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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 ‘낮도깨비’, 광목, 목판, 채색, 54.5×36cm, 1984│서울시립미술관 소장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면, 요절(夭折)은 천재 예술가의 충분조건인가? 아니면 천재 예술가가 되기 위해선 필요조건으로 요절해야만 하는 것일까? 이미 요절의 때(?)를 지나 아직까지 살아 있는 나로선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어쨌든, 동서고금 가릴 것 없이 수없이 많은 요절 예술가가 있다. 화가, 문인, 철학자, 작곡가는 물론 대중음악 가수나 영화배우에 이르기까지. 이런저런 이유로 짧은 생을 마감한 그들이 남긴 작품과 인생의 궤적은 후대에 신화로 남아 있다.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였던 김현(1942~1990). 그 역시 쉰을 넘기지 못했다. 생전에 김현은 요절한 시인 기형도(1960~1989)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해설에 이렇게 썼다. “죽은 사람의 육체는 부재하는 현존이며, 현존하는 부재이다. 그러나 그의 육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다 사라져 없어져버릴 때, 죽은 사람은 다시 죽는다. 그의 사진을 보거나, 그의 초상을 보고서도, 그가 누구인지를 기억해 내는 사람이 하나도 없게 될 때, 무서워라, 그때에 그는 정말로 없음의 세계로 들어간다.” 누군가 그를 기억함으로써 그가 ‘완전한 사라짐 속에 잠기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진혼곡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 미술 판에도 요절한 인물이 적지 않다. 다행스러운 일은 김현 말대로 아직까지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 역시 적지 않다는 것. 미술인들 사이에서 여전히 기억되는 대표적 요절 작가가 오윤(1946~1986)이다. 정작 살아 있을 땐 변변한 전시회도 없었고 제대로 된 평가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작품, 특히 판화의 가치가 조금씩 널리 알려지면서 가장 한국적인 화가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민중미술 작가’라는 꼬리표를 떼게 된 것이다. 2006년 9월,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선 작고 20주기를 기념해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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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 ‘검은 새’, 종이, 목판, 채색, 17×15cm,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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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 ‘소리꾼 Ⅱ’, 광목, 목판, 채색, 27.3×24.9cm, 1985│공간화랑 소장
민중미술 태동에 의미 있는 역할
오윤은 해방 이듬해에 태어났다. 소설 <갯마을>로 유명한 문인 오영수가 그의 아버지다. 서울사대 부속 중고교 시절, 누나의 지인으로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지하, 염무웅 등과 교분을 맺었다. 이런 영향 때문이었는지 방학 때 전국을 무전여행하며 농부가 되고자 농과대학에 뜻을 두었다. 하지만 재능을 알아본 부친의 권유로 서울대 미대 조소과에 입학했다.
대학생 오윤은 당시 미술계 풍토나 학교 수업엔 흥미를 갖지 못했다. 대신 미술의 사회적 역할에 관심을 갖게 됐다. 멕시코 벽화운동을 연구했고,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나 조선시대 민화, 오륜행실도 같은 전통미술을 탐구했다. 판소리, 농악, 산대놀이 등의 연희 현장도 열심히 쫓아다녔다.
이때 1년 동안 휴학하고 또다시 전국 산야와 사찰을 여행했다. 지리산 쌍계사에선 한 달 동안 머물며 추사(秋史) 글씨 현판을 탁본해서 판각하기도 했다. 1969년 2학기에 복학한 후, 그룹전 <현실동인>을 준비했으나 학교 측과 당국의 제지로 자진 철회 무산되었다. 같은 해 시인 김지하가 집필하고 오윤, 임세택, 오경환, 강명희 네 사람의 독회와 평론가 김윤수의 교열을 거쳐 ‘현실동인 제1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는 민족예술의 정체성과 독창성을 자각하고 이를 지키기 위한 최초의 저항운동이자 선언이었다.
1960~1970년대를 거치며 한국사회 전반엔 ‘산업화 = 선진화 = 미국화’라는 공식만이 존재했다. 미술 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서구 현대미술 사조가 홍수처럼 밀려 들어왔다. 당시 주도적인 한국 미술계 상황은 이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형국이었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오윤이 보여준 행보는 이른바 ‘민중미술’ 태동에 의미 있는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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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윤, ‘봄의 소리Ⅰ’, 종이, 목판, 16.5×16.5cm, 1981
민족의 정체성 담긴 비판적 리얼리즘 미술
민중미술의 본격적인 서막을 연 상징적인 전시가 1980년 <현실과 발언>이다. 이 전시에 오윤이 참여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앞서, 조소를 전공한 오윤은 1974년 기념비적 테라코타 작품을 남겼다. 서울 종로4가 사거리 광장시장 쪽에 있는 우리은행(구 상업은행) 건물 벽면에 설치된 부조가 그것이다. 안내 현판엔 이렇게 적혀 있다. “민중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판화가 오윤이 친구들(윤광주·오경환)과 만든 작품. 멕시코 벽화운동의 강력한 메시지 전달력에 주목한 오윤은 흙의 생명력을 도심 속으로 옮겨왔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오윤의 대표작은 목판화다. 판화는 회화와 달리 여러 장 찍어낼 수 있다. 흑백 대비의 강렬함과 더불어 날카롭고 예리한 조각칼로 판을 파내면서 드러나는 ‘칼 맛’은 판화예술이 지닌 특별한 묘미다. 1980년대 오윤의 판화는 여러 시집과 어린이책에 표지로 널리 사용됐다. 간결하면서 힘차고 서정적인 도상은 척박한 현실의 삶과 ‘한’으로 대변된다. 또한 ‘도깨비’ 이미지를 활용한 작품을 여럿 남겼다. 긍정과 부정의 양면성을 지닌 도깨비는 삼국시대부터 내려오는 민간신앙의 초자연적 존재다. 오윤은 신명과 한, 그리고 해학과 정겨움 같은 평범한 대중의 일상을 담아내는 데 걸맞은 이미지로 도깨비에 주목한 것이다.
오윤이 남긴 목판화는 독일 작가 케테 콜비츠(1867~1945)나 중국 판화운동의 선구자로 알려진 소설가 루쉰(1881∼1936) 못지않게 이 땅에서 오래 기억되어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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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희 건국대 현대미술학과 겸임교수_ 미술대학을 졸업했지만 창작에서 전향해 몇 년간 큐레이터로 일했고 미술 전문지 <월간미술> 기자로 입사해 편집장까지 맡아 18년 8개월 동안 근무했다. ‘저널리스트’로 불리는 것보다 여전히 아티스트에 가까운 ‘미술인’으로 불리기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