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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숙, ‘1획 위에 4획, 8획’, 캔버스 위에 템페라, 135×174cm, 2012
예전엔 학교에서 우리가 ‘단일민족’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미 8세기 무렵 신라는 멀리 이슬람 문명과 교류했고, 반도의 북쪽 지역 사람들은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대륙 문명과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런 맥락에서 21세기 시대정신은 ‘다문화’임에 틀림없다.
실례로 지금 당장 서울 근교 공장지대나 농촌, 어촌 구석구석을 살펴보라. 전국 곳곳에서 외국인 노동자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들은 우리보다 조금은 가난한 나라에서 돈 벌러 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대학가나 도시에서도 유학생, 여행객(물론 요즘은 하늘길이 막혀 관광객 수가 예전 같지 않지만)이 차고 넘친다. 뿐만 아니라 영어를 가르치는 이른바 ‘원어민’(?) 교사를 비롯해 다양한 분야에서 전문직에 종사하는 외국인도 흔하다. 아예 한국인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정착한 경우도 허다하다.
유럽이나 미국, 특히 뉴욕 같은 대도시는 일찍이 다인종, 다언어, 다문화가 공존해 왔다. 자연스럽게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인정, 타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열린 태도, 즉 개방성이 중요한 사회적 가치로 인식돼 왔다. 배려와 관용, 존중의 정신이 전통처럼 축적돼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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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숙, ‘6획’, 캔버스 위에 템페라, 180×135cm, 2007
4년간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해
하지만 최근 유럽과 미국 일각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면 예전 같지 않다. 난민수용 문제나 인종차별 사건 등으로 과거의 고귀한 정신이 훼손되고 있는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는 고도 압축성장의 터널을 쉼 없이 지나왔다. 산업화라는 이름의 초고속 열차에 탑승한 채 말이다. 이제는 잠시 멈출 때다.
가쁜 숨을 가다듬고 차분히 뒤도 돌아보고 진지하게 미래를 모색할 때다. 다문화와 맞닥뜨리게 된 작금의 우리 상황은 서구 사례를 타산지석,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앞서 언급한 외국인 노동자, 한국으로 돈 벌러 온 이국의 젊은이들. 이들 사례는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다. 우리도 똑같은 과거가 있었다. 19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월남에 파병된 군인, 사우디아라비아나 리비아 같은 중동 국가 건설현장으로 파견된 수많은 노동자. 그리고 독일로 떠난 광부와 간호사들이 그들이다.
송현숙은 1952년 전라남도 담양군 무월리에서 태어났다. 대나무숲이 빼곡한 산골마을이다. 광주수피아여중·여고를 졸업한 스무살 송현숙은 1972년 독일로 떠났다. 화가가 되기 위해 유학을 간 게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 파독(派獨) 간호사 모집에 자원해 독일 땅을 밟은 것이다. 같은 이유로 수많은 청년들이 독일 탄광에서 광부로 일했다. 송현숙은 4년간 독일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말이 간호사지 병원에서 가장 힘들고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마지막 1년은 정신병동에서 약물 중독자를 돌봤다. 그때 정신병원에서 환자들에게 미술치료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운명처럼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간호사 계약기간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간 경우가 많았지만, 송현숙은 독일에 남아 뒤늦게 미술대학에 진학했다. 1978년 일이다. 함부르크조형예술대학에서 배운 것은 미술 기술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법”이었다고 한다. 1985년엔 전남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교환학생 자격으로 1년간 동양화와 한국미술사를 공부했다. 그때 이태호 교수에게 고구려 고분벽화, 도자기, 불교미술, 겸재 정선, 민화 등에 대한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한국의 문화유적지를 답사하고 서예를 배우기도 했다. 이 경험을 계기로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나름대로 포착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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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숙, ‘붓질의 다이어그램(4월 16일 세월호 비극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 캔버스 위에 템페라, 170×240cm, 2014
한국의 정서를 현대적 감각으로 표현
송현숙의 그림은 단순하다. 일필휘지(一筆揮之), 최소한의 붓 자국으로 함축적 이미지를 표현한다. 나무 말뚝이나 빨랫줄에 걸린 투명한 천, 한옥, 우물, 항아리, 할머니 등을 연상시키는 이 형상은 추상을 넘어선 의미의 결정체다.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한국의 정서가 농축된 화가의 숨결이다. 신중하게, 단숨에 그어진 선을 따라 시선을 옮겨보라. 그러면 그림 그리는 화가의 호흡과 손놀림이 그대로 느껴진다.
작품 제목 역시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다. ‘6획’, ‘28획’, ‘1획 위에 4획’, ‘4획 뒤에 인물’…. 구차한 설명이 없다. 붓질의 획수가 그대로 작품 제목이다. 그림을 보고 무엇을 연상하든 그건 보는 사람의 몫. 화가는 내면으로부터 숙성된 감정의 흔적을 절제된 붓질로 분출할 뿐이다.
또 한 가지. 송현숙이 사용하는 재료와 기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달걀과 송진기름에 안료가루를 섞어서 사용하는 템페라(Tempera)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이태호 교수는 “수성물감이 주로 발달했던 동양인의 회화 정서와 맞닿는 점이기도 하며, 풀비로 그린 하얀 천을 늘어뜨린 질감은 마치 조선 초기 분청사기에서 도공들이 도자기 표면에 백토를 풀어 붓으로 활달하게 바른 ‘귀얄무늬’ 기법을 연상케 한다”고 평한 바 있다. 이에 대해 송현숙은 “내가 작업하는 자세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농부의 마음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땅을 갈아 씨를 뿌리고 거두듯, 나는 텅 빈 캔버스에 붓질을 통해 작품을 가꿉니다. 복잡하지 않고 간단명료하게 말입니다”라고 호응했다.
송현숙은 지금도 독일 함부르크 외곽에 있는 집 겸 작업실에서 지낸다. 작가이자 이론가이며 함부르크조형예술대학 교수였던 남편 요헨 힐트만은 전생에 분명히 한국의 고승(高僧)이었을 것이라고 말할 만큼 한국(문화)에 각별한 애정을 지닌 인물이다. 1997년엔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에 대한 책, <미륵>(학고재)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책은 관광지로 개발, 훼손되기 전 운주사의 원형을 흑백사진으로 잘 보여주는 소중한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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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