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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공작연맹의 핵심 멤버인 페터 베렌스가 디자인한 AEG사의 전기 주전자
‘디자인’이라는 말은 그 쓰임이 엄청나게 다양하다. 디자인을 우리말로 하면 설계, 고안, 구상, 계획 같은 단어들이 떠오른다. 설계, 고안, 구상, 계획이란 가구나 자동차, 전자제품 같은 기능적인 사물에만 해당되지 않는다. ‘생활의 설계’라는 말이 있듯 손에 잡히는 물리적인 대상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대상으로 확대되기도 한다. 한때 디자인 산업을 홍보한답시고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가 각료들에게 “디자인하라 그러지 않으면 사임하라(Design or Resign)”라고 했다며 이 말이 디자인업계에서 한참 유행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대처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만약 그런 말을 했다고 하더라도 설마 각료들에게 디자인 산업에서 말하는 그 디자인을 하라고 지시했을까?
이런 식으로 디자인의 개념을 확대하는 것이 디자인 산업 또는 디자이너들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각료들이 디자인을 한다고 미술대학 디자인학과를 졸업한 전문가를 고용할 리 없지 않은가. ‘보디 디자인(body design)’이라는 말을 만들 수 있지만, 그것을 퍼뜨리는 사람은 디자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헬스클럽 운영자들일 것이다. 오늘날 디자인은 설계, 고안, 구상, 계획을 의미하는 뜻으로 모든 분야에서 쓰이고 있지만, 그 말이 태어난 순간에는 뭔가 더 구체적이고 고유한 일에 적용되지 않았을까?
선사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그 모든 사물은 디자인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석기인이 만든 돌도끼도 디자인된 것이고, 오늘날의 첨단 스마트폰도 디자인된 것이다. 우리는 돌도끼를 보면서 “저 디자인은 석기인이 만든 것치고 참 정교하군”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영문 ‘디자인(design)’은 근대에 생긴 근대적인 개념이다. 그것을 한번 추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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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 레이몬드 로위가 디자인한 연필 깎기. 미국의 디자인은 새로운 스타일을 통해 판매를 촉진하는 데 목표를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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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모리스의 회사에서 생산한 서섹스(Sussex) 의자
공예가와 산업체 운영자의 만남
산업혁명이 일어나 공장에서 기계로 물건을 찍어내 대량으로 생산하기 전까지 이 세상의 물건은 모두 사람이 직접 손으로 만들었다. 그것을 ‘공예’라고 한다. 동서양의 모든 공예가들은 자신이 머릿속으로 구상하고 고안한 것을 자신의 손으로 만들었다. 직접 손으로 만들 경우 그가 만든 것은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 조선시대 도공이 귀신같은 솜씨로 수십 개의 사발을 빚을 때 언뜻 보면 그 사발들은 모두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또한 갑자기 예술 의지가 발동해 즉흥적으로 다르게 생긴 그릇을 만들 수도 있다. 한마디로 그 모든 재료와 형태, 마감 상태, 즉 디자인은 도공의 통제 아래 있다. 이것이 공예가의 큰 자부심이고 즐거움이다.
하지만 기계가 물건을 생산하는 산업혁명이 일어나자 물건을 만들어내는 작업장이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직공들은 기계의 보조적인 수단으로 전락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그 물건의 고안과 구상에 전혀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물건을 만드는 일이 하나도 즐겁지 않고, 애정을 가질 수도 없다.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공장주는 오로지 이윤만을 추구하므로 물건의 만듦새와 품질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생산의 주요 수단은 기계이므로 숙련된 직공을 고용할 필요도 없어진다. 기계 기술은 사람이 오랜 시간 축적한 숙련된 솜씨를 무용지물로 만든다. 기계 생산에 따라 물건의 질과 아름다움은 수공예 시대보다 후퇴한다. 하지만 소수의 귀족과 부유한 자본가는 여전히 몰락하지 않은 소수 공예가가 만든 화려하고 장식적인 물건을 소유하고 자랑한다.
산업혁명 시기의 이런 비인간적인 상황에 저항한 영국인 윌리엄 모리스는 수공예 운동을 일으킨다. 질 좋은 물건을 기계를 사용하지 않고 만들겠다는 의도다. 그는 ‘만인을 위한 만인의 예술’이라는 신념을 갖고 자신 같은 공예가들이 만든 아름다운 물건이 더 많은 이들에게 퍼지기를 꿈꿨다.
그의 의지에 따라 예술공예 운동이 일어났지만, 공예가들이 만든 물건은 수량도 많지 않고 비쌀 수밖에 없었다. 일반인이 사용하는 대부분의 생활용품은 공장에서 생산되었고, 그 미학적 가치는 형편없었다. 좋은 물건을 만들 수 있는 재능을 가진 이들, 즉 공예가들은 공장을 무시했고, 그렇게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생활용품은 방치되었다.
20세기에 들어와 또 한 번 큰 변화가 일어났다. 영국과 프랑스에 이어 유럽에서 세 번째 산업국가로 발전한 독일은 어떤 나라보다 질 좋은 물건을 생산하고자 공예 교육에 힘썼다. 무엇보다 영국의 공예가들이 기계를 거부하고 공장을 무시한 것과 달리 독일 공예가들은 기계의 도입을 수용했고, 공장의 생산에 참여하고자 했다. 1907년에 설립된 독일공작연맹은 공예가와 산업체 운영자의 만남을 주선하고 협력을 도모했다. 공장의 물건은 이제 ‘디자인’되었다. 여기에서 디자인이란 그것을 구상한 사람이 생산 현장에는 참여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디자이너는 재료를 선정하고 형태를 구상하고 질감과 색채를 결정하지만, 공예가처럼 그것을 직접 만들지는 않는다. 자신이 구상한 설계도를 공장에 넘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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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의 학생인 마르셀 브로이어가 최초로 금속을 이용해 만든 B3 의자
디자인을 산업 경쟁력의 무기로 활용
1919년 설립된 건축공예 학교인 바우하우스는 독일공작연맹에서 시작된 예술가와 산업의 만남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특히 이 학교는 물건을 더욱 경제적으로 생산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왜냐하면 1차 세계대전의 결과 패전국 독일은 대단히 궁핍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집이든 물건이든 기하학적인 형태로 아주 단순하게 디자인했다. 그래야 생산 효율성이 높아지고 가격을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재료 역시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하기 쉬운 것을 선택했다. 예를 들면 늘 나무로만 만들던 의자를 강철 파이프로 만드는 식이다.
독일의 산업진흥 기관인 독일공작연맹과 디자인 학교인 바우하우스는 이렇게 모던 디자인의 탄생에 큰 역할을 했다. 이제 공장은 예술교육을 받은 이들로부터 외면받지 않게 되었다. 공장에서도 미적으로 우수한 물건이 생산되었다. 그들이 추구한 혁신은 단지 산업 제품의 아름다움과 경쟁력에 그치지 않는다. 영국의 예술공예 운동이 추구했던 이상, 즉 “더 질 좋은 물건을 더 많은 이들에게 보급하겠다”는 그 공동체적이고 민주주의적인 이상이야말로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디자인 개념의 핵심인 것이다.
모더니즘 디자인은 전후 미국에서 받아들여졌고, 전 세계적인 현상이 되었다. 최대 최고의 산업국가인 미국은 디자인을 산업 경쟁력의 무기로 활용했다. 이제 디자인은 제품을 차별화해서 기업의 판매 곡선을 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하지만 최초의 목표, 그 ‘착한’ 이상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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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