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는 안전한 먹거리가 걱정이다. 원산지가 정확한지, 제초제가 과하게 사용되지는 않았는지…. 반면 생산자는 판매처 확보가 걱정이다. 제값을 받지 못하면 어쩌나, 다 팔 수는 있을까…. 적어도 농산품에 대해서는 이런 걱정을 덜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소비자와 생산자가 상생하는 ‘농사펀드’를 통해서다. 농사펀드는 농산물의 재배와 수확을 소비자와 생산자가 함께 책임지는 업그레이드된 직거래 방식이다.
시골에 사는 부모님이 도시의 자녀에게 쌀, 감자, 참기름 등을 보내주는 광경은 참 흔했다. 이렇게 부모님이 직접 재배한 작물은 조금 투박하게 생겼어도 믿을 수 있는 먹거리이고 부모님의 땀과 정성이 묻어나 맛도 두 배다. 농사펀드는 시골 부모님이 보내주는 작물처럼 믿을 수 있는 농산물을 제공한다. 도시의 소비자와 시골의 농민이 이웃사촌이 되기 때문이다.
농사펀드는 농산물과 크라우드펀딩을 결합한 것이다. 크라우드펀딩은 온라인에서 프로젝트를 제시해 불특정 다수로부터 소액의 투자금을 조달받는 방식이다. 즉 농민이 농산물에 대한 계획을 제시하면 소비자들의 투자가 이뤄지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 농민은 품종, 가격 등을 밝히고 농업 철학과 개인적인 사연을 소개하기도 한다. 소비자는 농산물에 담긴 내용을 확인하고 투자자가 된다.
목표 자금이 마련되면 농부는 농사를 시작한다. 소비자는 작물 상태와 농사짓는 과정을 인터넷으로 확인한다. 또 온라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농사를 함께 짓고 농작물이 잘되면 함께 기뻐하며 감정을 공유한다. 수확한 농산물은 소비자에게 상환된다. 작황에 따라 수확물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지만 소비자는 말 그대로 투자를 했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간단해 보이는 이 방식은 농민과 소비자가 상생하는 방안이 될 수 있다. 농민에게 영농자금을 마련해주고 농산물로 갚게 해 부담을 덜어주기 때문에 안정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 있다. 판매 수량을 예측하고 판매할 곳도 확보해놓아 걱정 없이 농사에 전념할 수 있다. 농사짓기 전 소비자의 반응을 확인해보는 기회도 된다.
소비자에게도 이득이다. 농사짓는 과정이 투명하게 공개되니 자신이 먹을 먹거리의 재배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일반 소매와 달리 재배 과정을 지켜봤기에 산지의 풍경과 농민의 정성이 느껴진다. 시중에서 파는 예쁜 모양이 아니어도 손이 간다. 중간 유통 단계를 거치지 않고 집에서 농산품을 받아본다는 장점도 있다.
청양된장을 만드는 농민 유정녀 씨는 “농부를 믿고 선입금을 한 후 2~3개월을 기다려줄 사람이 있을지 걱정했다”면서도 “농사펀드를 통해 얼마만큼의 장을 담궈야 할지 정하고 나니 판매와 재고 걱정 없이 장 만들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햇농산물을 받아본 소비자 박미진 씨는 “기왕 사 먹을 걸 대형마트보다 농사펀드를 이용하기로 했다”며 만족감을 표했다.

▶ 농부들이 고추밭에서 빨갛게 익은 고추를 수확하고 있는 모습 ⓒ조선DB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는 ‘신뢰’가 포인트
농사펀드 1호는 2013년 충남 부여의 쌀 농가다. 둠벙과 가재를 활용해 친환경 농사를 짓는 곳이다. 당시 25명의 투자자에게 250만 원을 받아 시작한 펀딩은 아쉽게도 목표 금액을 달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농민은 투자자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계속 농사를 짓고 수확물을 나눴다. 둠벙 쌀은 투자자의 입소문을 타면서 농사펀드가 확대되는 계기가 됐다.
투자 금액은 1만~10만 원까지 상품마다 다르다. 투자 방식에 따라 상환 농산물의 품목과 구성도 다르다. 상품 형태는 쌀, 배, 포도, 멸치, 생닭 등 1차 농산품부터 시리얼바, 치즈, 우엉차, 잼 등 2차 가공품류까지 다양하다. 체험권, 숙박권 등도 이용 가능하니 자신에게 맞는 구성에 투자하면 된다.
현재 농사펀드에 참여하는 농민은 약 300명, 투자자는 약 1만 2000명이다. 재투자율도 높다. 농민의 경우 사업 초기 6.5%에 불과하던 재투자율이 2017년 1분기 기준 28.6%까지 상승했다. 특히 멜론, 복숭아와 같은 제철 과일은 전년도 투자자의 80%가 재투자에 뛰어들었다. 투자자의 49%도 재구매를 결정했다. 2016년 기준 농사펀드의 매출액은 5억 원. 참여 농가는 펀드당 평균 300만~500만 원의 수익을 올렸다. 안심하고 먹을 수 있다는 ‘신뢰’에 따른 결과라 할 수 있다. 한 농가당 다수의 펀드를 진행하니 수익도 천차만별이다.
농민이 얻는 부가 이익도 있다. 바로 자신의 농업 신념을 지킬 수 있다는 점이다. 유통시장에서 소비자가 선호하는 농산물은 대개 크고 예쁜 것이다. 그래서 성장 호르몬제나 화학비료를 사용하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평소에 이를 거부해온 농민은 유통시장에서 외면받기 일쑤다. 농사펀드의 농산물에는 제초제, 유전자 조작 원료, 합성보존료 등을 사용할 수 없다. 모든 농산물의 재배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니 적어도 소비자를 기만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으며, 이는 농민의 자부심과 상품의 질 향상으로 이어진다.
제품에 대한 다양한 시도도 가능하다. 농사펀드에서 판매했던 명란젓갈 펀드는 발색제와 첨가물 제거, 냉장 상태 배송 등 다양한 시도를 했다. 이렇게 해서 많은 소비자에게 인정받은 명란젓갈 업체는 현재 대형마트, 소매점 등으로 판로를 확장했다. 농사펀드가 실험의 장으로 활용돼 주류시장으로 발을 넓힌 대표적 사례다.
농사펀드 이용하기
농민과 소비자가 재배부터 수확까지 함께 농사를 짓는 농사펀드에 참여하려면 농사펀드 누리집(www.farmingfund.co.kr)에 접속한다.
소비자 : 이메일과 연락처만 있으면 무료로 가입할 수 있다. ‘펀드상품보기’ 게시판에 소개된 농민들의 상품을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상품에 투자하면 된다. 투자 금액에 따라 돌려받는 상품의 구성이 다르니 꼼꼼히 읽어본다. 재배 기간 동안 틈틈이 작황 상태를 확인할 수 있고 수확이 완료되면 집으로 농산물이 배달된다. 재배 기간을 기다릴 수 없는 소비자는 농사펀드 내의 ‘농편상회’를 이용하면 된다. 농사펀드에서 사전 검증을 완료한 먹거리를 상시 구매할 수 있다.
판매자 : ‘농부되기’ 게시판을 통해 이름, 연락처, 주요 작물과 생산량, 필요 금액과 용도, 상품의 특징, 투자 상환 계획 등을 제출한다. 접수가 끝난 품목은 농사펀드의 심사 과정을 거쳐 펀딩이 결정된다. 농사펀드에 입점하려면 제초제를 사용해선 안 된다. 농사펀드는 수시로 현장 검증을 진행하며, 사전 협의 방식을 위반하는 경우 펀딩 금액을 전액 회수한다.
문의 : 070-4024-0742, contact@farmingfund.co.kr
“농민과 소비자를 잇는 새로운 형태의 농협 될 것”
Q. 농사펀드를 시작한 계기는?
영농자금 마련과 판로 문제로 힘들어하는 농민들의 어려움을 알게 됐다. 자신의 농업 철학을 지키다가 현실적인 어려움에 농사를 포기하는 모습을 보며 점점 안전한 먹거리가 설 곳이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 유통 구조에서 자금의 흐름을 역전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해외의 킥스타터(Kickstarter)라는 크라우드펀딩 서비스를 보고 우리 농촌에도 이를 적용하게 됐다.
Q. 농사펀드의 가장 큰 장점은?
농민의 입장에서는 유통시장에서 선호하는 크고 예쁜 농산물보다 농업 철학을 지키며 건강한 먹거리를 수확할 수 있다. 이는 농사를 짓기 전에 영농자금을 마련하고 판로를 확보하기 때문이다. 또 자신을 지지하는 소비자가 누군지 알고 농사를 짓기 때문에 더욱 책임감을 갖게 된다. 농민의 이익은 소비자의 이익으로 돌아간다. 소비자는 농민의 생각을 읽고 농산물을 선택할 수 있으며, 신선하고 안전한 농산물을 시중가보다 10~20%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소비자의 소비가 농민의 자립을 돕는 데 쓰인다는 의의도 있다.
Q.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은?
딸기, 복숭아, 자두 등 제철 과일과 쌀, 달걀, 젓갈 등 생활 밀접도가 높은 식품의 인기가 좋다. 가공식품 등 아이들의 간식거리도 자주 찾는 품목 중 하나다.
Q. 향후 계획은?
농사펀드를 유통뿐 아니라 금융, 교육 등으로 분야를 확장할 계획이다. 농민과 소비자를 잇는 또 다른 형태의 농협이 되고자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농촌과 도시의 거리감을 좁혀야 한다. 농촌의 생산자와 도시의 소비자 사이에서 중간 역할을 하는 농촌 기획자로서, 앞으로 우리 농촌의 활발한 발전을 위해 이런 농촌 기획자들을 양성하는 일도 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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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범 | 농사펀드 대표이사
선수현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