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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 베르너 판톤이 디자인한 판톤 체어는 아무런 이음매나 조립 없이 단 한 번에 사출성형된다.
코로나19로 집 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보니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 일도 엄청나게 늘었다. 배달은 자연스럽게 포장재라는 쓰레기를 낳는다. 주로 종이와 플라스틱이다. 종이도 문제지만 플라스틱은 땅과 바다를 오염시키고 해양 동식물에게 직접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더욱 큰 문제다. 플라스틱 기술이 발전하는 동안 그것은 기업과 소비자는 물론 동물들에게도 이익을 주었다. 더불어 디자이너들에게도 창작의 자유를 선사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플라스틱은 자연에 커다란 해를 입혔고, 그것은 결국 인류에게도 엄청난 재앙이 될 것이다. 플라스틱은 <파우스트>에 나오는 메피스토펠레스의 계약과 같이 욕망의 실현이라는 축복을 준 것처럼 하더니 우리 삶의 터전인 자연의 파괴라는 저주로 대가를 치르게 한다.
플라스틱은 ‘중합체’라고 하는데, 중합체는 분자 사슬이 유연하게 연결되어 있어 변형해서 뭔가를 만들기 쉽다는 특징을 갖는다. 인공 중합체인 플라스틱이 나오기 전에는 자연 중합체를 사용했다. 자연 중합체가 귀해지자 인공 중합체가 개발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당구공이다. 19세기 유럽인들은 상아를 이용해 당시 폭발적 인기를 끌던 당구의 공을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상아로 고급 빗, 칼 손잡이, 담배 파이프, 단추 등을 만들었다. 그러다 보니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 코끼리가 떼죽음을 당했다. 이미 19세기에 코끼리 멸종을 우려하는 기사가 나올 정도였다. 코끼리뿐만 아니라 바다거북도 재앙을 피하지 못했다. 거북의 등은 안경테, 빗, 가구 장식의 재료로 애용되었기 때문이다.
초창기 플라스틱인 셀룰로이드가 개발되면서 코끼리와 바다거북은 한시름을 놓았다. 셀룰로이드는 상아로 만든 당구공과 거북의 등으로 만든 빗은 물론 생활 곳곳에서 쓰였다. 20세기 초에는 셀룰로이드보다 좀 더 화학적인 방식으로 만들어진 베이클라이트(bakelite)가 발명되었다.
1920년대에 등장한 라디오(사진 5)는 그 모양을 실내 분위기에 맞게 가구처럼 디자인했다. 나무도 사용했지만, 가격이 비싼 재료의 대체재로서 플라스틱은 각광을 받았으므로 곧 베이클라이트로 감싼 라디오가 쏟아져 나왔다. 베이클라이트가 발명된 뒤 ‘플라스틱(plastic)’이라는 용어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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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 크리스 조던의 다큐멘터리 <앨버트로스>에서 어미가 준 플라스틱을 잔뜩 먹고 죽은 새끼 앨버트로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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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전쟁이 끝난 뒤 플라스틱 기술이 생활용품의 생산에 박차를 가한다. 대표적인 상품이 미국의 주방용기인 터퍼웨어다.
플라스틱의 본질은 ‘변신주의’
우리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플라스틱인 폴리에틸렌의 경우 1933년에 발견되었다. 전쟁을 치르면서 멀리 남아메리카나 동남아시아에서 가져오는 천연고무의 대체재로 폴리에틸렌의 기술이 급속도로 발전해 주로 전쟁 물자를 만드는 일에 쓰였다. 전쟁이 끝나자 이 기술은 생활용품을 만드는 데 투입된다. 전후 가장 먼저 성공한 생활용품은 ‘터퍼웨어’(사진 3)라는 이름의 주방 용기였다. 미국의 사업가 얼 터퍼는 기존의 사기그릇, 금속 그릇보다 훨씬 싸고, 깨지지 않고, 밀폐되고, 투명해서 속이 보이고, 더구나 알록달록한 색상을 입힐 수 있는 플라스틱 용기로 떼돈을 벌었다.
플라스틱의 가장 큰 장점은 저렴하다는 데 있다. 그래서 터퍼웨어를 미국의 미디어는 “39센트의 예술”이라고 불렀다. 그 저렴성으로 천연고무는 물론 나무나 섬유를 흉내 낼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값비싼 보석도 모방한다. 이렇게 무한한 변신의 가능성을 보고 프랑스의 기호학자인 롤랑 바르트는 플라스틱의 본질을 ‘변신주의’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결점 또한 그로부터 비롯한다. 플라스틱은 ‘싸구려 모조품’이라는 딱지가 붙는다.
미국의 디자이너 찰스 임스는 이렇게 말했다. “화강암은 너무 단단한 물질이어서 그것으로 뭔가 좋은 것을 만들기가 쉽지 않지만, 그것으로 나쁜 것을 만드는 것도 극히 어렵다. 플라스틱은 그것으로 뭔가 나쁜 짓을 하기가 놀랄 만큼 쉽다. 물질 자체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플라스틱 키치(kitsch)’, 즉 조잡한 취향의 모조품이 판을 치게 된 것도 플라스틱 탓이다. 또한 플라스틱은 싸구려이기 때문에 쉽게 버릴 수 있다는 점에서 소비주의를 더욱 부추긴다.
반면 뛰어난 디자이너들은 싸구려라는 인식이 강한 플라스틱으로 예술성을 더한 가구를 만들어 커다란 명성을 얻었다. 덴마크의 베르너 판톤은 1959년에 기이한 형태의 의자(사진 1)를 디자인했지만, 당시 그 디자인을 구체적인 물질로 만들 수 있는 기술이 부족했다. 무려 8년 뒤 스위스의 가구 회사인 비트라가 이 의자를 단 한 번의 사출성형으로 생산하는 데 성공한다. 비트라는 미국 허먼 밀러의 유럽 공장에 불과했지만, 이 의자의 생산으로 큰 도약을 한 뒤 오늘날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가구 브랜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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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 이탈리아 디자이너 비코 마지스트레티가 디자인한 달루 램프. 이탈리아는 고급스러운 플라스틱 제품의 디자인으로 싸구려라는 인상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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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 1920년대 등장한 라디오는 실내 분위기에 맞게 가구처럼 디자인되었는데, 그 재료는 나무가 아니라 ‘베이클라이트’라는 플라스틱이다
무한한 창조에서 인류를 위협하는 도구로
한편 북유럽 국가처럼 나무 자원이 풍부하지 않은 이탈리아 역시 플라스틱으로 아름다운 가구를 만드는 데 뛰어난 재주를 발휘했다. 특히 그들은 기존의 플라스틱 제품들이 비싼 재료를 모방하는 것에서 벗어나 플라스틱 자체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세계 가구계를 강타했다. 이탈리아의 가구산업은 조형 가능성이 무궁무진한 플라스틱이라는 재료를 만나 전후 피폐해진 경제를 살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사진 4).
이렇게 무한한 변신주의와 저렴성으로 인해 플라스틱은 일상의 모든 곳에 침투했다. 이제 플라스틱이 없는 세상은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한국은 이 플라스틱 원료 생산의 강국 중 하나다. 폴리에틸렌 원료는 작은 알갱이로 생산되는데, 이것을 ‘너들(nurdle)’이라고 부른다. 이 너들을 비롯한 각종 플라스틱 쓰레기가 태평양 바다를 오염시켜 바다 생물을 죽음에 이르게 하고 있다.
미국의 예술가 크리스 조던은 <앨버트로스>라는 다큐멘터리를 통해 플라스틱의 해양 파괴를 고발한다.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미드웨이섬에 서식하는 수백만 마리의 앨버트로스는 바다 위에서 사냥을 한 뒤 새끼에게 먹인다. 하지만 그들이 입에 담아온 식량은 플라스틱이고, 그것을 먹은 새끼는 바다로 날아가지 못하고 죽고 만다. 이 충격적인 영상(사진 2)은 마치 인류의 미래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동물과 귀한 천연자원을 아끼고자 한 것에서 출발한 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무한한 창조의 가능성을 주었고, 대량생산되는 저렴한 생활용품을 낳았다. 그것은 다시 역으로 동물과 자연을 파괴하고 인류의 삶까지 위협하는 수준에 이른 것이다. 플라스틱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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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_ 홍익대 예술학과에서 미술 이론을 전공하고 월간 <디자인> 기자와 편집장, 대림미술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현재 디자인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며, 저서로 <당신이 앉은 그 의자의 비밀> <쇼핑 소년의 탄생> 등이 있다.