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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피카소가 자전거 손잡이와 안장이라는 레디메이드로 창조한 소의 머리(1942년)
고양이는 사람들이 만든 사물을 원래 목적대로 쓰지 않는다. 고양이는 본능에 따라 안전한 곳을 찾고 그곳이 어디든 자기 보금자리로 삼는다. 우리 집 고양이가 한번은 세면대에 들어가 있었다. 세면대가 밑으로 꺼져서 분화구 같은 모양을 하고 있으니 안정감이 드는 것이다. 또 우리 집 고양이가 제일 좋아하는 장난감은 고양이용 장난감이 아니다. 어지러운 전선을 묶는 작은 플라스틱 선이나 부드러운 귀마개다. 그걸 던져주면 달려가서 입에 물어 가져오는 놀이를 즐긴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인공적인 사물이 오직 처음 만들어진 목적대로만 사용되는 것은 낭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물은 평소에 일을 하지 않고 노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책은 정보를 담은 그릇이므로 읽혀야 존재 가치가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 동안 책꽂이에 꽂혀 있어서 공간을 낭비할 뿐이다. 하지만 책은 그 집안의 지적이고 문화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장식품으로도 활용되므로 낭비만은 아니라는 위안을 준다.
책이 장식품의 기능을 갖는다 해도 그것 역시 시각적인 감상에 그칠 뿐 기능적 사물로서 쓸모가 있는 건 아니다. 시각적인 감상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예술품이 된다. 책은 다행스럽게 장식품 외에도 다양한 실질적 쓰임이 있다. 냄비 받침이나 베개로 활용되는 것은 아주 흔하다. 무더운 여름에는 손에 들고 있는 얇은 주간지를 부채로 활용할 수도 있다. 의자는 앉기도 하지만, 그 위에 발을 딛고 올라가 손이 닿지 않는 천장의 등을 수리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거친 청소년들의 교실에서 의자는 무기로 돌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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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스테인리스 그릇을 뒤집고 손잡이를 달아 요리의 열기를 차단하는 임시변통의 뚜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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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주택가 지정주차 구역에 다른 차가 주차하지 못하도록 막은 플라스틱 물통
쓸모의 새로운 발견
이것은 쓸모의 새로운 발견이다. 이렇게 사물을 원래의 목적과 다른 용도로 쓰는 것을 ‘임시변통(makeshift)’이라고 부른다. 임시변통이란 당장 어떤 쓸모의 물건이 필요한데, 그것이 없을 때 주변에 있는 사물을 찾아 급하게 다른 용도로 쓰는 것을 말한다. 가장 흔한 경우는 싸움을 할 때 주변에 있는 물건을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던지는 것이다.
임시변통의 사물은 그 쓰임이 ‘일시적’이다. 주택가나 도로변을 걷다 보면 지역 주민들을 위한 지정주차 구역이 비었을 때 다른 차가 주차하지 못하도록 의자나 플라스틱 통(사진 3)을 놓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그런 용도로 쓰는 것이 영구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학생들이 ‘무기’로 사용한 의자는 제자리로 돌아가 본래의 기능, 앉는 용도에 충실할 것이다. 시장에서 물건을 쌌던 신문지는 버려질 것이다.
임시변통 사물의 또 다른 특징은 그것이 매우 질이 낮다는 데 있다. 언젠가 인왕산에 올라가 군 시설의 문에 달린 임시변통 사물을 발견한 적이 있다.(사진 4·5) 자물통이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비에 녹슬지 않게 하려는 의도인지 플라스틱 물병을 가리개로 용도 변경해 그것을 숨긴 것이다. 그 모양새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군인들은 이 임시 가리개가 군용답게 보이게 하려고, 또 시설물의 녹색과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 녹색으로 칠했다. 이로써 플라스틱 물병은 완전히 새로운 사물로 거듭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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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5. 군용 시설물의 자물통을 보호하는 용도로 쓰인 플라스틱 물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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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 이 스툴은 기성품들을 연결해 미끄러질 수 있는 의자가 되었다
처음엔 거칠지만 결국 새로운 사물로 진화
이처럼 임시변통은 용도 변경에 따라 그 사물에 새로운 탄생과 생명을 선사한다. 이런 종류의 임시변통 사물은 일시적인 사용에 그치지 않는다. 생명이 연장되는 것이다. 어느 식당엘 갔더니 스테인리스 그릇을, 끓고 있는 요리의 열기를 가두는 뚜껑으로 용도 변경했다.(사진 2) 이 임시변통의 뚜껑은 일시적으로 사용된 뒤 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원래 그릇의 밑부분이던 곳에 뚜껑을 달았고, 그릇의 한 부분에 구멍을 뚫어 증기가 빠져나오게 했다. 즉 공을 들여서 새로운 사물로 만든 것이다. 이 독특한 뚜껑은 좀 더 넓은 공간에 열기를 가두는 용도를 지닌다. 뷔페식당에 가면 음식이 식지 않도록 하는, 뚜껑을 열고 덮을 수 있는 그릇이 있지만, 뚜껑만 따로 팔지는 않는다. 식당 주인은 시장에서 적절한 가격과 크기의 물건을 찾지 못해 결국 이런 임시변통의 뚜껑을 디자인한 것이다. 그러니 비록 임시변통이지만 이 뚜껑은 오래갈 것이다.
여기에서 나는 사람의 창의성을 본다. 식당 주인은 말하자면 레디메이드(ready-made), 즉 기성품 두 가지(그릇과 뚜껑 손잡이)를 연결해 새로운 물건을 만든 것이다. 레디메이드를 이용해 다른 것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자전거 안장과 손잡이를 붙여서 소의 머리를 만든 피카소의 발상과 비슷하다.(사진 1) 다른 점이 있다면, 피카소는 아트 오브제를 창조했고, 식당 주인은 쓸모 있는 실용품을 만들었다.
오늘날 수많은 개념의 창의적인 물건도 이처럼 기존의 기능적인 사물들을 임시변통해서 연결해 만든 것이다. 구텐베르크는 와인 즙을 짜는 기계로 인쇄기를 만들었다. 어느 시장에 갔더니 미끄러질 수 있는 스툴(등받이와 팔걸이가 없는 작은 의자)을 발견했다.(사진 6) 이 스툴은 처음부터 이렇게 태어난 게 아니다. 누군가 뭔가를 이동하는 데 썼던 바퀴 달린 금속 다리와 의자의 좌석을 붙인 것이다. 이 임시변통 사물을 만든 익명의 디자이너는 아마도 앉은 상태에서 이동하고자 이런 의자를 만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흔히 보는 바퀴 달린 사무 의자도 그렇게 출발하지 않았을까? 따라서 허먼 밀러 같은 뛰어난 사무 가구 회사가 출시하는 의자를 디자인한 동기와 내가 시장에서 발견한 임시변통의 스툴을 디자인한 동기는 다를 것이 없다. 단지 거칠고 조잡하다는 것이 차이다. 임시변통의 사물은 반드시 어떤 필요를 전제로 한다. 그런 필요에 맞춰 처음에는 거칠게 만들어지다가 결국 개념을 가진 새로운 사물로 진화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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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