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 KT 사옥 근처에서 ‘5세대(5G) 이동통신 버스’에 탑승한 승객들이 가상현실(VR)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5G 실감형 미디어 서비스를 체험하고 있다. | 연합
정부가 우리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성장 동력을 확보하는 데 필수적인 토대라고 판단하는 ‘규제 혁신’ 정책이 본격 시행에 들어갔다. 전문가들은 ‘한국형 규제 샌드박스’ 도입이 규제의 불확실성과 인·허가 과정의 비용을 크게 줄여 새로운 먹거리와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것으로 전망했다.
규제 샌드박스 도입
규제의 존재 여부를 빠르게 확인할 수 있는 ‘규제 신속 확인’ 제도 등 ‘규제 샌드박스(sandbox)’ 3종 제도가 1월 17일부터 도입됐다. 기업들이 신기술과 관련한 규제가 있는지 문의한 뒤 정부가 30일 안에 회신을 하지 않으면 규제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고 제품을 시장에 출시할 수 있게 됐다. 안전성과 혁신성이 뒷받침된 신제품·신서비스인데도 관련 규정이 모호하거나 불합리해 시장 출시가 어려운 경우 임시 허가를 통해 출시를 앞당기게 했다. 또한 관련 법령에 금지 규정이 있어서 신제품·신서비스의 사업화가 제한될 경우에는 일정한 조건하에 기존의 규제 적용을 받지 않는 실증 테스트(실증 특례)도 가능해졌다.
규제 샌드박스 시행 첫날인 17일까지 이 제도의 혜택을 받기위해 기업들이 임시허가나 실증특례를 신청한 사례는 총 19건이다.
정보통신기술(ICT)융합 분야에는 KT와 카카오페이가 각각 '공공기관 등의 모바일 전자고지 활성화'를 위한 임시허가를 신청했다. 산업융합 분야 대표 사례는 현대자동차의 '도심지역 수소차 충전소 설치 요청'이다. 그동안 규제 때문에 수소차 충전소 설치가 불가능했지만 이번 규제 샌드박스 제도의 실시로 일부 지역에 충전소를 설치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규제 획기적 전환, ‘먼저 시도하라’
문재인 대통령은 1월 10일 새해 기자회견에서 ‘규제 혁신’을 통한 신산업 발전을 강조했다. 문 대통령은 “규제 혁신은 기업의 투자를 늘리고 새로운 산업과 서비스의 발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면서 이번에 새로 시행되는 “한국형 규제 샌드박스가 신기술·신제품의 빠른 시장성 점검과 출시를 도울 것”이라고 했다.
‘규제 샌드박스’란 어린이들이 안전하게 뛰어놀 수 있는 모래 놀이터처럼, 스타트업 기업들이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자유롭게 만들 수 있도록 기존 규제를 일정 기간 면제하거나 유예함으로써 혁신적인 사업 모델이 가능한 환경을 말한다. 신산업·신기술 분야에서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놓아도 복잡하거나 불합리한 규제로 사업 단계에서 좌절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 도입됐다. 영국이 핀테크(금융+기술) 산업 육성을 위해 2015년 처음 도입했고 호주, 싱가포르, 홍콩, 말레이시아, 캐나다 등에서도 실시됐다. 신경희 자본시장연구원의 연구원은 “기존 규제에 어떻게 적합한지를 심사하는 게 아니라, ‘먼저 시도하라(Try First)’는 개념이란 점에서 규제 패러다임의 획기적 전환”이라고 평가했다.
정부는 그동안 국무총리 산하 국무조정실 주관으로 산업통상자원부 등 4개 관계부처 합동 태스크포스(TF)를 통해 규제 샌드박스 추진 계획을 논의해왔다. 지난해 3월 ‘규제혁신 5법’이 국회에 발의됐고, 이 가운데 행정규제기본법을 제외한 4개 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산업통상자원부와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각각 주관하는 산업융합촉진법·정보통신융합법은 1월 17일부터 시행됐다. 금융위원회와 중소벤처기업부가 각각 주관하는 금융혁신법·지역특구법은 오는 4월부터 시행된다.
‘신청-심의-실증’ 맞춤형 지원
정부는 사업자의 ‘신청-심의-실증’으로 이어지는 ‘전 주기별 맞춤형 지원정책’을 진행한다. 부처별로 사전 상담 전문기관을 지정해 선정된 기업은 일대일로 기술·법률 조언을 받을 수 있다. 우수 실증 특례사업은 시제품 제작, 데이터 분석 등 실증사업 비용을 지원토록 했다. 중소기업의 보험가입 부담 경감을 위해 보험료 일부도 지원된다. 기존 사업자와 갈등이 예상되는 경우에는 이해관계자 간 사전 논의·조정을 위한 갈등조정위원회를 운영한다. 이련주 국무조정실 규제조정실장은 “유연한 규제 적용으로 기업의 기술혁신과 혁신창업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것”이라며 “소비자는 신제품·서비스 선택권이 확대되고, 정부는 합리적으로 규제를 정비할 수 있게 됐다”고 설명했다.
정부는 앞으로 규제 특례 부여 여부를 심사하는 부처별 규제특례심의위원회를 분기별로 1회 이상 개최할 예정이다. 시행 첫 6개월 동안에는 제도 안착을 위해 심의위를 수시로 열 계획이다. 산업부와 과기부는 심의위원회 구성과 운영계획, 사전 수요조사 결과 등을 발표하고, 다음 달 1차 심의위원회를 개최한다. 두 부처의 사전조사 결과 신청 희망 기업 수요는 20건가량으로 확인됐다. 규제 샌드박스의 첫 사례는 도시지역 수소충전소 설치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사전조사를 통해 규제 샌드박스를 적용할 10개 사례를 발굴한 산업부는 “규제 샌드박스 1호 사업은 미래 친환경차를 위한 수소충전소 설치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산업부는 현재 사업자들로부터 강남 탄천 등 서울 시내 6곳에 대한 수소충전소 설치 요청을 받아놓은 상황이다. 수소충전소는 수소전기차 확산을 위해 필요한 인프라로, 프랑스 파리 도심인 샹젤리제 거리 인근에 설치돼 있을 정도로 안전성이 검증되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 정부 장관(가운데)이 1월 16일 오후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부총리-경제단체장 간담회’에서 경제단체장들과 ‘제 1차 혁신성장전략회의’를 열었다. | 한겨레
10여 곳 자유특구, 201개 규제 특례
하지만 국내에서는 수소충전소가 고압가스 시설로 분류돼 사실상 상업지역이나 주거지역 안 설치가 불가능했다. 현재 운영 중인 수소충전소 15곳은 모두 접근성이 떨어지는 도시 외곽에 있다. 다음 달 1차 심의위에서 도심 수소충전소의 규제 샌드박스 적용 여부를 최종 결정한다. 위원회를 통과해 특례를 부여받으면 곧바로 도심에 충전소를 설치할 수 있고, 이후 관련 법령을 정비해 정식 허가를 받게 된다.
중소벤처기업부도 지역별 순회 설명회 등을 거쳐 4월 중 규제자유특구위원회를 개최해 운영계획 등을 의결하고 7월에는 규제자유특구를 지정하기로 했다. 규제자유특구는 지난해 정부가 지역의 균형발전을 위해 제안했다. 규제자유특구는 신청 ‘기업’이 기본이 되는 다른 경우들과 달리 ‘지역’을 기반으로 신청을 받고, 신청 가능한 지역은 비수도권으로 제한될 전망이다. 특구로 지정되면 참여 사업자는 201개 규제 특례 혜택을 받게 되며, 혁신사업 육성을 위한 재정·세제지원도 받을 수 있다. 현재 14개 시·도가 47개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중기부는 특구가 지역투자 활성화와 일자리 증가 등의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하고 10군데 이상 지정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성녹영 중기부 지역혁신정책과장은 “특구는 많은 기업이 지역에 내려와 투자하고 규제 없는 환경에서 지역경제에 기여하라는 취지”라며 “7월 이후에도 추가로 특구를 지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금융위원회도 오는 4월 법 시행 즉시 심의위원회가 개최되도록 이달 말부터 사전 신청을 받아 2∼3월에 예비 심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핀테크 기업과 금융사들은 혁신금융서비스 지정 신청을 할 수 있다. 혁신금융서비스로 지정되면 인·허가, 지배구조, 업무 범위, 건전성, 영업 행위, 사업자 등에 대한 감독·검사 등에서 2년의 테스트 기간 동안 규제가 면제된다. 문 대통령은 새해 기자회견에서 “금융혁신법이 다양한 혁신적 금융서비스를 만드는 기반이 될 것”이라며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제도를 먼저 시행한 외국의 사례를 보면, 규제 샌드박스는 새로운 기업을 세워 일자리를 창출하고 혁신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영국 금융청(FCA)은 2017년 10월 발표한 규제 샌드박스 평가 보고서에서, 테스트에 참여한 기업의 80% 이상이 미인가 스타트업이라고 밝혔다. 혁신을 통해 소비자의 효용을 높이고 비용 절감으로 소비자에게 편익을 주는 기술을 보유한 기업이 다수 포함됐다. 영국 당국은 금융 소외자를 대상으로 다양한 테스트를 진행해 금융 취약계층의 편익을 증대하는 기술을 정책에 활용할 예정이다. 김보영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행동주의적 이론을 기반으로 한 채무조정 서비스, 상환 능력이 없는 채무자에 대한 컨설팅 등에 신기술을 활용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국민의 생명·안전 침해 땐 제한
일본은 2018년 6월 생산성향상특별조치법 제정을 통해 규제 샌드박스 제도를 국가전략에 반영했다. 사물인터넷(IoT)과 빅데이터, 인공지능(AI), 핀테크 등 신기술 사업 전 분야가 적용 대상이다. 생산성 향상에 기여하는 사업 모델의 채택, 생산 공정의 고도화 등 시스템까지 ‘신사업 활동’으로 간주해 제도를 적용한다.
다만 규제 완화로 인한 리스크는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영국은 기업에 신기술 도입에 따른 위험관리와 소비자 보호장치를 요구하고 피해를 최소화하는 테스트를 실시했다. 서정호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규제 샌드박스의 안착을 위해서는 각 사업자의 제공 서비스에 내재된 위험에 상응하는 다양한 소비자 보호방안을 강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우리 정부는 규제 완화에 따른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우선 심의위 심사 때 국민의 생명·안전 등에 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판단되면 규제 특례 부여를 제한하기로 했다. 또한 실증 테스트 진행 과정을 지속적으로 점검해 문제가 예상되거나 발생할 경우 즉시 규제 특례를 취소한다. 이 밖에 사업자의 사전 책임보험 가입을 의무화하고, 손해가 발생할 경우 고의나 과실이 없었다는 것을 사업자가 입증하도록 함으로써 사후 책임을 강화했다. 문 대통령도 “규제가 풀림으로써 입게 되는 피해에 대해서는 적절한 보상이 주어지도록 정부가 적극 노력해나가겠다”고 했다. 정부는 관계부처 합동 TF를 통해 시행 상황을 점검해가며 제도를 보완할 계획이다.
한광덕 기자
지금 정책주간지 'K-공감' 뉴스레터를 구독하시고, 이메일로 다양한 소식을 받아보세요.
뉴스레터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