가겠다는 여섯 살 난 큰아들 석우를 “곧 돌아오마”라고 떼어놓은 채…. 금세 돌아가리라던 고향길은 73년간이나 막혔고, 아들 석우는 70대 할아버지가 되고 말았다.
방송프로그램 제작업체 비전마스타는 대한적십자사의 의뢰를 받아 2017년부터 북녘 가족에게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영상편지를 제작하고 있다. 통일부와 적십자사가 2005년부터 신청을 받아 제작한 이산가족 영상편지는 총 1만 9541편, 올해 비전마스타가 제작한 1500편을 포함하면 모두 2만여 편에 이른다.
이산가족의 생전 모습을 영상으로 담아 기록·관리하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북측과 합의 후 북측 가족에게 전달한다는 목표로 사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북에 전달된 영상편지는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일곱 차례에 걸쳐 이산가족 화상상봉으로 이뤄진 20편뿐이다. 통일부에 따르면, 이산가족 생존자 5만 6000여 명 중 90세를 넘긴 고령자는 1만 1929명(21.1%)으로 다섯 명 중 한 명이 90세 이상 고령자다.
윤현 비전마스타 부사장은 “세상을 떠나는 이산가족 노인분들이 한 해 3800명에 달한다”며 “이분들이 옷을 단장하고 카메라 앞에 숙연하게 앉는 모습을 보면, 남북 간에 영상편지 교환만이라도 서둘러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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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김인선 프로듀서, 송슬기 프로듀서, 김솔이 프로듀서, 구민경 프로듀서 ⓒC영상미디어
보이스피싱 업체 아니냐는 오해도 받아
영상편지는 이산가족들의 생전 모습을 담아 기록으로 보관하고,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이를 북측 가족에게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제작하고 있습니다. 통일부 남북이산가족찾기 이산가족정보통합시스템(https://reunion.unikorea.go.kr)에 신청하면 되고, 관련 영상편지를 열람할 수도 있습니다. 북에 가족을 두신 분들에겐 상봉하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을 담을 수 있을 것 같아 좋은 취지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달 시기가 좀 불투명하다는 것이 안타깝지만요. 이산가족들을 찾아뵙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10분 분량으로 미리 편지에 적어보시라고 권합니다. 젊은 사람도 마이크 앞에 서면 떨리잖아요. 이분들께 전화를 드리면 “보이스피싱 아니냐”고 묻는 분도 계시고, “어느 기관에서 왔느냐”며 신분증을 요구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방송카메라를 꺼내놓으면 그제야 안심하시죠. KBS ‘이산가족찾기’ 방송처럼 자기소개, 헤어진 경위, 찾는 가족, 전할 말 등을 담습니다. 처음엔 서먹해 하시다가 나중엔 중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말씀을 많이들 하세요. 식사하고 가라고 붙잡는 분도 많습니다.
김인선(24) 프로듀서
이산가족 영상편지, 분단의 아픔을 담는 ‘그릇’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아픔, 살아 있어도 만나지 못하는 그 아픔을 이해하실 수 있나요? 이산가족 영상편지를 제작하면서 그분들이 불가항력 현실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저 그때의 행동을 후회하고 원망하는 일밖에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산가족 영상편지를 분단의 아픔을 담는 ‘그릇’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아픔을 가장 크게 느끼는 이산가족을 위해 통일부와 대한적십자사가 2005년 영상편지 제작을 시작했고, 2005년 실시된 남북 간 화상상봉 현장에서 황복숙 할머님은 꿈에 그리던 언니들을 만났습니다. 당시 화상상봉은 많은 이산가족들에게 위로가 됐습니다. 애초 대한적십자사는 2012년 수요조사를 완료해 2015년까지 모든 촬영을 마쳤지만, 추가로 원하는 이산가족이 많아 8000명에게 연락해 1500편을 더 촬영했고, 현재 후반부 작업을 진행 중입니다. 하루빨리 이산가족 상봉행사가 재개되고, 이 행사가 물꼬가 되어 영상편지를 매개로 통일을 앞당기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합니다.
김솔이(24) 프로듀서
최대한 예의 갖추고 촬영…
이산가족 죽음 소식 들으면 마음 아파
안타까운 것은 이산가족들이 비극적 결말을 이야기할 때입니다. 찾는 가족분이 사망했다는 말을 들을 때죠. 80대의 한 할머님은 흥남 철수 때 이모부가 임신한 부인과 자녀들은 흥남에 남기고 자신만 배에 태워 남쪽으로 보냈답니다. 나중에 수소문해보니, 이모부와 가족들은 그곳을 빠져나오다 인민군에 붙들려 모두 처형당했다고 합니다. 당시 할머님과 떨어졌던 이모부의 자녀들, 특히 사촌언니가 살아 있을까 궁금해 영상편지를 찍는 내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럴 때 가장 마음이 아프죠. 보통 한 시간가량 촬영하지만, 안타까운 소식을 전할 때는 30분 이상 숨도 쉬지 않고 속사포처럼 말씀하십니다. 그때는 차마 말을 끊을 수가 없어요. 편지를 읽다가 글씨가 보이지 않으니 울먹이기도 하시고요. 저희 촬영팀은 가급적 어르신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려고 합니다. 특히 강원 횡성을 방문했을 때는 할머님이 밤을 삶아놓고 기다리시기에 한 시간 동안 같이 밤을 까먹으며 대화를 나눴습니다. 그러고 나서 촬영을 시작하니 훨씬 더 좋은 영상을 찍을 수 있었습니다.
송슬기(21) 프로듀서
영상편지에 등장한 손주들 모습 보고 희망 느껴
통일부가 남북 이산가족의 화상상봉을 위해 내년에 85억 원의 예산을 증액했다는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정부에서 영상편지 제작에도 더욱 신경써주셨으면 합니다. 비전마스타가 제작한 영상편지들을 보면, 이미 상봉했던 북의 가족이라도 보고 나니 더 그립다고 한 영상편지도 있고, 남쪽에서 가족들의 결혼식, 행사, 행복한 모습을 사진과 함께 전하거나 남쪽 가족들을 소개하는 내용도 다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영상편지에 수줍게 등장하는 어린 손주, 증손주들은 언젠가 세대를 넘어 이어질 만남을 약속하는 듯해서 새로운 희망을 느꼈습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해 DSLR(일안반사식) 카메라 한 대를 들고 산동네를 올라 인터뷰하거나 병원에서 촬영한 적도 있습니다. 만나는 분들마다 “우리 세대는 힘들더라도 아가씨 세대에선 남과 북이 서로 만날 수 있겠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격동의 현대사를 교과서에서만 보고 자란 저희 세대는 이분들을 만나면서 생생한 역사공부를 하고 있는 셈입니다. 한 분 한 분이 다 살아 있는 우리 현대사의 한 조각이라고 생각합니다.
구민경(24) 프로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