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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사진기자단
여기 한 장의 사진이 있다. 2017년 청와대에서 문재인 대통령 부인 김정숙 여사와 미국 트럼프 대통령 부인 멜라니아가 함께 찍은 사진이다.(위쪽 사진) 당시 나는 뉴스 화면에 스치듯 나온 이 장면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람들은 자기가 관심 있고 보고 싶은 것을 먼저 보기 마련이다. 미술 판에서 오랫동안 놀고먹는 나에겐 그들 뒤에 병풍처럼 놓인 그림이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그림을 그린 화가가 누군지 금세 알아챘다. 가뜩이나 선명하고 화려한 그림은 밝게 웃는 두 여인의 표정과 어울려 더욱 돋보였다. 곧이어 이런 생각도 들었다. 세상이 바뀌긴 바뀌었구나! 국빈을 맞이하는 자리에 현역으로 활동하는 한국인 화가의 그림을 자신 있게 내걸다니.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 그림을 선택한 이의 안목에 감사한 마음과 왠지 모를 뿌듯함이 교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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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희, ‘Towards’, 2017, 천 위에 채색, 180×280cm
‘…에 대하여, …을 향하여, …을 위하여’
이 그림엔 ‘Towards’라는 영어 단어, 그러니까 ‘…에 대하여, …을 향하여, …을 위하여’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림을 그린 주인공은 동양화가 김보희. 2017년 이화여대 동양화과 교수를 정년 퇴임한 작가다. 수십 년간 묵묵히 작가로서 삶과 후학을 양성하는 교육자 역할을 병행했다. 1990년 초 제주 앞바다에 매료되어 추상화처럼 보이는 바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정년을 앞둔 몇 년 전부터는 서귀포에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동안 학기 중엔 서울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방학 때면 제주에 머물며 그림 그리는 생활을 했다. 당연히 은퇴 이후부턴 서귀포 작업실에 칩거하며 마음껏 그림을 그리고 있다.
다시 그림 ‘Towards’를 살펴보자. 바다 그림과 달리 사실적으로 묘사된 화면은 각박한 세상살이에서 벗어난 유토피아, 비현실적 이상향처럼 보인다. 말 그대로 ‘그림 같은 풍경’이다. 열대지역 식물과 화려한 꽃은 이국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노란 열매가 매달린 감귤나무와 멀찍이 살짝 보이는 바다 수평선까지, 그곳이 제주도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꽃밭 한가운데 한가로이 앉아 있는 검은색 리트리버 역시 김보희 작가와 함께 사는 개다. 짐작대로 그림 속 풍경은 작가의 서귀포 작업실이다. 작가는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로 ‘그곳’을 작업실 앞마당에 구현했고, 그림으로 그 정경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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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희, ‘Towards’, 2013, 천 위에 채색, 300×300cm
예전에 학교에서 배워서 알듯이, 서양 풍경화와 달리 과거의 동양 산수화는 관념에 의해 그려진 그림이다. 즉 남종화니 북종화니 하는 중국풍 산수화 대부분은 실재하는 풍경이 아니다. 방 안에 앉아서 머릿속으로 상상해 그린 그림이다. 조선시대 화가들도 한때 이런 중국풍 그림을 추종했다. 하지만 겸재 정선(1676~1759)에 이르러 사정은 달라졌다. 정선은 조선의 산하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그렸다. 이름 하여 진경산수(眞景山水). 유명한 ‘금강전도’ ‘인왕제색도’를 비롯해 한강을 따라 그린 그림을 모아 엮은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걸작 회화가 정선이란 인물을 통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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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세한도’, 1844, 국보 180호 수묵화, 23×69.2cm
동시대 감각 보여주는 현대 동양화 전형
세상은 이렇게 남다른 시선으로 새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에 의해 조금씩 바뀌었다. 서로 떨어져 있는 두 개의 수레바퀴가 결국 한 몸인 것처럼, 세상이 바뀌는 것과 그림 그리는 방식이 달라지는 것도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시대 변화에 따라 그림이 조금씩 바뀌고, 반대로 그림이 변함에 따라 세상 역시 조금씩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전통 동양화는 수묵으로 그려진 흑백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화려한 컬러 물감으로 그려진 채색화도 그에 못지않게 훌륭하다. 흔히 ‘민화’라고 일컫는 조선시대 ‘채색 길상화(吉祥畵)’가 좋은 예다. 김보희 작가는 자신의 삶과 가장 밀접한 일상을 왜곡하거나 과장 없이 사실적인 색으로 묘사하고 기록한다. 그가 그린 풍경은 관념에 의한 이상 세계가 아니다. 그러니 그의 그림을 일컬어 ‘21세기 진경산수화의 새로운 버전’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김보희 작가의 그림은 동시대 감각을 보여주는 현대 동양화의 전형이다.
마지막으로 김보희 작가의 제주도 그림을 추사 김정희가 그린 ‘세한도’와 조심스레 비교해본다. 물론 두 사람이 경험하고 느낀 제주도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 하지만 앞서 예로 든 수레바퀴처럼 두 그림은 비록 다르게 보이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결국 한 몸, 일맥상통한다. 제각기 다른 감정과 시대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는 면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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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_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