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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진원 경희대 교수가 2월 17일 인터뷰에 앞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경제력이 그 나라 정치·문화적 수준을 대변해주지는 않는다. 고도성장을 이뤘지만 민주주의 역사와 전통이 짧은 나라들의 경우 간극이 눈에 띈다. 우리나라도 압축성장으로 국내총생산(GDP) 세계 12위(2019년)에 올랐지만 경제력에 걸맞은 ‘국격’을 갖췄다고 단언하기는 힘들다. 2021년 들어 발표된 국가청렴도(CPI·부패인식지수)와 민주주의지수(Democracy Index) 등 국격과 관련한 주요 지표가 상승세를 보이고 있는 점은 긍정적이다.
국가청렴도와 민주주의지수 등의 의미와 우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채진원 경희대 교수의 의견을 들었다. 채 교수는 경희대 공공거버넌스연구소에 재직 중이다. 인터뷰는 2월 17일 서울 사당역 인근에서 했으며 사진촬영 뒤 마스크를 쓴 채 진행했다.
채 교수는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임에도 그에 걸맞은 국격을 갖추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며 “그나마 국격이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여러 지표가 소개돼 코로나19로 지친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국가청렴도 61점으로 역대 최고치
우리나라는 1월 28일 국제투명성기구(TI)의 국가별 국가청렴도(CPI)에서 100점 만점에 61점을 받아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년 대비 6계단 상승해 180개국 중 33위를 차지했다. 국가청렴도는 국가별로 공공·정치 부문에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되는 부패 정도를 측정하는 지표로 반부패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유용한 도구로 평가되고 있다. 국제투명성기구가 1995년부터 매년 발표하며 기업인 대상 설문조사 결과와 애널리스트 평가 결과를 집계한다.
채진원 교수는 “국민권익위원회가 많은 활동을 해왔고, 청와대 민원 등을 적극 해결하고 있는 점이 국가청렴도지수 상승에 도움을 주고 있다”며 “부패가 많이 발생하는데도 해결할 수 없다면 자포자기하겠지만, 문제가 있어도 해결하는 모습을 보면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 ‘제도적 효능감’이 생긴다”고 말했다.
국가청렴도는 2016년 53점까지 떨어진 이후 매년 상승해 2020년에 60점을 돌파했다. 국민권익위원회는 ▲범국가 반부패 대응체계 구축 ▲코로나19의 K-방역 성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립과 ‘청탁금지법’의 정착 ▲채용비리 근절 등 반부패 개혁 노력들이 긍정적 영향을 끼진 것으로 분석했다. 권익위는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에 비춰볼 때 아직은 부족하다”며 “세계 20위권 청렴 선진국으로 진입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2월 2일에는 국가별 민주주의 성숙도를 평가하는 ‘민주주의지수 2020’을 발표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부설 경제분석 기관인 ‘이코노미스트 인텔리전스 유닛’(EIU)이 발표한 민주주의지수 2020에 따르면 한국은 10점 만점에 8.01점을 받아 23위에 올랐다. 순위는 2019년과 같지만 ‘결함 있는 민주국가’에서 5년 만에 ‘완전한 민주국가’ 대열에 합류했다.
“코로나19 대응,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 높여”
EIU는 2006년부터 167개 국가를 상대로 ▲선거과정과 다원주의 ▲정부기능 ▲정치참여 ▲정치문화 ▲국민자유 등 5개 영역을 평가해 민주주의 점수를 산출해왔다. 모두 60개 항목으로 이뤄진 설문·여론조사 등을 토대로 점수를 매긴다. 평균 8점을 초과하는 국가는 완전한 민주국가(Full democracy), 6점~8점은 결함 있는 민주국가(Flawed democracy), 4점~6점은 혼합형 정권(Hybrid regime), 4점 미만은 권위주의 체제(Authoritarian regime) 등 4단계로 구분한다.
2020년 보고서에서 완전한 민주국가 23개국, 결함 있는 민주국가 52개국, 혼합형 정권 35개국, 권위주의 체제 57개국 등으로 구분됐다. 완전한 민주국가는 조사 대상 167개국 총 인구의 8.4%에 불과하다. 조사 대상국 전체의 평균점수(5.37점)는 코로나19 대응 차원에서 개인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전년보다 하락했다.
?이번 조사에서 대만과 일본도 완전한 민주국가에 합류했다. 대만(11위)은 평균 8.94점으로 전년 순위보다 무려 20계단 올라 조사 대상국 중 가장 큰 진전을 이뤘고, 일본은 평균 8.13점으로 21위를 기록했다. 미국(25위)이 평균 7.92점을 받아 ‘결함 있는 민주국가’로 분류됐으며 프랑스(24위·평균 7.99점)와 포르투갈(26위·평균 7.90점)도 ‘결함 있는 민주국가’로 추락한 점이 예상 외 결과다. 프랑스는 정치참여(7.78점), 정치문화(6.88점)에 이어 정부기능(7.50점)에서도 낮은 점수를 받았다.
EIU는 대만이 정치·법적 발전과 정치자금의 투명화, 사법독립을 향한 입법 개혁 등으로 약진했다면서 “코로나19 여파로 서방권에서 아시아 쪽으로 글로벌 권력균형 이동이 빨라졌다”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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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과정과 다원주의, 정부기능에서 높은 점수
채 교수는 “사실 대만과 일본이 우리나라보다 민주주의지수가 높게 평가된 점은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다”며 “민주주의지수가 설문조사 방식을 통해 이뤄지면서 그 나라의 다른 부분과 비교한 상대적 실망감이 반영됐을 것으로 본다”고 분석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경제·문화 부문보다 정치 부문의 낙후와 그에 대한 실망이 낮은 점수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채 교수는 그러나 민주주의지수는 충분히 중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민주주의지수가 100% 정확히 반영되지 못하더라도 추세를 보는 것이고 매년 동일한 기준으로 점수화함으로써 일관성이 있다”며 “다소 의외의 결과가 나오더라도 객관적이고 신뢰성 있는 지표인 만큼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항목별로 선거과정과 다원주의 9.17점, 정부기능 8.21점, 정치참여 7.22점, 정치문화 7.50점, 국민자유 7.94점을 받았다. 선거과정과 다원주의, 정부기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지만 정치참여와 정치문화, 국민자유 등에서 평균점수를 밑돌았다.
‘정치참여’ 관련 문항들을 보면 투표 참여율, 소수자 목소리 여부, 여성국회의원 비율 등을 포함한다. 합법적인 시위에 참여했거나 참여의사가 있는 인구가 40% 이상이면 높은 점수를 받는다. ‘정치문화’는 강력한 리더나 전문가·기술 정부에 대한 선호도가 높을수록 낮게 평가된다. 민주주의가 공공질서 유지에 보탬이 안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을수록, 민주주의가 경제적 성과에 도움을 준다고 믿을수록 ‘완전한 민주국가’에 가까워진다.
“정치문화 수준 개선해야 국격 높아져”
채 교수는 우리나라 국민은 정치에 대한 예민함과 무관심이 극과 극을 이룬다면서, 정당들이 맹목적 지지자들에 둘러싸여 쓴소리를 못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맹목적 지지를 기반으로 한 ‘팬덤(열성 팬)정치’가 이뤄지며 정치인들의 방어기제가 상당히 증가했다”며 “자기편을 들어주리라 믿기 때문에 상대편의 비판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스포츠에서 10~20년 전 학교폭력이 드러나도 무기한 출장정지·국가대표 자격이 박탈되듯이 정치인들도 자신의 역할을 못하면 퇴출당할 수 있어야 하지만 팬덤정치·진영논리가 작동하면서 방어기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연못에서 메기가 악당 노릇을 하면 붕어들이 더 튼실해지듯이 정치에도 견제와 균형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채 교수는 한국이 역량이 있음에도 그렇지 못한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한국의 역동성·잠재력의 증거로 ‘블룸버그 혁신지수’ 1위를 차지한 사례를 꼽았다. 〈블룸버그통신〉은 2월 3일 ‘2021년 블룸버그 혁신지수’를 발표하면서 한국을 60개국 중 1위(90.49)로 발표했다. 연구개발(R&D) 집중도, 제조업 부가가치, 생산성, 첨단기술 집중도, 교육 효율성, 연구 집중도, 특허활동 등 총 7개 항목에서 매긴 점수를 합산해 국가 순위를 매긴다. 한국은 2014~2019년 6년 연속 블룸버그 혁신지수 1위를 차지했고, 2020년 독일에 1위를 내줬으나 1년 만에 정상을 탈환했다.
채 교수는 “민주주의는 조금만 소홀히 해도 훼손되고 망가진다. 우리 정치문화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만 민주주의지수와 국격을 한 단계 높일 수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 이찬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