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존 경력과 무관한 자격증은 무용지물
2015년 현재 한국인 평균 수명은 82.1세다. 1970년 62.3세 에서 약 20년이 늘었다. 고령인구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65세 이상 인구가 7%를 넘으면 ‘고령화사회’, 14% 이상이면 ‘고령사회’, 20% 이상이면 ‘초고령사회’라고 하는데 2000년 고령화사회가 된 우리나라는 2018년엔 고령사회, 2025년엔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다. 고령화사회에서 고령사회로 전환되는 기간이 미국 72년, 독일 40년, 일본 24년인 것에 비해 우리나라는 18년으로 훨씬 빠르다.
문제는 수명 연장과 고령화 현상이 가속되고 있지만 노후 준비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한국인이 완전히 은퇴하는 나이는 72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늦다. 이들이 근로를 희망하는 주된 이유가 ‘생활비에 보태기 위해서’라는 조사 결과를 보면, 늘어난 수명에 비해 노후 대비가 부족한 상황임을 알 수 있다.
700만 명의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가 본격 은퇴 시기에 진입했지만, 지난해 가계금융복지조사 결과 5가구 중 1곳이 여전히 노후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갑작스러운 은퇴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향후 생활 목적과 방향을 계획하는 ‘은퇴 안전기’를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연재기획 ‘백세시대를 산다’에서 재무, 건강, 대인관계, 여가, 웰다잉 등 분야별로 안정된 노후 대비 방안을 점검해본다. | 편집자주
55세 이상은 법적으로 ‘고령자’다. 하지만 기대수명 연장과 고령화 심화로 이제 ‘55세 고령’은 낯설게 느껴진다. 이에 따라 정부는 올 하반기부터 법적으로 55세 이상을 지칭하는 용어를 ‘장년’으로 바꾸기로 했다. 60세 정년 시기를 65세로 연장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이러한 현실을 반영하듯, 노동시장에서는 55세 이상 ‘장년층’의 참여가 여전히 활발하다. 지난해 기준 우리나라 55~79세 인구는 전체 인구의 28.6%인 1239만 7000명이다. 그중 55.1%인 683만여 명은 여전히 경제활동에 참가하고 있었다. 고용률도 53.7%로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고용구조를 들여다보면 높은 고용률을 긍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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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ㅣ 통계청
“내 노후 대비는 생각할 수 없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할 것”이라고 말하는 김경재 씨(가명·68)는 아파트 경비원 10년차다. 아동도서를 판매하는 그의 회사도 출판업계에 닥친 불황을 비껴가지 못했다. 결국 20년 가까이 다니던 직장을 갑작스럽게 잃었다. 그는 “당시에는 보험이나 연금을 넣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고 한탄했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노년을 향해 가고 있었다. 몇 달을 방황하던 중 주변의 추천으로 아파트 경비원을 하게 됐다. 1일 24시간, 하루 교대근무를 하며 한 달 15일을 일한다. 24시간을 꼬박 일하며 보장되는 휴식시간은 겨우 점심, 저녁 각 1시간씩. 이마저도 계속 이어지는 택배 관리로 제대로 쉴 수 없다. 1년 단위로 계약하는 고용 불안정도 심각하다. 그러나 3개월 단위로 계약하는 곳도 있다며 그나마 자신은 사정이 괜찮은 편이라고 말한다. “지난번 경비원 1명을 모집하는데 4~5명씩 몰려 경쟁이 치열했다”고 설명하는 김 씨도 계약기간 만료로 6개월 후면 다른 곳을 찾아봐야 할지 모른다.
그가 계속 일하고 싶은 이유는 175만 원의 수입 때문이다. 이 돈이 없다면 임대주택 관리비와 생활비, 아내의 병원비 등을 감당할 수 없다. 가끔 손주들에게 용돈 주는 즐거움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일반적으로 퇴직을 경험하는 50대는 자녀의 학비와 결혼 자금, 부모 봉양 등의 비용 문제와 마주한다. 생애주기 중 가장 많은 돈이 필요한 시기다. 김경재 씨 또한 “자녀의 결혼 비용 등으로 자신의 노후 대비는 생각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러한 현실 때문에 중장년층은 퇴직 후 다시 노동시장에 뛰어들고 있다. 퇴직은 있어도 은퇴는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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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노인이 무료 사진촬영 부스에서 재취업을 위한 증명사진을 찍고 있다. 중장년일자리센터, 노인 일자리박람회 등에서 제공하는 무료 사진촬영 서비스는 의상 및 소품 대여도 해주고 있어 구직자들에게 인기가 많다. ⓒ연합
장년층 퇴직자 대부분 저임금·단순노무직으로 하향 이동
문제는 장년층 고용의 질이다. 지난해 통계청이 발표한 조사 중 55세 이상 취업자의 분포를 살펴보면 단순노무 종사자가 26.2%로 가장 높았다. 구직자는 그동안 사회에서 쌓은 지식과 경험을 살릴 수 있는 정규직을 원하지만 대부분의 일자리는 저임금, 비정규직, 단순노무 중심이다.
현실이 이렇다 보니 중장년층 구직자는 아르바이트 시장으로 다시 한 번 내몰리고 있다. 구직 사이트 ‘알바천국’에 따르면, 50대 이상 중장년층의 회원 가입 및 이력서 등록 건수가 전년 대비 737.7%나 증가했다. 당장 부족한 생활비를 벌거나 노후 잉여시간을 활용하기 위함으로 분석된다.
김복순 한국노동연구원 전문위원은 “고령인구에게 제공되는 일자리를 보면 청소용역, 경비 등 노동시장에서 쌓아온 경력과 무관한 저임금, 단순 노동직으로 빠지는 실정”이라며 “돈으로 살 수 없는 경험과 노하우라는 가치를 젊은 세대에게 전수해주는 연계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중장년 일자리의 질이 떨어지는 문제는 우리 사회에 끊임없이 제기된 해묵은 사안이다. 고령사회가 빨리 진행되는 데 반해 퇴직 시기가 너무 이른 게 주된 이유. 그나마 다행인 것은 최근 임금피크제, 근로시간 단축, 정년연장 등 방안들을 마련해 중장년층의 일자리 문제를 보완하기 위한 시도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대기업 건설회사에 다니는 이창현 씨(가명·47)는 퇴근하면 건축구조기술사 자격증을 취득하기 위해 공부한다. 10여 년 관련 분야에서 종사해야 응시 자격이 주어지고, 한 해 취득률이 3%밖에 안 되는 고난도 자격증이다. 그럼에도 바쁜 시간을 쪼개 공부하는 이유는 퇴직 후에도 계속 일하기 위해서다. 이 씨는 “자격증을 따면 감리회사로 옮겨 70세까지도 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주금액에 따라 도급 순위가 나뉘는 건설업에서 그가 현재 일하는 곳은 1군 회사다. 앞서 퇴직을 경험한 선배들의 사례를 보면 그들은 2군, 3군 회사로 이동하며 임금이 40~50% 정도 줄었다고 했다. 이 씨는 미리 퇴직에 대비해 업무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계기로 삼기로 했다. 그는 “아직 정년이 8년 남았지만 준비하기엔 40대도 이른 나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창현 씨처럼 자격증을 통해 재취업을 바라는 중장년층이 늘고 있다. 한국산업인력공단에 따르면, 50대 이상 자격 취득자는 2011년 2만 6307명에서 2015년 3만 8260명으로 45.4%나 급증하는 추세다. 더욱이 응시자를 대상으로 ‘자격증 취득 목적’을 묻는 질문에 중장년층은 압도적으로 ‘취업’이라고 답했다. 특히 한식조리기능사나 건설기계, 전기, 지게차운전기능사 등 주로 취업과 창업에 많이 활용되는 자격증이 인기를 끌고 있다. 임금 수준을 높이고 재취업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고자 하는 기대가 반영된 것이다.
하지만 4명 중 1명이 응시 자격 제한이 없는 자격증에 도전하고 있어 업무 연관성이나 전문성을 살리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무분별한 자격증 취득보다 기존 노동시장에서 쌓았던 숙련과 경험을 퇴직 후에도 발휘하는 것이 중요하다. 박국헌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책임컨설턴트는 “자격증이 취업을 보장하진 않는다”며 “하고 싶은 일을 먼저 결정하고 그에 따라 자격증을 준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제2의 인생설계 숙제, 근무성과표에 반영
IT 분야 P회사는 지난해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회사를 그만두면 무엇을 할 것인지’ 각자 발표하란 지시가 내려온 것이다. 파워포인트로 작성한 제2의 인생설계도는 근무성과표에도 반영됐다. 임대건 씨(가명·42)는 “발표를 준비하며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현실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근로 연령대가 낮은 편인 IT 업종에서 일찌감치 퇴직 후의 삶을 고민하던 그는 막막하게만 느끼면서 동일 계열로 전직을 시도하려고만 했다. 하지만 발표를 준비하며 자신의 관심사가 무엇인지 재검토하고, 무역업에 도전하기 위해 틈틈이 중국어를 배우고 있단다.
P회사 대표는 “다른 일을 하더라도 우리 회사 출신은 준비가 돼 있길 바란다”며 일과시간에도 직원들의 자기계발을 독려하고 있다. 마치 청소년의 직업탐색 기간과 유사하다. 이와 같이 기업 차원에서 노후 대비에 대한 인식을 높이고자 하는 풍속이 확산된다면, 중장년층은 한결 더 탄탄한 노후 대비가 가능할 것이다. 아울러 정책 뒷받침을 지속적으로 확대하여 고용불안, 질 낮은 일자리, 노후 걱정이란 삼중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야 한다.
중장년 일자리 지원 프로그램
중장년을 위한 일자리 프로그램 마련에 정부와 경제단체가 함께 나서고 있다. 대표적으로 고용노동부 워크넷(www.work.go.kr)은 장년 우대 채용정보를 제공하며, 이력서 작성과 면접기법 등 구직활동에 필요한 기술을 지원하는 ‘성실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노사발전재단은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운영하며 퇴직예정자를 위한 ‘전직스쿨 프로그램’, 구직자를 위한 ‘재도약 프로그램’, 금융퇴직인력 특화 프로그램 등의 서비스를 지원하고 있다. 이외에도 고용정보원, 상공회의소, 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이 중장년 구직활동을 위한 상담, 일자리 제공에 나서고 있다.
장년나침반 생애설계 프로그램 40세 이상 재직근로자 및 구직자가 자신의 경력자산을 점검하고 이를 유지·개발할 수 있도록 함은 물론, 퇴직 이후 삶에 대해 좀 더 능동적인 삶을 스스로 설계·준비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직업·경력 외 건강, 재무, 여가, 대인관계 교육도 실시한다.
문의|노사발전재단 커리어상담팀 02-6021-1163
내일배움카드 국비 지원으로 자격증 대비 과정 등 취업 준비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제도로, 최대 200만~300만 원을 지원해준다. 조리사, 미용, 전산회계, 목공 등 다양한 영역에서 지원이 이뤄지고 있다. 직업훈련포털을 통해 가까운 곳에서 운영 중인 프로그램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의|고용노동부 직업훈련포털 www.hrd.go.kr
장년고용지원금 45세 이상 구직자를 대상으로 시행하는 인턴제도. 장년인턴을 채용한 기업에 최대 540만 원을 지원한다.(인턴기간 최대 3개월간 월 60만 원 제공, 정규직 전환 시 월 60만 원 6개월간 지원) 문의|노사발전재단 커리어상담팀 02-6021-1161
나는 이렇게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이 나이에 인턴 하냐는 자괴감이 고비였죠”
나는 25년 다니던 직장을 퇴사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회사생활로 나의 인생이 사라져간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처음 2개월은 재충전으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점점 실업자라는 꼬리표 때문인지 사람을 기피하고 스스로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사무직으로 최대한 조건을 낮춰 이력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재취업은 쉽지 않았다. 혼자 하는 구직활동에는 한계가 느껴졌다. 그렇게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문을 두드렸다.
컨설턴트와 상담 후 재도약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했다. 구직시장에 대한 이해, 이력서 작성법, 면접전략 등 방향을 잡고 중장년 구직자들과 교류하며 심리적 부담감을 극복해갔다. 수차례 원서를 넣고 최저임금 수준의 생산직 면접을 볼 때면 자존심도 상했지만, 50대 중반의 내세울 것 없는 이력으로 재취업하기는 어려웠다.
구직 4개월차, ‘장년고용지원금 사업’을 통해 자동차공업사 서비스직 채용정보를 접했다. 이 나이에 인턴이란 제도가 생소했지만 기업 입장에서도, 근로자 입장에서도 서로를 파악하는 과정이라는 설명을 들었다. 면접에서는 청년보다 장년층이 책임감 있음을 강조했다. 그렇게 나는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전영규(가명·53) | 자동차공업사 서비스 주임
성공하는 중장년 재취업 TIP
“재취업 관건은 시간관리,
경력 무관한 자격증에 의존 말라”
전문가와 상담하라 퇴직을 앞두고 있다면 중장년센터, 고용센터 등을 방문해 정기적으로 교육, 상담을 받는 것이 좋다. 중장년층의 재취업은 경력 인정, 근무 형태 등에서 청년층의 취업과 다르다. 또 혼자서는 어떤 방법으로 해야 할지 잘 모른다. 재취업에서 관건은 ‘시간관리’다.
구체적으로 준비하라 구직시장에 나온 중장년층은 가족의 생계까지 생각해야 하니 불안하다. 그러나 자신의 경력과 관계없는 자격증을 취득한다고 취업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삶에 대한 기본적 생각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야 한다.
기본에 충실하라 면접에서는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면접관에게 예의를 갖추고, 면접관과 논쟁하지 않도록 유의한다. 자기소개 준비와 관련 서류 구비, 회사와 직무에 대한 파악, 휴대전화를 꺼놓는 예절도 기본이지만 많은 이들이 놓치는 부분이다.
박국헌 |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 책임컨설턴트
선수현 | 위클리 공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